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배구의 2019년 첫 번째 국제대회였던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가 보령에서 열린 5주차 일정을 끝으로 예선 라운드를 모두 마쳤다. 한국은 보령에서 2연승을 거두며 대회를 마감했지만 종합 전적 3승 12패로 16개의 참가팀 중 15위에 머물렀다. 한국의 첫 승 제물이었던 벨기에가 7위(8승7패), 일본이 9위(7승8패), 태국이 12위(5승10패)에 오른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15위는 결코 만족하기 힘든 성적이다.

하지만 한국은 애초에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부임한 후 첫 국제대회인 만큼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고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한 선수들도 워낙 많았다. 여기에 한국 여자배구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제' 김연경(엑자시바시)마저 터키리그 일정으로 3주차부터 합류했다. 한국은 1.5군 정도의 전력으로 VNL 대회를 치렀다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서 얻은 수확도 적지 않았다. 약관의 이주아(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박은진(KGC인삼공)이 가능성을 보였고 오지영 리베로(KGC인삼공사)는 김해란(흥국생명)의 빈 자리를 잘 메워줬다. 소속 팀에서처럼 빈 자리를 채워준 표승주(IBK기업은행 알토스)의 희생정신도 돋보였다. 하지만 이번 대회 최고의 성과를 꼽자면 사실상 공석이나 다름 없던 세터 자리에 이다영(현대건설 힐스테이트)이라는 훌륭한 인재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염혜선의 이적으로 프로 입단 4년 만에 얼떨결에 차지한 주전 자리
 
 사실 이다영은 경쟁이 아닌 선배의 이적 때문에 어부지리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사실 이다영은 경쟁이 아닌 선배의 이적 때문에 어부지리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 한국배구연맹

 
이다영은 배구 팬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이재영(흥국생명)과 쌍둥이 자매로 어린 시절부터 유명세를 떨쳤다.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어머니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출전했던 전 배구 국가대표 김경희씨인데 김경희씨는 현역시절 왼손잡이 세터로 활약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 받은 선수는 오른손잡이 공격수인 언니 이재영이 아닌 왼손잡이 세터인 동생 이다영인 셈이다.

이재영와 함께 '쌍둥이 유망주'로 큰 주목을 받은 이다영은 선명여고 시절부터 언니와 함께 성인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이효희의 백업세터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재영을 지명했지만 2014년 흥국생명에 부임한 박미희 감독도 이재영과 이다영을 놓고 고민했을 정도로 이다영은 '장신세터 유망주'로 상당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다영이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현대건설에 입단했을 때 현대건설에는 이미 세터상 4회 수상에 빛나는 확실한 주전세터 염혜선(인삼공사)이 있었다. 프로 입단 후 3년 동안 염혜선의 백업 세터로 활약한 이다영은 179cm의 좋은 신장과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2단 공격과 블로킹에서 큰 장점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세터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토스의 안정감에서는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염혜선에게 미치지 못했다. 

물론 이다영은 특유의 발랄한 성격과 넘치는 끼로 올스타전에서 3년 연속 세리머니상을 수상하며 배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소속팀에서는 백업이었던 이다영이 매년 팬투표를 통해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비결이다. 이다영은 올스타전에서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 큰 강점을 보여주지 못하며 김사니(SBS스포츠 해설위원)와 이숙자(KBS N 스포츠 해설위원), 이효희(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를 이을 차세대 세터 경쟁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러던 2017년 FA시장에서 현대건설과 이다영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프로 입단 후 9년 동안 현대건설의 붙박이 주전세터로 활약했던 염혜선 세터가 기업은행으로 이적한 것이다. 염혜선 세터가 팀을 떠나면서 현대건설 선수단에 세터는 이다영 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이다영은 강혜미,이숙자,염혜선 같은 쟁쟁한 세터들이 거쳐 간 명문팀 현대건설에서 얼떨결에(?) 주전세터 자리를 차지했다.

소속팀에 이어 국제대회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빠른 성장
 
 이다영은 이번 VNL 대회에서 주전 세터로 활약하며 김연경도 놀랄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를 보여줬다.

이다영은 이번 VNL 대회에서 주전 세터로 활약하며 김연경도 놀랄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를 보여줬다. ⓒ 국제배구연맹

 
이다영은 2017-2018 시즌부터 현대건설의 주전세터로 활약했다. 물론 치열한 경쟁 끝에 얻어낸 자리가 아니라 선배의 이적 때문에 갑작스럽게 맡은 주전 자리였지만 종목을 막론하고 경험이 부족한 유망주에게 '실전' 만큼 좋은 연습은 없다. 이다영은 2017-2018 시즌 28경기에서 세트당 11.49개의 세트 성공과 2.85개의 디그, 0.53개의 블로킹을 기록하며 주전 첫 시즌에 현대건설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2018-2019 시즌은 시련 속에 성숙함을 배웠던 시간이었다. 현대건설은 외국인 선수 베키 페리가 초반에 퇴출되면서 2007-2008 시즌 이후 11년 만에 개막 11연패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주전세터 이다영도 팬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지만 현대건설은 밀라그로스 콜라(등록명 마야)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4라운드 이후 15경기에서 8승7패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이다영도 비난을 이겨내고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하며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2018-2019 시즌이 끝난 후 라바리니 감독은 이다영을 대표팀에 선발했다. 사실 179cm의 좋은 신장에 동포지션 최고의 블로킹 능력을 보유한 20대 초반의 유망주 세터가 대표팀에 선발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라바리니 감독은 이번 VNL 대회 내내 이다영을 사실상 대표팀의 주전 세터로 활용했다. 그리고 이다영은 지난 두 시즌 동안 소속팀에서 그런 것처럼 이번 VNL 대회를 통해 세터로서 또 한 단계 성장했다.

무엇보다 대회를 거듭할수록 대표팀의 쌍포인 김연경,김희진(기업은행)과 호흡이 맞아갔다는 점이 가장 고무적이었다. 특히 주장 김연경은 지난 19일 한일전에서 23득점으로 한국의 3-0 승리를 이끈 후 인터뷰에서 "다영이의 토스가 점점 정확해 지면서 호흡이 좋아지고 있다"며 이다영의 노력과 발전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이번 대회 초반과 5주차를 비교해 보면 이다영의 토스에 대한 자신감과 정확도가 몰라보게 향상됐음을 알 수 있다.

이다영의 최대 장점은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언제나 밝은 표정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물론 '코트 위의 사령관'으로 불리는 세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해야 하지만 이다영처럼 밝은 표정으로 동료들을 독려하는 타입의 세터 역시 팀에 큰 활기를 줄 수 있다. 안혜진(GS칼텍스 KIXX),이나연(기업은행)과 함께 강화훈련 16인 명단에 포함된 이다영은 오는 8월에 열리는 올림픽 예선전을 위해 다시 담금질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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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2019 VNL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이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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