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삶이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공평한 결말이며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년이 되어서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 열린 2019광주세계마스터즈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70~80대 나이의 선수들이 노익장을 과시했고, 93세 최고령 선수가 출전하기도 했다. 이들은 '무언가에 부딪혀 이뤄내기에 늦은 나이라는 건 없다'는 걸 몸소 보여준 셈이다.

한 개인이 지닌 역사는 그 사회가 담아온 시간과 같다. 따라서 다음 세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년이 된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새로운 결심을 하거나, 또는 지난 시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신이 사라진 후의 미래를 그리고자 할 수도 있다. 

아래 소개할 작품들 속 세 명의 주인공에게 노년이란 아름다운 인생의 마침표일 뿐만 아니라,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에 직면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순간일지 모른다.
  
다음 세대를 위해 싸우는 쓸쓸한 울버린... 영화 <로건>
 
 <로건> 스틸컷

<로건> 스틸컷ⓒ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로건>은 오랜 시간을 이어져 온 영화 '울버린' 시리즈의 마지막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오랫동안 대대적인 차별, 그리고 입장이 갈린 채로 서로 싸워온 탓에 특수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 '엑스맨'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하나 둘 사라져간 상황을 보여준다.

극 중 노인이 돼 병든 프로페서X(패트릭 스튜어트)를 돌보는 '울버린' 로건(휴 잭맨)은 노쇠한 몸 때문에 특유의 민첩성과 엄청난 재생능력을 점점 잃어간다. 다른 엑스맨들처럼 인생의 끝자락을 준비 중인 로건은 삶의 마지막을 조용히 그리고 쓸쓸하게 맞이할 것이라 생각하며 지낸다.
 
하지만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만나면서 그의 삶은 바뀌게 된다. 로라를 통해 로건은 한 비밀 집단이 돌연변이 아이들을 모아 잔혹한 생체 실험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거 엑스맨들이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고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탄압을 당한 기억이 있는 로건은 로라를 지키기 위해 다시 전장에 뛰어든다.

돌연변이인 엑스맨이 대부분 사라진 세계에서 늙고 병든 로건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삶의 마지막 여정을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어린 돌연변이들이 다시 등장하고 과거 자신이 받았던 아픔이 재현되자, 차별을 먼저 겪은 세대로서 자신이 직접 나서 고통의 사슬을 끊고자 한다. 이는 기존의 강인한 히어로를 내세운 히어로물과 다소 차이를 보이는 줄거리다. 영웅의 성공과 성장보다는 삶의 마지막을 그려내고 기성세대의 책임감을 이야기하면서, <로건>은 울버린이라는 영웅의 서사를 완벽하게 연출해낸다.

이처럼 삶의 끝에서 시대적인 아픔을 끊어내려는 이를 담은 작품으로 <그랜드 파더>, 그리고 <그랜 토리노>도 꼽을 수 있다.
  
고엽제 후유증 겪는 참전용사, 그가 다시 싸우기로 결심한 이유
 
 <그랜드파더> 스틸컷

<그랜드파더> 스틸컷ⓒ 인벤트 디 , (주)디스테이션

 
영화 <그랜드파더>의 기광(박근형 분)은 참전용사지만 고엽제로 인한 고통 때문에 몇 년째 전우들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시위 중이다. 자신의 아픔 때문에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버스 기사로 홀로 살아가던 차에 기광은 어느날 갑자기 아들의 비보를 듣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홀로 남은 손녀 보람(고보결 분)을 만나게 된 기광은 보람을 보살피기 위해 곁에 남으려고 한다. 하지만 반항적인 보람과 거친 기광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던 중 아들의 갑작스러운 자살이 석연치 않은 기광은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고, 아들의 사망 배후에 함께 일하던 사장 양돈(정진영 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기광이 겪는 고통은 대한민국이 가장 눈부신 성장을 이뤘던 1960~1970년대의 이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민들은 빈곤한 삶 속에서도 오직 국가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고강도 노동을 견뎌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큰 이익을 취한 건 대기업, 특히 일부 정치가들이었다. 정작 베트남 전쟁 파병 군인들이나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노동자들은 오늘날까지 신체적인 고통과 빈곤에 시달리게 된다.
 
