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는 수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 작정하고 웃기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어서 사실 JTBC 금토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본격 수다 코믹 드라마'를 표방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수다는 찰지고 진짜 웃기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소리를 내서 깔깔깔 웃어본 적이 오래 돼서 기억조차 없는데 간만에 박장대소를 했다.
 
'똘끼만렙 드라마 작가(진주)', '흥행 대박 난 다큐멘터리 감독(은정)', '짠내 나는 워킹맘(한주)'. 이 드라마의 세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랑에 아픔을 갖고 있다는 것. 진주는 7년 사귄 남친과 헤어졌고, 은정의 남친은 은정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병으로 죽었으며, 한주는 죽자 살자 매달리던 남친에게 배신당해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다들 하나 같이 기구하다. 게다가 사랑만 힘든 게 아니다. 서른이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그들이 살아내야 할 현실은 냉혹하다.

진주와 친구들이 겪는 삶의 고단함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 JTBC


진주는 드라마 보조작가로 새출발하며 제2의 인생을 꿈꿨지만, 제대로 일도 하기 전에 해고당한다. 은정은 괜찮은 듯 살아가지만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죽은 남친 홍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 친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한다.

한주는 싱글맘이 되어 마케팅 회사에서 현장 PD들의 온갖 비위를 다 맞추면서 일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나이 서른 때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굳이 서른의 나이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내용만 다를 뿐 지금의 나도 이해되는 고단함들이다.
 
나이를 먹으면 갑질을 덜 당할 줄 알았다. 나도 드라마 메인 작가처럼 피디들 앞에서 떵떵거리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눈치 봐야 하는 '을'이나 '병' 작가다. 다음을 도모하기 위해 안 나오는 웃음을 짓기도 하고, 속에서는 천불이 나는데도 이해하는 척 연기를 할 때도 종종 있다. 그러고 뒤돌아서면 잘 참은 내가 대견한 게 아니라 비굴한 내가 꼴 보기 싫어질 때가 더 많다.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는 프리랜서다 보니 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이 도돌이표에 갇힌 듯한 삶에서 탈출해 버리고 싶을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나마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오빠라고 불러보라"는 식의 말은 안 들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디 이런 일을 나만 겪었을 리는 없다. 한 번쯤은 당해봤을 법한 일들, 짠내 나는 일상을 감독은 유쾌하게 풀어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병맛 사이다 같은 장면들이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은정의 직장 상사가 "너 나한테 오빠라고 해볼래"하며 버터 한 통은 먹은 듯한 표정으로 추파를 던지자 은정은 그동안 참았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뭐, 이 개새끼야"하면서 쇠막대기를 들고 쫓아간다.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 JTBC


또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오빠"라는 애교를 부려 보라는 촬영감독의 말에 한주는 고민을 거듭하다 '더러워서' 오빠 애교를 시전하며 모두를 기겁하게 만든다. 현실에서는 차마 실행으로 옮기기 어려우나 마음속으로는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돌려봤을 반격들이다. 사이다 같은 한 마디를 해주고 싶었는데 그 한 마디를 찾지 못해 늘 뒤돌아서서 벽을 쳐야 했던 답답함을 드라마 속 세 주인공이 시원하게 해결해 주니 도무지 안 웃을 수가 없다.

<멜로가 체질>의 가장 큰 무기는 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멜로가 체질>의 가장 큰 무기는 수다다. 박자를 타는 듯한 리듬감 있는 수다는 이들에게 힘이다. 일상의 고단함을 풀어내고 제대로 살아내도록 돕는 힘. 이런 류의 수다는 아무나와 가능하지 않다. 서로의 얼굴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챌 수 있는 친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이들의 수다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다들 등에 무거운 짐 보따리는 이고 살고 있지만, 친구 은정이 자살을 시도한 것을 알고 한주와 진주, 은정의 남동생은 은정의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산다. 이들은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일상과 고민을 나누기도 하며, 고민을 던지기도 한다.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일종의 가족이다.

이들은 은정을 위해서 들어와 살지만 서로를 지지해 주는 기둥이 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부담스럽게 배려하지도 않는다. 무심한 듯 느슨한 거리를 유지하는 바람직한 친구관계이자 동시에 가족 관계다. 혈연으로 맺은 가족이 주는 힘과 위로도 크다. 하지만 돌아보면 연애 문제든 직장 문제든 가장 의논을 많이 했던 대상은 친구였다.
 
나에게는 30년 지기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 동아리에서 만나 청년과 중년까지 우리는 같이 나이 들고 있다. 그녀와 조금 더 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둘 다 오랫동안 싱글이었던 탓이 크다. 우리는 휴가를 맞춰서 여행을 자주 다녔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해서 동남아, 미국, 캐나다... 또 그 친구가 결혼 전 독립해서 살 때에는 MT 가듯 주말에 그녀의 집에서 밤새 수다를 떨기도 했다.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 JTBC


내가 정수리까지 화가 난 날, "나 오늘 힘들어"하면 그녀는 두말 하지 않고 말했다. "나와. 밥 먹자." 그 말을 듣고 만나러 가는 길은 이미 위로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 친구 역시 아픈 가족사가 힘겨울 때는 술잔을 기울이며 속내를 터놓기도 하고, 이 시키 저시키 하며 맘에 안 드는 직장 동료의 흉을 시원하게 보기도 했다.

