친일파에 대한 증오는 지금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도 대단했다. 이완용에 대한 대중의 원한이 대표적이다.
 
1926년 이완용이 68세로 사망한 뒤 총독부 2인자 정무총감이 장례식을 주관하고 천여 대의 인력거가 동원될 때, 한쪽에서는 대중들이 축제 분위기에 들뜨는 상반된 상황이 연출됐다. 당시의 인기 대중잡지 <개벽>은 "죽는다 죽는다 하던 이완용이 아주 죽고 말았다"며 "경성의 청소부들은 또 '이제부터는 공동변소와 벽이 깨끗해졌으니 무엇보다 좋겠다'고 치하하겠지"라는 흥분된 어조로 환영의 뜻을 표했다.
 
당시 서울 시내 화장실들은 '이·박 요릿집'이란 별칭으로 불렸다. 을사오적인 이완용과 박제순을 욕하는 낙서가 많다는 의미였다. 이완용의 죽음을 계기로 그런 낙서들이 사라지게 됐으니 경성 시내 청소 노동자들이 좋아하리라는 것이 위 기사의 의미였다.
 
친일 매국노를 그처럼 증오했던 한국인들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후반부터 충격적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존경했거나 좋아했던 문필가 혹은 예술가들이 친일파로 변신하는 상황들을 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좋아했던 사람이 미운 모습으로 갑자기 돌변했을 때의 심리적 충격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대중가수 백년설도 그런 충격을 준 예술인 중 하나다. "문패도 번지수도 업는 주막에/ 구진 비 나리든 그 밤이 애절구려"로 시작하는 <번지 없는 주막>으로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기억되는 음악인이다.

스물 넷에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누린 가수 백년설
 
 백년설

백년설ⓒ 위키백과

  
본명이 이갑룡이고 나중에 이창민으로 개명한 백년설(예명)은 무명가수 시절이 없었다. 1939년(24세)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2년 뒤부터 친일 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2년간 그의 노래를 좋아한 대중한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매료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돌 가수'를 미워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됐으니, 팬들이 적지 않게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
 
일제 강점 5년 뒤인 1915년 5월 19일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난 백년설은 성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16세)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지만, 농업인의 길로 향하지는 않았다. 졸업 뒤 서울로 떠난 그는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사무직의 길을 택한 것이다. 부기학교 수료 뒤 그는 전공을 살려 은행과 신문사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꿈꾼 것은 농업인도 사무직도 아니었다. 극작가가 진짜 희망이었다. 기회를 봐서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 공부를 해야겠다고 그는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친해진 사람들이 음반회사 문예부 사람들이다.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음반회사가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게 인연이 돼,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들이 일본에 녹음하러 갈 때 그도 동행하게 됐다.
 
이 동행이 인생을 바꿔놓았다. 가수들 따라 일본 갔다가 그도 시험 삼아 녹음을 해보게 됐고, 이때 녹음한 <유랑극단>이 1939년 1월 발매돼 뜻밖의 히트를 쳤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극작가를 포기하고 가수의 길로 매진하게 된다.
 
우연찮게 시작한 가수의 길,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주다

우연찮게 시작한 가수의 길은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그를 단번에 정상급 가수로 올려놓아 주었다. 음악 평론가 선성원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는 "그는 당대 최고의 가수였는데,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음반이 10만 장이나 팔렸다는 사실로 그 인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1년까지 태평레코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1939년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일자일루>, 1940년 <어머님 사랑>, <비 오는 해관>, <나그네 설움>, <남포불 역사>, <한 잔에 한 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번지 없는 주막>, <산 팔자 물 팔자>, 1941년 <만포선 길손>,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허허바다>, <고향 길 부모 길>, <마도로스 박>, <석유등 길손> 등을 발매해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랬던 그가 얼마 되지 않아 친일가수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찬양하는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의 설명이다.
 
"백년설이 부른 군국가요는 1941년 <아리랑 만주>, 1942년 <모자상봉>, <아들의 혈서>, <위문편지>, <이 몸이 죽고 죽어>, <즐거운 상처>, 1943년 <망루>, <부모이별>, <옥토끼 충성>, <조선해협>, <혈서지원> 등 11곡이 확인된다."
 
위 노래들 중에서 <모자상봉>은 일본 군국가요인 <구단의 어머니>를 번안한 가요이고, <조선해협>은 지원병 모집을 위한 선전 영화 <조선해협>의 주제가였다. 그리고 <혈서지원>은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기념음반에 수록된 노래다. 백년설이 남인수·박향림과 함께 부르고 오케레코드사가 발매한 <혈서지원>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가사 2행의 '성수'는 '임금의 나이'를 뜻한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聖壽)만세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
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
감격에 못 이기어 손끝을 깨물어서
나라님의 병정 되기 지원합니다.
 
나라님 허락하신 그 은혜를 잊으리
반도에 태어남을 자랑하여 울면서
바다로 가는 마음 물결에 뛰는 마음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일왕(천황)의 병정이 된다고 하니 너무 감격스러워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는 가사가 눈길을 끄는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른 백년설·남인수·박향림의 목소리는 네이버 지식백과 '혈서지원' 페이지의 하반부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 '음원 듣기'를 클릭하면 세 가수의 노래가 생생하게 나온다.
 
백년설은 군국주의 대중가요를 확산시키는 데도 참여했다. 이른바 '일본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 공모에서 당선된 작품들을 부르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의 설명이다.
 
"1940년 6월과 8월에 제2방송을 통해 일본의 기원(紀元) 2600년 기념으로 경성방송국에서 현상모집해 당선된 <흥아의 봄>, <희망의 뱃길>, <순정의 꽃장사> 등을 불렀다."
 
군국주의 대중가요를 확산시키는 데 협조하는 그의 활동은 음반 발매로만 그치지 않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가 주관하는 재선(在鮮)부대연예위문단 단원이 되어 일본군 부대와 육군병원을 돌며 위문공연에도 참여했다. 일본 괴뢰국 만주국의 건국 10주년을 축하하고자 만주개척촌위문연예단 단원이 되어 만주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의 친일 활동은 이 외에도 많다.
 
문필가나 행정관료 출신의 친일파와 달리, 백년설 같은 대중가수 출신 친일파는 대중적으로 훨씬 잘 인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중가수 출신 친일파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거리를 활보하기가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년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해방 뒤에도 변함없이 가수 생활을 했다. 1956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가 되고 평화신문사 사업국장도 됐다. 나중에는 가수협회 회장도 맡고, <사랑의 함정>과 <번지 없는 주막> 같은 영화도 제작했다. 경향신문사 일본지사장도 맡았다. 그렇게 살다가 1980년 12월 6일 죽었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서했다.
 
대중들이 잘 알 정도로 친일을 한 그가 해방 뒤에도 변함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8·15 뒤에도 친일파가 권세를 잡았기 때문이다. 친일청산에 적극적이었던 노무현 정부 때 그에게 훈장이 추서된 것은 친일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만큼 둔감함을 보여준다.
 
대중가수 출신의 친일파가 백년설 한 사람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대중가수들도 친일 대열에 가담했다. 이들의 친일매국 행위를 밝혀내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입력돼 있는 그들의 노래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며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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