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전장> 포스터

영화 <주전장> 포스터 ⓒ (주)시네마달

 
"백 권의 교과서와 천 편의 기사가 못한 일을 한 편의 영화가 해냈다!"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을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권하며 건넨 말이다. 오로지 인터뷰만으로 두 시간짜리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양측의 시각을 한시의 대구(對句)처럼 배치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 구성력이 더욱 놀랍다. 그래선지, 영화를 관람한다기보다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이 든다.

30대의 젊은 유튜버, 미키 데자키 감독. 일본계 미국인인 그였기에 인터뷰가 가능했고, 한데 묶어낼 수 있었으며, 한일 두 나라의 영화관에 내걸릴 수 있었다. 그 스스로도 위안부 문제로 인한 양국의 갈등에 항상 제3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랬기에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고 밝혔다.

형식은 인터뷰지만, 그는 카메라를 통해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토론을 이끌어냈다. 오고 간 수많은 말들을 한 편의 영화로 묶어냈으니 우리가 감독으로 호칭할 뿐, 실상 토론 마당의 사회자에 가깝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일본 극우 인사들의 주장이 부조리하고 이치에 맞지 않다는 걸 꼬집고, 특히 일본 관객들의 각성을 요구하며 개입을 시도한다.

토론의 사회자로서, 그는 위안부에 대해 막 관심을 갖게 된 '초보자'라는 점도 부각된다. 이를 통해 은연중에 '객관성'이 확보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전 아사히 신문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도한 이후, 일본 내 극우 세력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접한 뒤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 잘 모르는 대다수 일본 젊은이들
 
'주전장' 미키 데자키, 일본 뒤흔든 다큐 감독! 미키 데자키 감독이 15일 오전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 시사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주전장>은 우익들의 협박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뛰어든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 감독이 한미일 3개국을 넘나들며 3년에 걸친 추적 끝에 만든 새로운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다. 25일 개봉.

미키 데자키 감독(오른쪽) ⓒ 이정민


그는 영화를 통해 양측의 주장을 들을 수 있다면, 한일 양국 국민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맹목적인 증오를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성싶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 감독 자신의 안전이 염려될 정도로 분위기는 되레 험악해졌다. 영화 개봉 후 인터뷰에 응한 극우 인사들이 그를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들은 감독을 겁박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영화를 '믿지도 보지도 말라'며 선동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자신의 발언을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마뜩찮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도 속속 등장하지만,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 대다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무관심하다.

미키 데자키 감독은 과거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당시 그들 중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고 경험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영화를 본 뒤 그들은 하나같이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단다. 아닌 게 아니라, 현행 일본의 초중고등학교 역사(사회) 교과서에는 위안부 관련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영화는 교육이 부재한 현실을 숙주 삼아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막무가내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망언들을 대체 누가 믿을까 싶지만, 국회의원과 교수, 언론인, 방송인 등의 명함이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영화는 그들이 내뱉는 증오와 저주의 악다구니 앞에 상식과 논리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걸 증명한다.

아베 못지않은 스기다 미오의 '노예론'

동아시아 지역에 20만 명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주장에 '정확히' 20만 명이라는 근거를 대라고 맞서는가 하면, 위안부는 어느 전쟁이든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추산한 숫자를 빌미로 꼬투리를 잡는, 전형적인 '물 타기' 수법이다. 베트남 전쟁 때도, 6.25 전쟁 때도 있었고, 그로 인해 국가가 사죄한 경우는 없다며 '자상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중국이 배후라는 주장은 또 어떤가. 한미일 세 나라의 동맹에 균열을 내기 위해, 중국이 위안부 문제에 느닷없이 끼어들어 한국 편을 들고 있다는 논리다. 중국 역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중일전쟁과 난징 대학살의 피해 당사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깡그리 무시된다.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표현까지 문제 삼는 아베 현 총리의 모습은 외려 측은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는 '밧줄로 묶어 끌고 간' 게 아니라면 강요라고 말할 수 없다고, 그것도 다른 국회의원들 앞에서 호기롭게 말했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면 모두 강요에 해당한다는 사전적 의미는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정의일 뿐이다.