같이 먹고, 자고, 다닌 만큼 공유하는 추억이 많았던 그 친구는 지금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낳아 잘 살고 있다. 마흔 넘어서 그녀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다른 친구들 때와는 달리 마음이 무척이나 허전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결혼한 이후로, 더 이상 친구의 집에 가서 잘 수 없고, 여행을 같이 가서 밤새 술을 마시며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관계는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 젊을 때와는 다른 결로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20대 때에는 서른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고, 30대 때에는 그래도 마흔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마흔을 넘기면서는 내가 선택하고 헤쳐 나가야 할 문제와 책임은 더 무거워졌다.

그래서 가끔 나 혼자 버티기 버겁다 싶을 때, 내 밑바닥을 보여도 꼴사납게 보지 않을 누군가가 필요할 때 나는 그 친구를 찾는다. 그녀도 치매에 걸린 엄마의 증상이 심해져서 심란해질 때마다 나에게 "커피 한 잔 사줘"하면서 전화를 건다. 난 그녀의 호출이라면 무조건 오케이다. 우리는 수다를 떨면서 서로에게 지푸라기가 되어 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 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 친구는 같이 살지만 않을 뿐, 내게는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다. 그 친구와의 수다는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에서 만나는 두려움, 재미를 나누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기도 하면서,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게 하는 안식이자 힘이었다.

삶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이유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JTBC 금토드라마 <멜로는 체질> 한 장면 ⓒ JTBC


<멜로가 체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어쩌냐. 삶은 앞으로 더 만만치 않을 텐데.'

드라마 작업을 같이 하자는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안 해요"라고 거절하고 들어온 진주에게 친구들이 "우리 나이에 안 한다는 말 더 신중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기회라는 게 그렇잖아. 주름이 다 빼앗아"라고 한 충고는 뼈아픈 현실이다.

또 진주를 시기하고 싫어하는 정혜정 작가의 방해로 드라마 편성을 못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주가 "그런 유치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게 부럽다. 나도 빨리 성공해서 유치하게 살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에서는 어이없고 유치한 일들이 성실하게 일어나는 반면, 내가 유치하게 살 수 있는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삶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이유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좋은 소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 살아진다는 건 버틴다는 것. 버티기 위해서는 구명조끼가 필요하다. <멜로가 체질>에서 얻은 구명조끼는 가족과 수다다.

삼겹살에 미나리를 넣어서 함께 쌈을 싸서 먹을 수 있는, 내가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는, 혼자이지만 손이 닿는 곳에 믿을 만하고 온기 있는 가족이 있다면 버틸 수 있다. 또 사는 게 괜찮지 않을 때마다, 괜찮지 않음을 토해낼 수 있는 수다도 필요하다. 나를 다 내려놓아도 괜찮은 수다. 따뜻함이 있는 유쾌한 수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에 적응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면서 고유한 자기 목소리를 찾고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수다. 그런 수다가 있다면 어떤 삶이든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멜로가 체질>은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이 깨지거나 상실되어서 공허해진 삶의 빈 부분을 채우는 우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똘끼 어린 병맛 사이다도 재밌지만, 친구들의 수다와 공감이 있는 따뜻함이 더 좋다. 여자들의 우정은 남자들이 주는 안정감과는 다른 차원의 안정감을 준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해줄 수 없는 일들, 예를 들어 세밀한 감정을 서로 읽어주고, 공감해 주고, 지지해줄 수 있다. 그들의 사랑도 응원하지만, 우정을 더 응원하게 되는 까닭이다.

나는 세 명의 주인공들이 사랑에 상처받은 만큼 사랑으로 치유되고 행복해지길 바란다. 해피 엔딩에 인색해진 요즘, <멜로가 체질>은 식상하더라도 그런 결말이었으면 좋겠다. 간만에 빵빵 터지는 드라마를 만났는데 청춘의 애환을 너무 희화화하거나 웃겨야 한다는 강박에 말장난 대잔치만 하지 않는다면, 남은 횟수 동안 마음껏 깔깔깔 웃고 싶다. 드라마는 그렇다 치자. 그야말로 드라마니까.

그러나 현실은 결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행복하게 살았더래요~"하며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가 만나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는 결론 이외의 옵션도 많아지고 존중받게 되었으면,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우정을 지키며 유머 감각이 있는 수다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정도만 되어도 만만치 않은 삶을 꽤 괜찮게 함께 '존버'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멜로가 체질 천우희 수다 이병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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