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2018) 스틸컷.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2018) 스틸컷.ⓒ EIDF

 
근래 들어 러시아에선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다고 한다. 스탈린은 독재와 대숙청, 공포정치의 대명사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러시아에선 스탈린의 인기가 높다고 알려졌다. 왜일까.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장밋빛 기대가 높았다. 당시 소련과 미국의 소득차는 약 2배 정도였다고 한다. 동서독의 소득차도 그 정도 수치였다. 

러시아인들은 공산주의만 포기하면 자기들도 금세 미국인처럼 잘살 줄 알았는데 막상 구체제가 무너지고 나니 엄청난 경제·정치적 혼란이 야기됐다. 새로운 체제에 실망을 느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급부상했고, 그 중심에 스탈린이 있었다. 

지난 19일 개막한 제16회 EBS국제다큐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Women of the Gulag, 2018)에도 이러한 스탈린에 대한 높은 평가와 향수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시작과 끝에서 러시아인들이 스탈린을 기리는 모습을 반복해 보여주면서, 그가 1930년대부터 1953년 사망 당시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해 정치범수용소(굴라크, Gulag)로 보낸 악행을 고발한다.

당시 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은 이제 80~90대의 노인이 돼 카메라 앞에 섰다.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험이지만 약 70~80여 년 전의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고발한다. 영화는 특별히 수용소 '생존자' 가운데 여성 수감자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로 고통스런 기억을 끄집어내 들려준다.

피해자들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미국이나 독일 스파이로 몰려 처형 혹은 수감되면서 '연좌제'로 인해 수용소로 끌려갔다. 사실상 가족 전체가 무고했다. 부조리하고 처절한 진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수용소로 끌려갈 때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다. 당시 스탈린의 잔혹한 '대숙청'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이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한 여성은 굴라크수용소에 도착해 굴을 팠다. 집도, 옷도, 식량도 없었다. 굴을 파고 가족 단위로 그 안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것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해야 했던 고려인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도 처음 도착한 낯선 땅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땅을 파고 지하에서 생활했다. 이들 수용소 생존자들은 그렇게 혹독한 환경에서 도시 건설에 동원됐다. 한 생존자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우리가 건설했다"고 말했다. 

벌목이나 광산 노동에 동원된 생존자도 있었다. 그중엔 우라늄 광산도 있었다. 그곳에선 방사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즉결 처분도 횡행했다. 모욕적인 말과 폭력이 반복됐다. 이미 심문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데다 제대로 된 식사도 오랫동안 하지 못한 상태에서 춥고 불결한 추방지로 끌려와 강제노역을 하게 되면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다. 

굴라크 당국은 이들에게 무거운 노동 '할당량'을 부과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징벌방으로 끌려간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수감자는 노동능력을 상실한다. 삶의 의지도 꺾인다. 굴라크 당국은 긴 처형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렇게 수많은 희생자들이 무를 향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2018) 스틸컷.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2018) 스틸컷.ⓒ EIDF

 
인간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봉기와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가 탄생했지만, 되레 인간을 말살하고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변질되는 아이러니를 인류는 지난 세기에 겪었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1862)을 통해 제정 러시아 시대의 '시베리아 유형지'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혁명 그룹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유형지로 보내진 그는 1849~1853년까지 약 4년간 시베리아에서 살인범이나 절도범 같은 형사범과 뒤엉켜 강제노역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이 깨닫고, 범죄자 유형의 인간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얻고 가능성을 엿보게 됐다. 정치범으로서 유형지에서의 생활은 어땠을까. 

기독교에 깊이 감화된 러시아 여성들이 재소자들에게 앞다퉈 보낸 구호물품 덕분에 시베리아의 생활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또 교정당국 입장에서 이들 재소자들을 데리고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재소자의 노역이란 것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고 도스토옙스키는 쓰고 있다. 그에 비하면 100여 년 뒤에 벌어진 잔혹한 인권 유린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러시아는 무엇을 위해 혁명을 일으키고, 피를 흘린 것일까.
     
스탈린 통치기에 저질러진 이러한 인류의 커다란 비극 앞에 생존자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남겨진 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생존자들은 수치심에 입을 다물곤 한다. 양심적인 러시아인들은 친구와 이웃은 죽었지만 자신은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진다.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에선 두 가지 '추모 방식'을 보여준다. 러시아인들은 광장에 모여 수용소에서 사망한 이들의 이름과 직업·나이·사망시점을 낭독한다. 또 이들의 빈 무덤을 조성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그 시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희생과 피해는 결코 복구될 수 없지만, 이는 인간성을 회복코자 하는 의미있는 시도일 수 있다. 또한 굴라크 수용소는 러시아인에겐 공산주의 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부정적 유산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국인에겐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쪽엔 정치범 수용소가 현존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수용소는 소련의 굴라크를 본 뜬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북쪽 수용소에도 노동 할당량이 있고, 폭력과 즉결 처분이 일상화돼 있다. 굶주림과 폭력으로 수감자가 사망하면 큰 구덩이를 파고 집단으로 묻어버린다는 수많은 증언이 보존돼 있다.

러시아와 동구권에선 이미 끝나버린 악몽이자 인공지옥이지만, 북한에서 여전히 현존하고 당면해 있는 현실이자 진실이기에 우리에게 더 아프게 다가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가 건설했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유태인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전후에 <이것이 인간인가>(1947)를 써서 수용소의 진실을 널리 알렸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수용소의 진실에 대해 진심으로 귀기울이지 않는다며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일종의 항의이자 절망의 표현이었다.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스틸컷.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스틸컷.ⓒ EIDF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약 20만 명에 달하는 북한 주민이 북한 곳곳에 건설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에 주목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동시대를 사는 비극의 당사자이자 목격자로서 남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하게 됐다.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은 상영시간이 53분으로 간결하면서 힘이 있고, 인상적인 장면이 많았다. 특히 음악의 사용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러시아 출신 여성 감독이 여성 생존자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도 좋은 시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지 않은, 혹은 미처 다루지 못한 진실이 한가지 있다.

영화에선 스탈린의 사후 굴라크가 점차 쇠퇴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면밀히 말하면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 사람들은 체제를 향해 사소한 불만을 터뜨렸다가 주변 사람들의 밀고로 수용소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용소와 이른바 교정시설은 1970~80년대에도 여전히 운영됐고, 전체주의를 유지하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영화에선 스탈린 통치기의 피해자들만을 조명했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과거사가 정리될 시기가 오면, 아마도 이후의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목소리도 다룰 만한 때가 올 것이다. 이 영화는 올해 EIDF의 페스티벌 초이스(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EBS에서 방영된 지난 20일 이후에 일주일간 인터넷(https://hoy.kr/kQat3)과 모바일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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