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와 '고향의 봄', 그리고 '가고파'까지. 아이와 어른 모두 무심코 흥얼거리는 이 노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친일 음악가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친일 작곡가, 그 실체'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친일 음악가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편집자말]
☞ 이전 기사 : 덜 알려진 '친일파' 김성태가 은근히 더 위험하다 http://omn.kr/1ka43

2003년 2월 25일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었다. 국회에서 열린 이 행사 때 불려진 노래가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희망의 나라로>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 경계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로 시작하는 노래다. 친일 음악인인 현제명이 1932년 2월 <현제명 작곡집> 제1집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그가 작사·작곡을 다 했다. 그는 작사·작곡뿐 아니라 독창도 많이 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음악인이었다.
 
대통령 취임식 참석자들 중에는 <희망의 나라로>를 듣고 당황해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도 친일 음악이 취임식장에서 불려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일 '유령'이 우리 사회를 깊숙이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희망의 나라로>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2010년 9월 17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립 70주년 친일&항일 시민음악회'에서도 지적됐다. 이 음악회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등 22개 시민·사회단체가 주최하고 평화재향군인회가 주관했다. 현장 상황을 보도한 그해 9월 18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광복군 창설 기념일에 친일 노래 불린 까닭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특히 광복절이나 3·1절 기념식장에서 단골로 연주되는 '희망의 나라로'(현제명 곡), '선구자'(조두남 곡)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한 대표적 친일 노래였다는 사실도 소개되었다. '희망의 나라로'는 일제가 주창했던 대동아공영권을 염원하는 노래였으며, '선구자'도 일본의 만주국 건설을 위해 나선 사람들을 찬양했던 노래가 해방 후 가사만 바꿔 불렸다는 지적이다."
 
현제명은 한국 서양음악의 선각자이자 개척자로 칭송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그의 손이 안 거친 음악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야말로 만능 음악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음악 교육 분야에서도 선구자이자 개척자로 통한다. 김형주 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장의 글 '현제명, 한국 음악의 선각자이자 개척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석 현제명은 해방 직후 본격적인 음악전문 교육기관인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이 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어 교육사업을 펼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원으로 이관시키는 행정적 수완을 발휘하는 등, 무엇이든 처음 시작하는 개척자적 재질을 발휘하여 우리나라 음악교육에서부터 모든 분야에 걸쳐 어려운 사회적 여건을 초인적 능력으로 극복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초창기 기반을 닦은 선각자이자 선구자였다." - 일조각이 2008년 발행한 <한국사 시민강좌> 제43집.
 
1937년 귀국 직후 친일 활동에 발을 내민 현제명
 
 젊은 시절의 현제명.

젊은 시절의 현제명.ⓒ 민족문제연구소

 
현제명은 일제 강점 7년 전인 1903년 1월 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했다. 대구 계성학교와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전주 신흥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미국 시카고 건(Gunn)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 뒤 연희전문학교 음악 전임강사로 일하던 중 시카고음악연구원으로 유학해서 음악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37년 2월 귀국했다. 이때 나이는 34세였다.
 
귀국을 전후한 시점의 현제명은 민족주의 활동과도 관련을 갖고 있었다. 흥사단 자매단체로써 실력 양성을 통한 점진적 독립을 추구한 수양동우회란 곳이 있었다. 소설가 이광수가 주도하고 교육자·목사·변호사·의사 같은 전문가들이 참여한 모임이다. 현제명은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귀국한 뒤 얼마 후 그는 친일 활동에 발을 내밀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엮은 <친일파 99인> 제3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1937년 5월에 그는 홍난파·김영환·박경호·윤성덕·이종태 그리고 전통음악 분야의 함화진과 함께 새롭게 결성된 조선문예회의 회원으로 가입되는데, 이로부터 그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문예회는 한국 음악을 전시체제에 맞추고자 조선총독부가 외곽 기구로 출범시킨 단체다. 이 단체와 함께 현제명의 친일 활동이 본격화된다.
 
그런데 다음달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그가 검거된다. 일제가 한국 지식인들을 길들일 목적으로 일으킨 공안 사건이다. 홍난파 같은 인물도 이 사건으로 체포돼 고문을 당한 뒤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조선문예회 가입으로 친일파의 길에 들어선 현제명도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한다.
 
