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 <봉오동 전투>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 포스터.

<봉오동 전투> 포스터. ⓒ 쇼박스

 
누구는 '국뽕'이라고 폄하했고, 누구는 '간만에 속이 다 후련하다'고 극찬했다. 또, 누구는 '봐도 후회하고, 안 봐도 후회하는' 영화라고 평했다. 영화를 보고나니 그들의 평가가 모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 이야기다.

'웬 봉오동 전투?' 솔직히 영화 개봉 소식을 듣고 순간 떠올랐던 질문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청산리 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나 싶어서다. 청산리 대첩은 봉오동 전투보다 더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도 훨씬 잘 알려져 있지 않나.

남아 있는 사료를 비교해 봐도, 청산리 대첩을 영화화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국뽕'이라고 해도 역사적 사실에 기댈수록 더 위력을 갖는 법이다. 봉오동 전투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사에 근거한다. 영화는 해당 기사를 해설하듯 보여주면서 끝난다.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라는 걸 강조하려는 뜻일 테지만, 관객들은 당장 스마트폰 검색창에 봉오동 전투를 입력하게 될 듯하다.

역사를 다룬 영화라고 해서 죄다 사실일 수도 없고, 사실일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건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교과서보다 영화를 통해 역사를 이해하려는 요즘 세태에는 조심스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비율'과 '배합'의 문제다. 대체로 근거할 만한 사료가 빈약한 오래된 사건일수록 상상력의 비중이 크고, 현대에 가까운 사건일수록 영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어디에 가까울까.

감독이 이미 세세히 밝힌 터라, 영화 속 장면과 등장인물 중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에 대해서 첨언할 필요는 없겠다. 봉오동과 삼둔자, 고려령 등의 지명과 홍범도라는 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허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영화 속 홍범도는 주인공도 아니다.

왜 청산리 대첩이 아니라 봉오동 전투인가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쇼박스


그럼에도 자꾸만 홍범도라는 이름에 눈길이 머물렀다.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이끈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지만, 동시대를 살다간 김좌진에 견줘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1868년생이니 1889년에 태어난 김좌진과 20여년 터울이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3.1운동 직후 벌어진 독립전쟁사를 서술할 수 없다.

몇 해 전 수업시간 아이들을 대상으로 두 사람의 인지도에 대해 조사하라는 수행평가를 내준 적이 있다. 주말을 이용해 '현대사의 라이벌'을 사진과 함께 게시해두고 오가는 이들에게 스티커를 붙이도록 했다.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 격차가 워낙 커서 놀라웠다.

당시 김좌진의 증손이 자신의 아들 세 명과 함께 TV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던 영향이 컸다. 정작 놀랐던 건, 홍범도라는 인물을 처음 들어봤다는 고등학생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사에 소홀한 교육과정 탓이라고 눙쳤지만, 교사로서 적잖이 민망했다.

홍범도와 김좌진의 대중적 인지도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으로만 치면 누구도 우위를 말할 수 없다. 김좌진의 아들로 알려진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도 영향이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부모 여의고 머슴살이 한, 천출 홍범도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쇼박스


우선 집안의 차이가 두드러져 보인다. 홍범도는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천출인데 반해, 김좌진은 세도가 안동 김씨의 종손으로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의 양자다. 김좌진은 배움의 기회조차 없어 문맹이었던 홍범도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인물이다.

게다가 홍범도는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김좌진과는 '이념' 또한 다르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당시, 같은 독립군으로서 무슨 이념이 있었을까 마는, 이후 그들에겐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의 일이다.

홍범도는 꿈에 그리던 해방은 보질 못했지만, 1930년 암살당한 김좌진보다 13년을 더 살았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독립군 대장'이라고 칭송받았던 홍범도의 말년의 삶은 신산했다. 재기를 꿈꾸며 소련에 몸을 의탁했지만, 1937년 동포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미 1923년 이후 소련 영토 내에서 한국인들의 무장활동이 사실상 금지된 탓에 독립군을 다시 조직하긴 어려운 처지였다. 하지만 강제이주를 당해서도 동포들을 규합해 집단농장을 개척하는 등 독립을 향한 그의 강인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동포사회의 중심이었다.

홍범도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영웅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한인 극단에서 무장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73세의 나이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자원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비정한 역사관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그

천출에다 공산주의자.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위인으로 삼을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이다. 더욱이 김좌진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지금껏 그는 비정한 역사관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의 유해는 강제이주된 땅 카자흐스탄의 작은 도시 크질오르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적어도 영화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하는 첫 영화임엔 분명하다. 영화 <암살>이 남과 북에서 모두 버려진 김원봉을 대중적으로 각인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암살>을 본 사람이라면, 김원봉이라는 이름을 낯설어 할 리 없다.

만약 영화 <암살>처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면, 장담컨대 홍범도 역시 김원봉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두 영화는 플롯조차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일례로, 영화 <암살>의 김원봉(조승우 분)도, 영화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도 모두 '카메오'로 등장한다.

홍범도를 '듣보잡'으로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면, 아이들과 함께 영화 <봉오동 전투>를 보기를 권한다. 중학교 3학년 정도의 아이들이라면, 영화 속 장면만으로도 다양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국뽕'이면 어떤가, 성찰의 기회가 된다면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어른들이 보기에도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이 많아 그게 좀 신경이 쓰인다.

북한 사투리로 포효하던 유해진... 그 대사가 준 메시지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쇼박스


사족 하나.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하나 있다. 민간인을 학살하고 부녀자 겁탈을 일삼는 등 악역을 맡은 일본인 배우들이 여럿 나오는데, 한일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그들의 안위가 걱정됐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일본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역적'이자 '매국노' 아닌가.

입장을 바꿔서, 요즘 같은 시국에 우리나라의 배우들 중에 일본의 역사를 다룬 영화에 출연해서 저들의 입장을 두둔하는 배역을 맡을 이들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들을 향해 '돈을 벌기 위해 민족적 자존심을 내팽개쳤다'고 손가락질하지 않겠는가. 부디 기우였으면 좋겠다.

이왕 스포일러 한 김에 하나만 더하자.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135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 중에 가장 뭉클했던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황해철(유해진 분)이 이름도 없는 독립군들 앞에서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북한 사투리로 포효했던 그 말.

"어제 농사짓던 사람들이 오늘 독립군이 되어 총을 쏘는 거야!"

우리나라는 늘 이름 없는 백성들이 지켜냈다는 것. 어쩌면 무명의 스턴트맨 출신인 원신연 감독이 영화 <봉오동 전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주제가 이것 아니었을까. 홍범도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독립군을 상징하는 '대명사' 아닌가.
봉오동 전투 홍범도 암살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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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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