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특급' 박찬호가 15승을 올리며 LA 다저스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로 자리잡고 '악의 제국' 뉴욕 양키스가 월드시리즈 3연패의 시작을 알렸던 1998년. 메이저리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마크 맥과이어와 시카고 컵스의 새미 소사가 벌인 세기의 홈런 대결로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두 선수는 백인과 흑인, 미국인과 도미니칸이라는 흥미로운 대결구도를 형성하며 각각 70홈런과 66홈런으로 로저 매리스의 61홈런 기록을 훌쩍 뛰어 넘었다.

하지만 2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세상을 뜨겁게 했던 두 사람의 이름은 뉴욕 주 쿠퍼스타운에 위치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서 찾을 수 없다. 두 선수 모두 현역 시절 약물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맥과이어와 소사 외에도 배리 본즈, 로저 클레멘스 등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던 선수들도 약물 사용 전력 때문에 은퇴 선수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KBO리그 역시 약물에 대한 검사가 한층 강화되고 있다지만 여전히 모든 선수들이 받는 전수조사가 아닌 무작위로 선수를 뽑아 조사를 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선수당 30~40만 원이 들어가는 비용은 물론 시간, 그리고 인력 부족이라는 제약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앞으로도 "걸린 사람이 재수 없다"고 하는 식의 도핑테스트가 이어진다면 약물에 의한 사고와 이에 따른 야구 팬들의 신뢰 하락은 이어질 것이다.

아이들의 건강과 미래 담보로 부당이득 챙겼던 전 KBO리그 야구선수
 
 이여상 선수 시절 사진

이여상 선수 시절 사진ⓒ 연합뉴스

 
현역 시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선수들은 은퇴 후에도 프로구단의 코치나 방송국의 해설위원 등으로 현장에서 야구 팬들을 만나며 활동을 이어간다. 하지만 팀에서 방출돼 타의에 의해 은퇴를 선택한 선수들은 아마추어 팀의 코치 자리를 맡지 않는 이상 제2의 인생을 꾸려가기 위한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한다. 이에 적지 않은 선수들이 자신이 평생 해왔던 전공(?)을 살리기 위해 유소년 선수들과 사회인 선수들을 가르치는 야구교실을 운영하게 된다. 

2006년 육성선수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입단해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를 거쳐 2017년에 은퇴한 이여상도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야구 교실을 차렸다. '이여상 야구교실'은 2년 넘게 성공적인 운영을 이어갔고 작년에는 고교야구 선수인 북일고의 고승민(롯데)과 서울고의 송승환(두산 베어스)이 이여상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받기도 했다. 만약 이여상이 가르친 선수들이 훗날 KBO리그에서 성공한다면 이여상의 지도력은 재평가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야의 고수'를 꿈꾸던 이여상의 꿈은 잘못된 선택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여상은 자신이 지도하는 유소년 선수들에게 금지약물인 스테로이드를 권하고 판매했고 심지어 직접 선수들에게 투약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약사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이여상은 수강생에게 1회당 300만 원씩 받고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을 통해 약 1억6000만 원에 해당하는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여상 사건'을 단순히 한 야구교실에서 일어난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야구계 전체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주사 비용을 부풀려 어린 수강생에게 금지약물을 투여한 이여상도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녀의 실력향상을 위해 검증되지 않은 불법약물을 고액에 구입한 학부모들도 상당히 큰 문제다. 그들 중에는 분명 어린 시절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육상 100m 경기를 본 후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소식을 듣고 혀를 찼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금지약물은 '땀을 흘려 실력을 키운다'는 스포츠의 기본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한 부분은 선수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문제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스테로이드는 심장과 간기능 장애를 유발할 수 있고 면역력 약화와 내장기관의 손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래 친구들보다 나은 선수로 만들겠다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아이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는 셈이다.

한국야구의 뿌리와 미래를 지키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 필요 

이런 여러 가지 부작용들과 약물로 만들어진 정정당당하지 못한 기록들 때문에 약물 사용 전력이 있는 선수들에 대한 스포츠 팬들의 시선은 매우 차갑다. 일각에서는 금지약물사용이 적발된 선수는 영원히 경기에 뛸 수 없도록 '영구 퇴출'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두산 김재환은 2012년 1군 10경기 출전정지 징계기간이 끝난 후 "봉인이 해제됐다"고 발언하면서 야구 팬들의 큰 미움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 발언은 당시 김재환이 약물사용에 대해 반성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김재환은 작년 시즌 정규리그 MVP에 선정돼, 약물사용과 철없던 당시 발언에 대해 후회한다며 다시 한 번 야구 팬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차가운 여론을 완전히 돌리진 못했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 KADA

한국도핑방지위원회 KADAⓒ 연합뉴스

 
한국 프로야구의 도핑테스트는 지난 2007년 처음 도입됐다. 처음에는 10경기 출전정지에 그쳤지만 지난 2016년부터 시즌 절반에 해당하는 72경기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WADA(세계반도핑기구)에서 약물 복용에 적발된 선수에 대한 징계를 1년 이상 부여하는 것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다. 지난 2014년 수영 선수 박태환은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이 나와, 18개월 선수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다. 

물론 지금과 같은 무작위 테스트 방식으로는 정확한 조사가 어렵다는 한계점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수들의 약물 사용을 방치하는 것은 한국야구위원회의 직무유기라고도 볼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지난 2001년과 2013년 두 번의 대형 약물 스캔들을 겪은 이후 약물 검사가 한층 강화됐다. 세계 최대 규모의 격투단체 UFC에서도 약물검사를 대폭 강화한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현직 챔피언들이 대거 징계를 당하는 풍파를 겪었다. KBO리그 역시 더 늦기 전에 단호한 결심이 필요하다. 적어도 우리의 어린 유망주들은 약물의 위협이 없는 곳에서 깨끗한 야구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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