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에 대해 해명하는 KBS <뉴스9> 김태욱 앵커.

볼펜에 대해 클로징멘트하고 있는 KBS <뉴스9> 김태욱 앵커.ⓒ KBS

  
"방송 중에 제가 들고 있는 이 볼펜이 일제가 아니냐는 시청자의 항의 전화가 왔습니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볼펜은 국산입니다. 9시 뉴스 마치겠습니다."
 

지난 4일 방송된 KBS <뉴스9> 김태웅 앵커의 클로징 멘트였다. 9시 뉴스가 방송 중이던 4일 오후 9시 20분께, KBS 보도본부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 내용은 이랬다. '남성 앵커가 (일본 브랜드인) 제트스트림 볼펜을 손에 들고 있는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즘 시국에 조심해줬으면 한다'는 것. 9시 뉴스 제작진은 김태욱 앵커의 브랜드를 확인했고, 김 앵커는 이 에피소드를 클로징 멘트를 통해 전달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조치로 촉발된 일본 불매 운동의 여파가 공영방송 메인 뉴스 클로징 멘트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장기화 되고 있는 일본 불매운동에서 대중문화 영역도 예외가 아님을 나타내는 조짐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직접 영향권, 여행 예능... 촬영지 후보에서 일본 배제 분위기
 
 tvN <짠내투어>의 한 장면.

tvN <짠내투어>의 한 장면.ⓒ CJ E&M


우선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여행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여행 예능이 대세 장르로 자리 잡으면서 <배틀트립> <짠내투어> 등 여행 정보 예능 프로그램부터 <미운 우리 새끼> <집사부일체>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이 일본 여행지를 소개해왔다. 이들 방송은 가라쓰, 하카타, 산노미야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소도시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여행객 증가를 이끌었다. 하지만 불매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여행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은 일본을 촬영지 후보에서 배제하고 있다.
 
지난 6월 방송된 SBS <집사부일체> 논란의 영향도 컸다. <집사부일체>는 이서진과 함께 일본 아오모리현을 찾았는데, 이 지역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유출 우려 등으로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시행한 지역 중 하나. 당시는 일본 불매 운동이 촉발되기 전이었지만, 일본이 한국의 '후쿠시마 인근 8개 현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에 반발해 제소한 WTO 소송에서 한국이 이긴 후였다. 
 
 일본 아오모리현을 소개했다 대중의 뭇매를 맞은 SBS <집사부일체> 이서진 편.

일본 아오모리현을 소개했다 대중의 뭇매를 맞은 SBS <집사부일체> 이서진 편.ⓒ SBS

 
당시 네티즌들은 "정부가 국민들의 먹거리 안전과 건강을 위해 긴 싸움 끝에 승소했는데, 방송사가 해당 지역의 낚시, 수산물 먹거리 등을 홍보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난했다. 결국 SBS는 "불편함을 느낀 시청자들에게 양해의 말씀 드린다", "지역 선정 혹은 이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더욱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어떤 이유건 불쾌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있다는 건 제작진의 불찰이다. 앞으로 더욱 각성하고 주의해 제작에 임하겠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집사부일체> 논란 이후 일본 불매 운동까지 본격화되면서 방송가는 일제히 '일본 거리 두기'에 나섰다. 우선 지난 7월 6일 방송된 tvN <놀라운 토요일-도레미마켓>은 미션곡인 현영의 '연애혁명' 원곡인 모닝구 무스메의 '러브 레볼루션' 자료 화면을 사용하며, 화면 하단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해 자료 화면을 사용했습니다'라는 안내 문구를 삽입했다.
 
 방송 화면에는 '바질라면'이라는 자막이 등장했지만, 화면 중간 출연자들의 뒤로 비친 VCR 화면에는 ‘바질라멘’ 이라는 자막이 쓰여 있다.

방송 화면에는 '바질라면'이라는 자막이 등장했지만, 화면 중간 출연자들의 뒤로 비친 VCR 화면에는 ‘바질라멘’ 이라는 자막이 쓰여 있다.ⓒ CJ E&M


또 지난 7월 27일 방송된 편에서는 서울 남성사계시장 음식을 소개하며 '바질라멘', '스테이크동', '규카츠' 등으로 되어 있던 음식 이름을 '바질라면', '스테이크덮밥', '비프커틀릿' 등으로 변경했다. 방송화면에는 변경 후 자막이 등장했지만, 화면 중간 출연자들의 뒤로 비친 VCR 화면에는 '바질라멘' 이라는 자막이 쓰여 있다. 방송을 앞두고 급히 편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음식 프로그램도... EBS <최고의 요리비결>에 쏟아진 항의글

EBS는 지난달 27일 <세계의 명화> 프로그램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편성했다가 세르지오 레노에 감독의 <석양의 건맨>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지난 5일, EBS 간판 프로그램인 <최고의 요리비결>에서 '소소한 일본 가정식'을 주제로 방송을 내보냈다가 대중의 뭇매를 맞고 있다.
 