같은 당 여성 의원 스기다 미오의 '노예론'도 그의 주군인 아베 못지않다. 위안부를 성노예로 의미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 노예로 부를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반론을 편다. 그는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기술력으로 따라잡기가 불가능하니까 프로파간다 수법을 쓰는 것'이라고 폄하했던 장본인이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갈등의 원인
 
 영화 <주전장> 스틸 컷

영화 <주전장> 스틸 컷 ⓒ (주)시네마달


미키 데자키 감독은 모국인 미국에도 죽비를 내리친다. 위안부 문제가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기는커녕 갈등이 커져가는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작지 않다는 것이다. 한일 양국 간에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1965년 서둘러 수교를 맺은 것도,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 졸속 체결된 '12.18 합의' 역시 그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주장이다.

영화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갈등의 원인을 정확히 꿰뚫고 있으며, 관객에게 분명하게 각인시켜준다. 교과서처럼 두루뭉술하지 않고, 신문이나 방송의 기사처럼 에둘러 가지도 않는다. 동일한 질문을 던져 양측의 주장을 관객이 스스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답변을 있는 그대로 들려준다.

처음은 팽팽한 듯싶다가 중간을 지나면 승부의 추는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럼에도 감독은 양측의 주장을 끝까지 새겨듣겠다는 듯, 인터뷰에 동일한 시간을 할애한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면 할수록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은 일관성을 잃고 중언부언하다 한없이 추레해진다. 참다못한 감독은 말미에 승패를 선언하듯, 극우 세력의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일본 국민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일본은 진정 전쟁을 원하는가?"

극우 세력과의 토론,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전체 관람가'라지만, 자막이 워낙 빨리 지나가고 호흡이 짧다보니 어린 관객이라면 내용을 따라가기가 조금은 버거울 것 같다. 또 극우 세력의 주장들을 논박하는 모범 답안처럼 여겨져 통쾌하다가도, 이내 저들과는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돼 짐짓 허망하기도 하다. 상대의 주장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토론은 애초 성립할 수 없는 법이니까.

영화관을 나오며 어깨에 묵직한 짐을 얹은 느낌이다. 전쟁 범죄에 눈 감고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의 극우 세력과는 토론을 벌이고 설득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특별하고 일본이라는 국가는 완전무결하다'는 그릇된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박힌 이들과의 대화는 광신도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역사적 화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적어도 일본에서 아베를 비롯한 극우 세력이 집권하는 한 그럴 것이다. 일본의 부당한 경제 보복에 맞서 우리 정부가 WTO에 제소하고 국민들이 자발적인 불매 운동을 벌이는 지금의 형국은 흡사 '치킨 게임'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해결의 열쇠는 먼저 싸움을 시작한 저들이 쥐고 있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지 세력을 결집할 의도였든, 헌법 개정을 통해 '보통 국가'로 가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든, 한국의 기술력 성장을 저지하기 위한 방해 공작이었든, 그 무엇이었든 간에 결자해지의 몫은 그들에게 있다. 우리에겐 항의하는 것 외에는 딱히 손쓸 수 있는 게 마땅찮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 세력이 진짜 두려워 하는 존재
 
 영화 <주전장> 스틸 컷

영화 <주전장> 스틸 컷 ⓒ (주)시네마달


당장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서조차 '한국이 적이냐'며 경제 보복을 철회하라는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며 한국과 일본 국민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일을 그만두라는 요구다. 그런가 하면,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 군국주의와 천황주의를 신봉하고 국가주의에 경도된 극우 세력에 맞선 일본 내 양심 세력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극우 세력의 어쭙잖은 주장을 논박하고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그들이야말로 희망의 근거다. 어쩌면 들불처럼 타오르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바통을 넘겨야할 다음 순서가 바로 국경을 넘어 그들과 연대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일본 여행 금지 청원까지 올라오면서 한일 양국 학생들과 시민단체 간 정기 교류마저 잠정 중단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외의존 경제구조를 벗어나는 등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자칫 상호 이해를 위한 역사교육과 연대의 끈조차 끊어지지 않을지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일본의 극우 세력이 두려워하는 건 일본의 '깨어있는' 국민이다.

요컨대, 위안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영화 <주전장>이 제시하는 유일한 대안은 바로 이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부끼는 날선 외침이 아니라 나비의 부드러운 날갯짓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애먼 국가와 민족을 앞세울 게 아니라 엄연히 인권의 문제이며, 역사교육과 연대를 통해 이를 수 있다는 걸 넌지시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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