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집회에서 발언 중인 김복동 할머니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발언 중인 김복동 할머니

▲ 수요집회에서 발언 중인 김복동 할머니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발언 중인 김복동 할머니 ⓒ (주)엣나인필름

  
"일본 대사는 들어라. 내가 전 세계로 다니면서 동상을 세울 테니 다 세우기 전에 하루 빨리 일본 정부에 말을 해서 사죄하고 배상하라.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잘라고 왔나. 얼른 일본 정부에 우리의 말을 전해라."
 
김복동 할머니의 발언에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 참가자들 목소리가 일본대사관 앞에 울려퍼진다.
 
 영화 <김복동> 포스터

영화 <김복동>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뉴스타파>와 정의기억연대가 공동기획한 다큐 <김복동>이 지난 8일 개봉됐다. 김복동은 1992년 이후 전쟁 성노예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와 평화활동가로 변신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김복동 할머니의 27년 간 삶을 조명한 영화다.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부분이나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지만 영화는 우리가 끝까지 일본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명백히 알게 만든다. 이제 몇 남지 않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몇 푼의 위로금이 아니다. 끔직한 전쟁 범죄의 피해자로 한 인간으로 지녔던 꿈과 희망을 빼앗긴 채 죄은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일본 정부가 공식적이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사과와 더불어 국가 차원의 배상도 이뤄져야만 한다.
 
김복동 할머니의 삶은 전쟁 범죄의 피해자인 일본군 '성노예'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통해 그 시간들로 잃어버린 한 인간의 보통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상처를 극복하고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담아낸다.
 
김복동 할머니는 1926년 경남 양산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만 14세 때인 1941년 군수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며 일본군이 강제 연행을 한다. 김복동 할머니는 군수공장이 아닌, 중국 광동,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 홍통, 싱가포르를 끌려다니며 일본군 '성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해방을 맞은 후 미군포로수용소를 거쳐 8년 만에 귀국해 결혼을 했으나 자녀가 없다. 남편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김복동 할머니는 고백한다.
 
"자식도 못 낳고, 남편한테 그런 일도 있었다는 죄책감에 말도 못하고 무엇이 탈이 나서 못 낳는가 검사를 하려는데 나는 안단 말입니다."
 
얼마나 죄책감이 심했을지 상상이 가는가. 외로움과 죄책감을 견디며 살던 김복동할머니는 이후 일본군 '성노예'로 살았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가 67세 되던 1992년 TV를 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던 조카와 언니 등은 김복동 할머니와 발길을 끊는다.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서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통해 일본의 전쟁 범죄를 폭로한다. 이후 김복동 할머니는 2019년 1월 28일 93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리고 일본대사관 앞 정기수요집회 자리를 지키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전쟁 범죄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등을 요구했다.
 
변호사 출신의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은 '전쟁 때는 군인들의 휴식과도 같은 '위안부'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협박이나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망언을 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증거가 없다는 오사카 시장의 망발에 '증거는 바로 나다'라며 시장 면담을 요구했다. 할머니의 당당함에 오사카 시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 비겁함으로 답한다.

피해자가 증인으로 버젓이 살아있는데 가해자인 일본은 범죄를 부인하고 있다. 한 겨울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도 무릎 담요를 덮은 채 휠체어에 앉은 길원옥 할머니와 나란히 수요집회 자리를 지키며 일본의 각성을 요구하던 김복동 할머니는 미국, 독일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평화의 소녀상 옆 김복동 할머니

평화의 소녀상 옆 김복동 할머니 ⓒ (주)엣나인필름

 
김복동 할머니에게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전쟁 범죄의 숨길 수 없는 증거다. '평화이 소녀상'은 끔찍한 전쟁 범죄의 증거물인 동시에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귀중한 지표인 셈이다.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대사관 앞 집회시 자주 발언을 했다. 할머니의 발언은 듣는 이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 '사이다' 발언이면서 양식 있는 이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경종이 되곤 했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했던 인간의 꿈과 삶, 그 삶을 끝끼지 놓지 않은 김복동 할머니는 인권의 사각지대, 전쟁의 피해자로 음지에서 고통을 받는 여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빛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김복동 인권운동가 평화의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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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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