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라딘>은 문제 소지가 있던 원작의 장면을 꼼꼼히 손봤다.

영화 <알라딘>은 문제 소지가 있던 원작의 장면을 꼼꼼히 손봤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몇 주 전, 글쓰기 모임에 참석해서 영화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알라딘>이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던 차였다. 나도 다음날 예매를 해놓았던 터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무장해제된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아주 강력한 스포일러를 뿌렸다.

"자스민이 꼭 술탄이 됐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자스민이 술탄이 되는구나. 느닷없는 스포일러에 망연자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친여성적인 선생님이 왜 삐딱선을 타나 싶었다. 여성이 술탄이 되면 안 되나, 이제 동화도 시대에 맞게 변하는데. 선생님의 의견에 (속으로) 딴지를 걸면서도 스포일러의 망령에 씌우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많은 사람들이 엄지척을 날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썩 개운치가 않았다.
 
너무 멋지고 재밌는 영화이긴 하다. 윌 스미스가 램프의 요정 지니로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가 됐고, 지금 시대에 맞게 자스민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나온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애니메이션 <알라딘>은 알라딘이 주인공이었고, 끝날 무렵 왕이 되는 것도 알라딘이었다.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원래의 법을 바꾸는 것도 왕이었다. '결혼을 꼭 해야 할까?'하면서 결혼 제도에 메이지 않는 자유를 꿈꾸던 자스민은, 마지막에는 결국 알라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으로 퇴장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술탄이 되고 사랑도 얻는 자스민, 그러나
 
 영화 <알라딘>의 한 장면.

영화 <알라딘>의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에 비하면 영화 <알라딘>에서 자스민의 존재감은 알라딘을 넘어선다. 일단 술탄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공주다. 그리고 그 욕망을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다 자파로부터 조용히 너의 자리를 지키며 있으라는 경고를 먹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자스민의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당시 여성에게 금기된 욕망을 추구하고 드러내는 여성상의 변화는 "여자가 술탄이 되면 안 되나? 불합리함에 침묵하지 않을 거야!"라는 자스민의 솔로곡 (Speechless)을 통해서 절정을 이룬다.

안전한 관습의 감옥에 갇혀 지내기보다 자신의 유일무이한 삶을 살겠다고 결정하고 선언했다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결국 자스민은 자신이 술탄이 되어 법도 바꾸고 사랑도 얻는다. 깜짝 놀랄만한 변신이며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이 신나는 영화를 보고, 1%의 부족함과 1%의 찜찜함이 들다니! 생각해 보니, 초반부의 한 장면에서 '랙'이 걸려 버린 탓이었다.
 
자스민이 성에서 나와 백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배고파하는 아이를 보고 빵을 주는데, 알고 보니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로 준 인심이었다. 주인이 빵을 훔쳤다고 하자 훔친 것이 아니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 준 것이라고 한다. 거기까지만 해도 기가 막히는데,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주인에게 당당하게 돈이 없다며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인다. 기본적인 시장 거래 개념조차 없다니. 또 불쌍하다고 자기 것도 아닌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행위는 상당히 유아적인 동정이다. 자스민의 현실감각은 욕망의 크기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백성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본 것도 알라딘과 함께 마법의 양탄자를 탔을 때였다.
 
꼭 술탄이 되었어야 했나
 
 영화 <알라딘> 스틸컷

영화 <알라딘>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 정도의 순수한 상태는 애니메이션 속 자스민 공주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책을 통해 백성에게 좋은 왕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꿔왔다는 공주라면 말이 달라진다. 술탄이 된 자스민을 응원하면서도 마냥 박수를 보낼 수 없는 이유다. 이쯤에서 꼭 술탄이 되어야 했나, 라는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어떤 이유에서 그런 의문을 가졌는지 듣지 못했지만,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상징성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솔직히 말하면 회의적이다. 칭찬할 요소가 훨씬 더 많은 영화에 너무 정색을 하는 것 같아 이제 와 민망하다.

그렇다면 능력은 안 되면서 권력욕만 많아서 결국 감옥에 간 대통령 때문에, 보수 정당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원내대표 자리에 올라 스스로 '특별한'여성 리더로 부추기고 있는지, 퇴행적 정치관을 드러내며 남성들보다 더 남성적으로 보수의 언어보다 더 보수적으로 발언하며 반박 강박증을 보이고 있는 보수야당의 원내 대표(경향신문 "나경원만을 위한 '노란 벽돌길'은 없다" 기사 참고)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 탓이라고 해두자.

실력 있고 준비된 여성이 자스민처럼 안전한 관습적 틀에서 벗어나 욕망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첫 여성대통령, 보수 정당 첫 여성 원내대표, 첫 여성 OO 등등 여성이 특별하게 소비되고 표지화되는 말들이 소멸되는 세상을 꿈꿔본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도 아직 자연스러운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인 공주 자스민이 첫 술탄이 된 것에 열광하는 것이리라.

다음에 알라딘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그땐 알라딘 속편 <자스민>을 기대한다. 지금 영화에서 보여 주지 못한 술탄 자스민의 정치적 모습들을 보고 싶다. 즉 가난한 사람에게 그저 빵을 나눠주기보다 어떻게 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할 것인지, 차별과 빈부격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자스민. 양탄자 위가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땅 위에 우뚝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자스민을 기대한다. 더불어, 여성이라는 타이틀에 이용당하는 정치인을 넘어서 진짜 '실력 있는 여성 정치인'의 등장도 기다린다.
영화 알라딘 자스민 꼭 술탄이 되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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