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두둥

  
24일 개봉을 앞둔 조철현 감독의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지식을 한층 풍부하게 해주는 영화다. 배우 송강호·박해일·전미선이 주연인 이 작품은, 신미스님(박해일 분)으로 대표되는 불교 승려들이 한글 창제에 결정적 '어시스트'를 제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격무에 지쳐 잠든 집현전 학사들의 이불을 덮어주며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를 성사시켰다는 것이 그간의 상식이었다. 세종이 유학자들과 힘을 합쳐 한글을 만들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이미지다.
 
이런 이미지에는 결정적 모순이 있다. 한자를 무기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한자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좋아할 리 없었던 유학자들의 조력에만 의존해 세종이 한글 창제를 시도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종이 너무 아둔한 임금이 돼버린다.
 
한두 명도 아니고 집단을 이룰 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한자를 대체할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데 조력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한자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체제에서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가깝기 마련이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자 하는 군주라면, 그런 세력으로부터 인력을 충원하는 데 관심을 갖기 쉽다. 한자가 주 특기인 집현전 학사들만을 중심으로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그런 이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미스님

한글 창제의 원동력과 관련해 '집현전 중심설'에 수정을 가하는 것 중 하나가 <나랏말싸미>에서 제시한 '불교계 협력설'이다. 영화 주인공 중 하나인 신미스님(대사)(1403~1480?)이 바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충청도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오얏골 출신인 신미스님은 영화 속에서는 역적의 아들로 설정돼 있다. 일반적인 역적 아들과 달리 영화 속의 그는 임금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외심을 표하지도 않고, 무릎도 꿇지 않는다.
 
또 주상 전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는 그냥 '주상'이라고 부른다. 세종 및 신미대사와 자리를 함께한 영화 속의 세자 이향(훗날의 문종)이 좀 민망해 할 만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게 다 아버지로부터 반골 기질을 물려받은 결과라는 게 영화의 설정이다.
 
 신미스님(박해일 분).

신미스님(박해일 분).ⓒ 두둥

  
하지만 신미스님은 실제로는 역적의 아들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세종시대에 공직자로 승승장구하고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인 신미 스님이 역적의 아들이었다면, 동생인 김수온도 역적의 아들이어야 한다. 그랬다면 김수온은 평생 숨죽이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김수온은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도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왔으며 한성부윤(서울시장)과 공조판서 등도 역임했다. 재직 중에 과거시험에 또 한번 합격해 만년 수험생들의 눈물을 짜낸 바도 있다. 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험에서도 두 차례나 장원을 차지했다. 역적의 아들이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다.
 
신미스님의 학식에 큰 감명을 받은 세종

하지만, 신미스님의 아버지인 김훈한테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출가 이전의 신미 스님이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민족 21> 2012년 1월호에 실린 황찬익 전 봉은사 종무실장의 기고문 '한글 창제의 또 다른 주역, 신미대사의 흔적을 찾다'에 이런 사연이 소개돼 있다.
 
"부친인 김훈이 수원의 관기인 벽단단에게 흠뻑 빠져서 모친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당시 사회에서 지탄을 받다가 노비로 전락하니, 그 충격에 큰아들이었던 신미대사가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음력으로 태종 16년 1월 30일자(양력 1416년 2월 2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모친이 아니라 할머니의 장례였다. 이 일로 인해 김훈은 옥구진병마사에서 해임돼고 귀양을 갔다가 관노로 전락했다.
 
중요한 것은 김훈이 역모죄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물론 불효도 역모에 버금가는 중대 범죄였다. 하지만, 아들 김수온이 승승장구한 것을 보면 이 가문이 대역죄인의 집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비행 때문에 출가한 신미스님은 경전 공부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위 기고문은 "출가 후 신미대사는 한자로 쓰여진 경전을 읽다가 잘못 번역된 점을 발견하고 직접 범어(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까지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라면서 "영동 김씨 족보에는 이런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대궐에서 2년여 근무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말한다.
 
