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스틸컷

영화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스틸컷ⓒ (주)팝엔터테인먼트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프렌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30년 전 첫사랑을 다시 만나러 가는 영원(박원숙분)이 충남(윤여정)에게 "그 남자 부인이 있으면 어쩌지?"하고 묻는다. 충남은 영원의 등을 떠밀며 "한 여자랑 그렇게 오래 사는 거 아니라고 전해. 이제 나랑 살자고 해." 관록이 있는 배우 윤여정님 입에서 나온 저 대사에 설득 당했다.
 
한 사람을 30년이 넘도록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모든 걸 고려한다 해도 그만하면 이제라도 같이 살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 남자의 아내도 평생 다른 사람을 품고 살았던 사람 뒤통수만 보고 사는 걸 멈춰야 그의 존엄을 위해서도 마땅하다. 머리는 이럴진대 현실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자식, 경제력, 복수심, 사회적 시선이 뭉뚱그려져 현실을 잠재운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완이(고현정)는 90이 돼가는 외할머니(김영옥분)에게 한마디로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외할머니는 인생이 별거 아니라고 답한다. 누군가에게 인생이 별거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말이 화살처럼 박혔다. 어쩌면 인생이 진짜 별거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등바등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조금 더 초연해질 수 있도록, 편안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몇 달 후, 그가 왔다

불면증이 심한 요즘, 날이 밝도록 잠을 못 이룬 나는 벌떡 일어나 집 근처 극장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해서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표를 끊었다. 이름도 생소한 <평일 오후 세 시의 연인>. 일단 제목이 맘에 든다. 상영관에 들어가니 나 혼자. 나 없으면 영화 안 틀어도 되는 걸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전기세를 낭비하는 기분이랄까. 이미 광고가 시작했기에 환불이 안 된다는 설명을 들은 터라 할 수 없다 생각하고 몸을 깊숙이 눕혀 앉았다.
 
사와는 3년 전, 남편이 아닌 가정이 있는 남자, 기타노를 사랑한 죄(?)로 이혼하고 직장도 잃고 작은 바닷가 마을로 홀로 옮겨왔다. 카페 주방에서 주방보조 일자리를 구해 그럭저럭 적응하고 살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 앞에 그가 다시 나타났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강력한 자기장에 끌려가듯 사와는 그를 다시 마주한다. 하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그로 인해 모든 걸 잃은 사와와 달리 그는 여전히 가정이 있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다. 좋게 말하면 그는 부인에게 책임감 있는 결정을 한 것이지만 사와의 입장에서는 버린 거다.
 
기타노는 곤충학자로 반딧불이를 연구한다. 그 연구를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 사와의 집 근처 계곡을 찾고 사와는 그를 보며 다시금 설렌다. 이럴 땐 늘 가슴이 머리를 이기는 법. 하지만 애타는 마음뿐, 그도 선뜻 사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해와 달처럼 서로 빙글빙글 돌기만 한 어느 날, 이별을 결심하고 돌아서는 순간, 같이 있는 모습을 그의 아내 노리코에게 들키고 만다. 노리코는 삼 년 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와를 다시 마주하고 분노에 휩싸인다.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만나는 모습을 보며 노리코는 이성을 잃었다. 노리코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고 돌아서 뛰쳐나오는 사와를 기타노가 붙잡는다. 이번에는 상처 주지 않겠다고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리고 몇 달 후, 그가 왔다.

피로감을 몰고 온, 통속적인 결말 
 
 영화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스틸컷

영화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스틸컷ⓒ (주)팝엔터테인먼트


이혼서류에 도장은 아직 찍지 않았지만, 부인과 이혼이 합의되었고 둘은 그토록 원하던 서로를 가졌다. 이렇게 해피엔딩이면 영화가 싱거울까 봐 갑자기 영화는 소금을 뿌리기 시작한다. 그것도 굵은 소금을 마구마구. 영화는 멜로에서 갑자기 스릴러로 바뀐다. 부인의 질투와 집착, 그리고 분노로 결국 모두 파국을 맞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장점은 영상과 음악이 너무 좋다는 거다. 담담한 카메라 앵글마저도 아름답다.
 
다만 결말이 아쉽다. 그러니까 감독은 '불륜은 죄이고 반드시 벌을 받는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불륜을 해피엔딩으로 끝내기에는 감독도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민감한 주제를 잘 못 건드렸다간 비난을 면치 못할 테니. 하지만 매번 이런 통속적인 결말은 피로감을 몰고 온다. 사와와 기타노, 그리고 그의 아내의 내면을 더 파고들 수는 없었을까. 흔들리는 게 인간이다. 흔들리면서 무수한 번뇌가 일어난다. 그 번뇌를 깊숙이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히 그 사랑의, 혹은 미움의 대가를 치르고도 남을 텐데 거기에 꼭 심판한다.
 
다른 사람을 이미 마음에 두었다면, 늪에 빠지듯 몸부림칠수록 깊숙이 빠져들었다면, 나를 위해서, 같이 사는 그 사람을 위해 어떤 선택이 더 죄가 될까. 숨기고 사는 것도 그 사람을 농락하는 일이고, 고백하고 헤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무게를 가늠해 본다. 사실 둘러보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많다. 두 가지에 해당하는 일이 모두 내 주변에 벌어진 적이 있었다.
 
친구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소위 두 집 살림하다가 들킨 것이다. 친구는 좌절했고 그 분노 앞에서 나도 몸을 떨었다. 결국, 이혼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여자와도 깨졌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남편과 쇼윈도 부부로 지내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 그 남편도 다른 여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식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혼이 쉽던가. 친구는 '인생 한 번뿐이고 짧은데 이렇게까지 참고 살아야 하냐'고 했다가, '그래도 애들이 있는데 참고 살아야지' 했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했다.

사랑과 불륜이라는 인류 보편적 문제와 감정들... 
 
 영화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스틸컷

영화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스틸컷ⓒ (주)팝엔터테인먼트


불교 경전인 법구경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라고 쓰여있다. 미운 남편을 봐야 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는 괴로움이 이중으로 쌓여 있으니, 배신한 쪽과 배신 당한 쪽, 어느 쪽의 무게가 더 무겁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내 일이라면, 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면, 나는 슬프게 울 테지만 보낼 것이다. 내 행복이 가장 중요한 나는 그 옆에서 불행한 나를 가만히 둘 수 없다. 설사 그런 일이 발생해도 그도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 보낼 거 같다. 대신 위자료는 듬뿍 받아야겠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흥행했던 드라마를 영화화 한 것이다. 그 탄탄한 원작을 기반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 7월부터 한 방송사에서 리메이크해 미니시리즈로 방영할 예정이다. 일본 특유의 감성에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했다고 한다.

드라마 홈페이지에는 '사랑과 불륜이라는 인류 보편의 문제와 감정들이 주인공들의 고통과 희열, 갈등과 번민을 통해 어떻게 치유되고 어떻게 성장하는지. 그래서 결국, 인간의 품격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 섬세하고 밀도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자 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깜짝 놀랐다. 딱 내가 원하는 그 지점이 적혀 있었다.
 
고통을 통과하고 일어선 인간이 그로 인해 얼마나 단단해지고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밀도 있게 그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심판하여 신파가 되어 버리지 않는, 진정한 인간의 품격을 보여주기를.
덧붙이는 글 이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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