1938년 6월 발표한 전향 성명서에서 그는 "조선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新)동아 건설에 매진함에 있다"고 선언했다. 일본과 조선을 하나로 묶는 길에 참여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자신의 전향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현제명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회봉사 같은 활동을 벌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같은 해 7월 사상보국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전(全)조선 전향자연맹으로 결성된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의 회원으로 용산 육군기지에서 청소와 봉사 작업을 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용산 청군기지'였던 곳에서, 청나라군이 쫓겨난 뒤에는 '용산 일군기지'가 된 그곳에서, 그는 외세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표시로 청소도 하고 봉사도 했다. 그런 식으로 충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뒤 현제명은 다양한 음악 활동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뒷받침했다. 무엇보다 친일 음악을 만들거나 발표하는 일에서 두각을 보였다.
 
일례로, 1941년 6월에는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작곡해 발표하고, 7월에는 친일단체 일진회를 찬양하는 연극 <북진대>의 음악 효과를 담당하고, 1943년 8월에는 징병제를 위한 '야외음악과 영화의 밤'에 출연해 <대일본의 노래> 등을 독창하고 <반도청년의 노래>와 <우리들은 부르심을 받자왔다>를 제창했다.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노래 운동에도 참여했다. 경기도 이천읍 가창 지도대와 목포 가창 지도대에서 활동했다. 친일 음악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음악 분야의 '정신대'라 할 수 있는 경성후생실내악단에서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총독부 학무국장이 회장이고 사무소도 총독부 내에 있는 조선음악협회에서는 이사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도 승승장구한 현제명

한국인의 영혼과 정신을 일제에 바치기 위한 활동만 한 게 아니다. 한국인들의 물질을 바치는 활동에도 동참했다. 1937년 9월, 국방헌금 모금을 위한 음악보국대연주회에 출연해 <전쟁터로>란 노래를 독창했다.
 
1944년 4월, 군함헌납 음악보국 대연주회의 수익금 1113원을 군함 건조기금으로 헌납했다. 일제 패망 3개월 전인 1945년 8월에는 조선예술상 음악상과 함께 받은 상금 500원을 일본 해군에 헌납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 희망의 나라로"란 가사처럼 일본 해군을 위해 성의 표시를 많이 했던 것이다.
 
이뿐 아니다. 친일 예술인이 아닌 사람들을 골라내는 심사 활동에도 가담했다. 이른바 예술계 블랙리스트 추출 작업에 힘을 보탠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1944년 4월, 조선연극문화협회 회원자격심사회에 이면상·조택원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회는 전시하(下) 민중계몽의 도구로서 문화적 무기를 내세워 연극문화협회원 가운데 전문지식과 '황민 상식'이 모자란 부적격자를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문 지식뿐 아니라 황민 상식이 함량 미달인 예술인을 추리는 작업까지 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철저하고 다양하게 친일을 자행했던 현제명은 1945년 8월 15일 그날을 아무런 반성 없이 보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도 계속 그랬다. 해방 다음달에는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해 이사장이 되는 등 활동을 왕성하게 이어갔다. 그해 8월 15일이 그의 정신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 모양이다.
 
해방 정국 하에서 그는 정치 활동에도 가담했다. 그달 16일 창당된 한국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한국민주당은 그해 9월 8일 이 땅에 군정을 선포한 미군의 상륙에 발맞춰, 정치적 주도권 탈환을 목적으로 결성된 보수세력의 정당이다. 현제명은 그 보수세력과 함께 미국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현제명은 승승장구했다. 1946년 8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부장이 되고 1952년에는 학장이 됐다. 1949년 1월에는 문교부 예술위원회 음악분과위원이 되고, 1954년에는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고 제1회 예술원상도 받았다. 1960년 10월 16일 죽은 그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5년에 대통령 박정희로부터 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그는 그렇게 가고 없지만, 그의 흔적은 그렇지 않다. <희망의 나라로> 같은 친일 유산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작곡한 학교 교가들도 여전히 우리 옆에 남아 있다.
 
 현제명이 작곡한 서울대학교 교가 악보.

현제명이 작곡한 서울대학교 교가 악보.ⓒ 서울대 기록관

  
일부 국립대학들의 교가도 그의 유작이다. "가슴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 이 세상의 사는 진리 찾는 이 길을/ 씩씩하게 나아가는 젊은 오누들/ 이 겨레와 이 나라의 크나큰 보람"으로 시작하는 서울대학교 교가의 작곡자가 바로 그다. 전남대·전북대·경북대 교가도 그가 작곡했다. 이 외에도 그의 작품을 쓰는 학교들이 여럿 있다.
 
대한민국은 친일이 청산되지 않은 나라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의 음악이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울려퍼질 수 있고, 국립대학교들의 교정에서도 울려퍼질 수 있었다. 한국을 발 아래에 두고자 하는 아베 신조가 자신감을 갖도록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댓글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