신미스님이 궁궐로 들어간 경위와 관련해 <나랏말싸미>는 소헌왕후 심씨(전미선 분)가 남편의 한글 창제를 돕고자 이름 모를 노스님(오현경 분)에게 인재 추천을 부탁했고 그 결과로 신미스님이 궁에 들어가 세종을 돕게 됐노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의 논문 '한글 -어떻게 제정되었나?- II'에 따르면, 신미스님을 세종에게 추천한 인물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다. 대장경과 언어에 능한 승려가 속리산 복천사에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세종이 둘째아들 수양대군을 보내 신미스님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동생 김수온의 문집 <식우집>에 실린 '복천사기(記)'에 따르면, 첫 만남에서 세종은 신미스님의 학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로써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한글 창제에 힘을 합하게 됐다는 것이다.
 
불교 승려들의 지식 동원되지 않고는 쉽지 않은 일
 
 스님들과 함께 작업 중인 세종(오른쪽 2번째, 송강호 분).

스님들과 함께 작업 중인 세종(오른쪽 2번째, 송강호 분).ⓒ 두둥

  
<나랏말싸미>에서는 세종보다 신미스님의 역할을 더 높게 평가했다. 의기투합 이후 세종은 과제만 던져주고 신미스님이 한글 창제를 사실상 떠맡은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위의 정광 논문은 "세종이 신미를 만났을 때는 이미 훈민정음의 제정이 상당히 진척되었을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세종이 "언문을 친제한 것은 세종 25년 12월이고 <운회>의 번역은 다음 해인 세종 26년 2월 26일이며, 최만리 등의 상소는 그보다 4일 후인 2월 20일이다"라면서 "속리산 복천암에 있던 신미대사를 세종이 불러 올려 만난 것은 그 이후의 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위 논문은 "훈민정음의 제정에서 신미대사의 공이 절대적이라는 재야 학자들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덧붙인다. 신미스님이 큰 공로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세종대왕의 역할을 뛰어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신미대사의 역할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나랏말싸미>는 <죽산 안씨 대동보>와도 충돌한다. 죽산 안씨는 세종의 차녀인 정의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한 집안이다. 이 족보에는 세종이 자녀들과 함께 새로운 문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왕자들이 풀지 못한 난제를 정의공주가 해결하는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다.
 
이는 세종뿐 아니라 왕실 전체가 한글 창제에 간여했음을 보여준다. 세종뿐 아니라 그 가족 전체가 언어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정광 논문은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제정에 관여했다는 가설은 분분했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그가 새 문자의 제정에 기여했는지는 밝히지 못했다"면서 신중을 촉구했다.
 
영화 내용이 다소 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미스님과 불교계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점은 한글이 초성·중성·종성으로 형성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불교 승려들의 지식이 동원되지 않고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미스님과 불교 승려들이 가담하면서부터 초성·중성·종성 구분법이 부각됐던 것이다. 정광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아래 인용문의 '원대'은 몽골제국 시대, '범자'는 산스크리트 문자다.
 
"훈민정음이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문자를 제정한 것에 대하여 그동안 한국의 언어학계가 침묵하였지만, 실제로 이것은 원대(元代)에 제정된 파스파 문자에서도 시도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자의 모델이 된 티베트의 서장(西藏) 문자로 소급될 수 있으며, 결국 인도의 범자(梵字)에서 나온 것이다."
 
한글이 위대한 문자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위대한 문자가 세종대왕의 천재성과 노력뿐 아니라 왕실 및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불교계 학승들의 공동 노력에 의해 생산됐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한두 명의 천재가 이룩할 만한 업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세종대왕과 일부 유학자들만의 공로로 돌려온 우리의 상식이 오히려 놀랄 만한 것이다.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이 세종대왕과 왕실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가 동참해 이룩한 민족적 합작품임을 일깨워줌으로써, 그간의 잘못된 상식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주는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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