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 소리와 함께 3주 동안의 촬영이 종료됐다. 웨스 크레이븐은 지시사항이 빼곡하게 적힌 각본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촬영은 훗날 <13일의 금요일>(1980)로 유명해진 숀 커닝햄의 집 뒷마당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약쟁이들이 두 소녀를 강간·살해하고 이를 알아챈 한 소녀의 부모가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촬영장은 화기애애했다. 모두가 얼른 제목을 정하자며 들떠있었다. 개봉전날의 시사회에서는 <복수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지만, 웨스 크레이븐과 숀 커닝햄은 이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영화홍보담당자가 참여한 가운데 3개의 수정된 제목으로 각각 개봉을 하고 반응을 보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걸 제목으로 정하기로 했다. 그것이 <왼편 마지막 집>(1972)이었다.
 
 영화 <왼편 마지막 집>(1972) 스틸 컷.

영화 <왼편 마지막 집>(1972) 스틸 컷.ⓒ 롭스터 엔터프라이즈

 
당시 웨스 크레이븐은 초짜 감독이었다. 대학교 시간제 강사로 일하던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진 건 뉴욕 클락슨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우연히 구매한 16mm 카메라 한 대를 구매하면서부터였다. 대학강사라는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했기 때문에 아내와 두 딸이 자신을 떠났지만 그는 자신감이 있었다. 낮에는 영화사에서 편집을, 밤에는 택시기사로 일하며 기회를 엿봤다. 어느 날 숀 커닝햄의 포르노 영화 <투게더>를 편집하다가 그의 실력을 알아본 숀 커닝햄이 다가와 물었다. "우리 영화 한 편 만들어보지 않을래?" 미국 호러영화의 한 획은 그렇게 그어졌다.
 
아무래도 널리 알려져 있는 영화가 아니니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왼편 마지막 집>은 두 여자가 록스타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시내로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둘은 어느 약쟁이에게서 마약을 구매하려 하고 그의 아파트로 따라간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두 여자는 약쟁이 일당들에게 감금당한다. 일당은 두 여자를 차 트렁크에 실어 납치한 뒤 숲에 데려가 강간한 뒤 살해한다. 그리고 밤을 보내기 위해 숲 속 어느 집에 투숙을 부탁하는데 세상에나, 그 집은 자신들이 살해한 소녀 중 한명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약쟁이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소녀의 아버지는 그날 밤 약쟁이들의 짐에서 발견된 딸의 장식품과 그들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직감한다. 저 놈들이 내 딸을 해쳤구나. 죽은 소녀의 부모는 약쟁이들을 향한 복수를 꾸민다.
 
사실 <왼편 마지막 집>은 복수과정에서 보이는 몇몇 사소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잉그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과 거의 다르지 않다. 베리만의 처녀가 가던 교회가 크레이븐의 버전에서 어느 록스타의 콘서트로 바뀌고, 복수하는 수단이 살짝 수정됐을 뿐이다. 하지만 <왼편 마지막 집>은 <처녀의 샘>과는 달리 진지함을 부정하고 관객의 고립을 타파시킨다는 점에서 미국 호러 착취 영화의 뛰어난 걸작으로 남았다. 이는 예의바르지만 불안해 보이는, 언제나 조용조용 말하던 전직 영문학 교수였던 웨스 크레이븐 스스로도 자신이 알지 못했던 내면의 어떤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천막 뒤에는 "5만 달러로 확실한 폭력영화를 만들라"고 압박했던 제작사가 있었지만.
 
국내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보다는 이후에 아류작으로 제작된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1978)가 더 익숙할 것이다. <왼편 마지막 집>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이전에 없었던 복수 방법, 즉 대사 한 마디와 한 번의 공격으로 가해자를 응징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가해자를 천천히 고문하며 죽이는 당시에는 혁신적인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흥행에 실패했던 것이 아니다. 영화 개봉 당시 관객들은 소녀의 부모가 약쟁이들을 고문하는 장면에서 극장의 커튼을 찢고 고함을 질러댔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너무 잔인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웨스 크레이븐은 비슷한 이야기의 더욱 세련된 버전인 두 번째 장편영화 <공포의 휴갓길>(1977)을 통해 흥행과 평가에서 모두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이었다.
 