SNS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EBS에 대한 항의성 게시글과 댓글이 쏟아졌고, <최고의 요리비결> 시청자 게시판에도 '이 시국에 일본 가정식을 소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시청자 글이 하루 만에 35건 게재됐다. 숫자만 놓고 봤을 때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7월 한 달 동안 해당 프로그램 게시판에 올라온 시청자 의견이 10개 안팎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결국 <최고의 요리비결> 측은 주제를 '더위를 이길 수 있는 여름 한식'으로 변경했지만, 네티즌들은 '이런 시국에 이런 아이템을 기획한 제작진이 문제다', '셰프가 그대로인데 타이틀만 바꾸면 일식이 한식 되느냐'며 비난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일본 원작 콘텐츠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방송 중인 일본 콘텐츠 원작 드라마는 SBS <의사 요한>, 채널A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 등이다. 오래전 제작과 편성이 확정된 작품이지만, 네티즌들은 일본 콘텐츠 리메이크 드라마에도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에 <의사 요한> 조수원 PD는 지난 5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지운 작가와 2014년 초에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김 작가가 존엄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그때 판권을 구매했다"라며 "원작료가 전체 제작비의 0.8%밖에 안 된다, 소설 두 권 속 작은 모티브에서 시작한 작은 드라마"라는 말로 원작과 거리를 뒀다.
 
현재 리메이크 제작이 결정된 일본 원작 콘텐츠도 여럿이지만, 아직 본격 제작에 돌입하기 전인 작품들은 대부분 제작을 보류하고 있다. 한일 갈등이 단시간 내에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대중 정서를 고려하지 않는 콘텐츠 제작을 밀어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과하다" vs "당연하다"... 당분간 이어질듯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 포스터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 포스터ⓒ CJ 엔터테인먼트

 
극장가도 마찬가지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달 탐사기>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고, 매년 여름 방학 시즌에 개봉해 안정적 관객을 모으던 극장판 <명탐정 코난> 시리즈도 이전 시리즈 대비 절반 수준인 21만 5천 관객을 기록 중이다. 개봉 14일 차 성적이기는 하지만, 현재 관객 상승세를 고려할 때 2016년 <명탐정 코난: 순흑의 악몽>(약 52만 명), 2017년과 2018년에 개봉한 <명탐정 코난: 진홍의 연가>(약 45만 명), <명탐정 코난: 제로의 집행인>(약 42만 명)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영화 채널인 OCN, 채널CGV 등도 당분간 일본 영화 편성을 자제하기로 했다.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일본 여행 사진을 SNS에 올린 이시언, 소진, 김규종이 네티즌 비난에 게시물을 즉각 삭제했고, 일본어가 포함된 SNS 아이디를 쓰던 효연(watasiwahyo)과 김소영 전 아나운서(mochi_1022)는 아이디를 변경했다. 유튜버 이사배는 일본 화장품을 소개했다가 비난을 받고 영상을 내리기도 했다. 일각에선 일본 국적의 아이돌 멤버의 퇴출 목소리까지 나온다.
 
일부에서는 '불매 운동 참여는 개인의 선택인데 현재 분위기는 과한 부분이 있다',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과 민간의 문화 교류는 별개'라는 의견도 있지만, '대중 영향력이 큰 TV 프로그램과 연예인들이 일본 홍보에 앞장서 왔던 지금까지의 분위기가 더 문제였다', '반일 감정은 현재 대중의 정서다. 대중연예인과 미디어가 당연히 이를 고려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 더 우세하다. 
 
현재 분위기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TV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통상 방송 2~3주 전 녹화가 진행되는데, 불매 운동 열기가 본격화되기 전 녹화된 방송분을 대부분 내보낸 상태다. 앞으로는 기획, 섭외 단계부터 일본 거리 두기가 시작되는 만큼, 당분간 미디어에서 일본 관련 아이템을 찾아보기 더 힘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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