극 중 양돈은 자본가이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광의 아들은 목숨을 잃었고, 손녀 역시 검은 세력의 유혹을 받게 된다. 이에 기광은 사랑하는 손녀를 지키기 위해 직접 양돈과 맞서기로 결심한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양돈 패거리와 혈투를 펼치는 기광의 모습은, 시대의 악연을 끊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아픔을 경험한 이들이라는 걸 보여준다.

돈도 명예도 없고, 삶을 스스로 망친 아픔을 가족에게 화풀이하던 기광은 더 이상 가족이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는 인물로 변한다. 그가 지닌 인간의 품격은 자신이 지닌 걸 지켜내고 잘못된 폭력과 억압에 침묵하지 않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인종 다른 이민자 위해 싸우는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건과 기광이 겪은 상황은 <그랜 토리노>의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펼쳐진다. 과거 한국전 참전의 아픔을 간직한 월트는 '참회하라'는 아내의 유언에도 여전히 '고집불통'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그의 유일한 친구는 마치 자식 같은 낡은 자동차 '그랜 토리노'다. 친한 지인 없이 고철덩어리 자동차만 곁에 남은 월트의 모습은, 한때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던 그의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그랜 토리노> 스틸컷

<그랜 토리노> 스틸컷ⓒ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극 중 차량 그랜 토리노는 197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냉전 체제 하에 서로를 향한 혐오와 염증을 키워왔던 미국 사회의 이면을 상징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랜 토리노를 훔치기 위해 월트의 집에 잠입한 타오(비 방)를 만난 순간, 그의 삶은 달라진다. 이민자 가정 출신의 아시안 소년 타오는 아시안 갱단의 협박에 못 이겨 월트의 차를 훔치려고 했던 것이다. 백인 혈통이 아닌 유색인종이 자신이 사는 마을에 많아지는 걸 꺼려하던 보수 성향의 노인 월트는 타오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바꾼다.
 
한때 미국은 사상과 체제가 우선이 된 냉전시대를 겪었고, 이분법적인 논리로 사람들을 분류하던 시기를 거쳤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결국 냉전시대의 씨앗에서 발생했던 것들이고, 극 중 타오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민자이다. 그러고 보면, 서로 동떨어진 듯한 신세의 타오와 월터는 사실 어느 지점에선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또한 전쟁의 여파는 훗날까지 계속됐다. 전쟁 이후에도 사상, 피부색, 국적 등을 이유로 인간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배척하는 분위기는 사회에 남아 수많은 차별과 폭력을 낳았다. 이런 역사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민자를 향한 증오와 폭력으로 말이다.
  
 <그랜 토리노> 스틸컷

<그랜 토리노> 스틸컷ⓒ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물론 영화 속 타오를 향한 폭력은 이민자를 향한 분노의 폭력이 아니라, 같은 이민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그리고 여기에 월트라는 인물이 끼어들게 된다. 월트는 타오가 겪는 폭력을 단순한 이민자들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사회의 아픔과 고통 중 다수는 결국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국가, 인종, 사상, 계층 등 그 사람의 내면을 보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외형만을 바라보고 폭력을 가하기 때문에 벌어지곤 한다.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이들 이민자 가족을 유색인종이자 외부인으로 보지 않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조화를 추구한다. 월트에게는 타오 역시 자신과 같은 미국인이며 자신의 친구이다. 극 중 '진정한 보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는 자신의 '앞마당'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타오처럼 미국 사회의 어린 세대를 위해 갱단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이런 줄거리는 미국 사회가 지닌 차별의 문제를 정의라는 관점에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월트는 '선한' 시민 타오를 지키고 '악'인 갱단을 처단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전장에 나선다.
 
다만 이번에 그가 다시 뛰어든 전쟁의 이유는 사상도, 인종도 아니었다. 미국 사회 내에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갈 이들을 지키고 악한 이들을 응징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와 같은 영화의 메시지는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차별과 이분법적 사고라는 전쟁의 명분들을 깨버리는 통쾌한 한 방이다.

어쩌면 기성세대가 떠나기 전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겪은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차별과 아픔을 미래 세대가 겪지 않게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단순하고도 묵직한 메시지를 앞서 소개한 작품들 <로건> <그랜드파더> <그랜토리노>가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 씨네 리와인드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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