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영훈(송새벽 분)의 아내 유정(한수연 분)이 자신의 집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영훈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준성(오민석 분)이 유정과 불륜을 저지른 사이로 밝혀지며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유정의 입에서 발견된 준성의 머리카락 등 증거를 근거로 하여 준성을 유죄로 판결한다.

아내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영훈 앞에 준성의 아내 다연(유선 분)이 찾아온다. 2심 재판에서 남편이 무죄임을 증언해달라는 다연에게 영훈은 수사 기록과 현장 사진을 토대로 내린 판단을 들려주며 함께 진범을 찾길 제안한다. 하지만, 다연은 영훈의 집에서 사라진 증거물을 발견하고, 영훈은 사건 현장을 배회하던 상민(장혁진 분)에게서 다연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들으며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영화 <진범>은 살인사건을 둘러싼 네 사람의 상반된 주장을 들려주고 그 속에 감춰진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가장 절친한 친구가 아내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된다. 증거는 확실하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남편의 결백을 주장한다.

친구가 범인이 아니라면 살인사건이 벌어진 날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의자의 아내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과 의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진범>은 한 편의 시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진범>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고정욱 감독은 우연히 함석헌 시인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읽은 후 시인이 건네는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란 질문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문득 '나는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긴 한 걸까?'란 생각이 스쳤다고 한다.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삼아 피해자의 가족과 용의자의 가족이 다른 목적을 갖고 의심을 한 채로 협력하는 설정, 피해자가 가해자일 수 있고 가해자가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로 전복되는 과정을 담은 <진범>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과 거짓, 믿음과 의심을 재료로 살인사건이 벌어진 날의 진실을 퍼즐처럼 맞춰가는 <진범>엔 몇 가지 특징이 도드라진다. 먼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극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 펼쳐지는 전개를 취하지 않는다. 사건 발생 후 6개월 후, 사건 발생 1개월 전, 사건 발생 2주 후, 사건이 벌어진 날 등 시간대를 쉴 새 없이 이동한다.

사진, 휴대폰, CCTV 등 단서나 인물의 말이 제시될 때마다 영화는 다른 시선의 과거로 향한다. 각자의 속내가 드러나고 그날 밤의 진실은 재구성된다. 고정욱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누가'보다는 '왜'를 보여주고자 한 의도에서 출발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연극적인 구성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영화의 상당 분량은 살인사건이 벌어진 영훈의 집에서 진행된다. 한정된 공간에서 대부분 이야기가 그려지기 때문에 마치 한 편의 연극을 감상하는 기분도 든다. 주연을 맡은 송새벽 배우는 '뉴스토마토'와 인터뷰에서 "감독님에게 연극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고 말씀드렸다. 보시는 분들 입장에선 긴장감이 많이 유지되는 포인트로 작용도 되지만, 배우들 입장에선 그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많이 힘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진범>은 사실적인 묘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시나리오 초고 단계부터 전직 검사 출신의 변호사에게 조언을 받아 현실감을 높였다. 영화 속에서 사실적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장면으론 영훈이 사건 현장을 청소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진 후 대부분의 경우는 유가족이 직접 사건 현장을 치우게 된다는 사실을 접한 고정욱 감독은 이를 영훈에게 녹여 남겨진 유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생생히 전달한다.
 
고정욱 감독은 단편 영화 <독개구리>(2011)에서 195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상황을 긴장감 넘치게 다루며 제11회 미장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1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단편 부문 관객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장편 데뷔작 <진범>의 연출 의도를 "누가 진범인지 밝혀내는 수수께끼보다 믿음이 흔들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냈다."고 설명한다.

<진범>은 영훈, 준성, 다연, 상민이 벌이는 진실 게임이 아주 볼 만하다. 인물 간에 믿음과 불신이 만드는 긴장감도 상당히 좋다. 추리극의 완성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한정된 공간을 활용한 연출, 배우들의 열연 등 한국 스릴러 장르의 웰메이드 작품으로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조만간 외국에서 리메이크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 초이스 장편 부문 관객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