 영화 <나이트메어>(1984) 스틸 사진.

영화 <나이트메어>(1984) 스틸 사진.ⓒ 뉴라인시네마

  
웨스 크레이븐을 설명하면서 이 영화를 언급하지 않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엘름가의 악몽, <나이트메어>(1984)말이다. 어느 날 그는 신문에 난 기사 한 줄을 읽고 경악했다. 킬링필드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온 캄보디아인들이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이거다!' 그는 소리쳤다. 웨스 크레이븐은 꿈과 악몽에 시달리다 죽는 사람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의 이름, 그리고 자신이 공중화장실에 목격한 전신화상을 입은 노숙자의 이미지를 떠올렸고 이를 합성했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살인을 저지르는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크루거는 그렇게 탄생했다.
 
숀 커닝햄의 <13일의 금요일>(1980)에 제이슨 부히스가 있고, 존 카펜터의 <할로윈>(1978)에 마이클 마이어스가 있으며, 토브 후퍼의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1974)에 레더페이스가 있다면, 웨스 크레이븐의 <나이트메어>에는 프레디 크루거가 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다. 동시에 호러영화 역사상 가장 많이 사랑받은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고, 압도적인 등장 대신 생존자들과 치고받으며 끝까지 쫒아오는 데에서 공포를 심어주는 건 프레디 크루거 뿐이다.
 
프레디 크루거는 스무 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유괴·살인해 동네 이웃들에 의해 보일러실에 처박혀 불태워져 죽었지만, 모종의 계약으로 인해 미성년자들의 꿈에 나타나 그들을 살해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어릴 적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자란 트라우마 탓이다. 꿈에서 프레디 크루거에게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게 된다는 설정이다. <나이트메어>로 웨스 크레이븐은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 평가받았다. 인기는 최고조였다.
 
하지만 웨스 크레이븐은 언제나 <나이트메어>에게서 도망치고자 했다. <나이트메어>의 제작사인 뉴라인 시네마가 <나이트메어>시리즈 5편으로 1억 7000만 달러를 벌어들였음에도 그는 초연했다. 얼른 이 망할 영화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후속작들 <공포의 휴갓길 2>(1985), <악령의 관>(1988), <영혼의 목걸이>(1989)등을 포함해 그의 필모그래피가 공포영화의 테두리를 거의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나이트메어>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은 운명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영화 <스크림>(1996) 스틸 컷.

영화 <스크림>(1996) 스틸 컷.ⓒ 스펙트럼

 
<뉴 나이트메어>(1994)로 드디어 자신이 창조한 것을 무덤에 보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크레이븐은 <스크림>(1996)을 제작하며 공포영화감독으로써의 자기성찰에 이르렀다. <뉴 나이트메어>를 제외하고 90년대에 영 주목받지 못했던 그에게 <스크림>은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이 영화가 공포장르의 관습을 모조리 바꿨다는 건, 텍스트보다는 영화를 직접 보는 것으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전 <나이트메어>시리즈 중 1편만 감독한 것과는 달리, <스크림> 3부작에는 전편을 제작하였고, 가장 최근 <스크림 4G>(2011)를 통해 자신의 감독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0세기 말 잠깐의 장르적 외도를 제외한다면, 그는 그 자체로 호러영화일 수밖에 없는 사내였다.
 
웨스 크레이븐은 4년 전 사망했다. 그는 조지 로메로처럼 기성 세대의 억압, 전쟁, 인종 갈등, 빈부 격차, 의사 소통 부재, 독재와 종교, 대중매체 중독 및 중산층의 몰락 등 현실적 문제를 영화에 담아 관심을 보인 감독이었다. 동시에 촌스럽지 않게 우리의 여름을 소름돋게 도와주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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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입니다. 주로 영화글을 쓰고, 가끔 기사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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