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 포스터

▲ 행복한 라짜로 포스터 ⓒ (주)슈아픽처스

  
<퍼스트 리폼드>란 영화가 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도망치던 노예들이 숨어들던 교회의 이름이 '퍼스트 리폼드'라 했다. 이곳 주임목사는 신의 뜻에 따라 도망자들을 지하 공간에 숨겨주었다는데, 시간이 흘러 낡은 교회는 기념티셔츠며 모자 따위의 것을 파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교회라기보단 기념관이며 박물관이 된 것이다.
 
아내와 자식을 한 순간에 잃고 무너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내 언스트 톨러(에단 호크 분)가 퍼스트 리폼드의 담임목사다. 그런 그가 우연치 않은 계기로 어느 환경운동가 부부와 만나 겪게 되는 변화가 영화의 주된 관심이다.
 
늘어나는 인간이 지구를 파괴할 것이란 부부의 믿음 때문일까. 톨러의 삶에도 어느 물음 하나가 끼어들어 비키지 않는다. 그 물음은 이렇다.
 
'신은 우리를 용서하실까?'

<퍼스트 리폼드>와 <가버나움>의 물음
 
퍼스트 리폼드 상업화된 성전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는 퍼스트 리폼드 담임목사 언스트 톨러(에단 호크 분).

▲ 퍼스트 리폼드 상업화된 성전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는 퍼스트 리폼드 담임목사 언스트 톨러(에단 호크 분).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가버나움>이란 영화도 있다. 기독교 신약경전 <마태복음> 가운데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예수가 각별히 사랑하여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도시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죄악이 끊이지 않아 마침내는 예수의 저주를 받았다니, 신의 사랑을 받았으나 인간의 죄악으로 몰락한 땅이라 봐도 되겠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레바논의 오늘에 존재하는 가버나움을 그린다. 제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저를 낳은 부모를 고소했다는 열두 살 난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의 이야기다. 무능력한 부모는 아이들을 거리로 몰아 돈을 벌게끔 하고, 막 월경을 시작한 딸아이는 그를 탐내는 동네 사내에게 팔아치우듯 시집보낸다.
 
온갖 부조리로 가득해 어떤 희망도 없어 보이는 자인의 삶을 영화는 조용히 뒤따른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벗어나 마주해야 했던 냉혹한 세상과 그 세상이 소년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관객은 무방비로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우리는 레바논을 넘어 우리가 사는 이 도시 역시 얼마쯤 가버나움과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퍼스트 리폼드>와 <가버나움>의 관심은 놀랄 만큼 흡사하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신은 과연 용서할까 하는 것이 영화의 물음이다. 어쩌면 지금 당장 신이 이 세상에 온다고 해도 그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신을 알아보지 못해서일지 모른다.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안긴 아홉 명의 경쟁부문 심사위원단 가운데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주목받는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가 있었다. 1981년생 젊은 감독인 로르와커는 지난해 열린 제71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감독으로 초청돼 각본상을 챙겨갔다. 그때 그가 들고 온 작품이 <행복한 라짜로>로, 오늘 씨네만세에서 다룰 영화다.

"이거 해, 라짜로!" "저거 해, 라짜로"
 
행복한 라짜로 얼굴과 눈빛, 표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예수나 천사를 떠올리게 하는 라짜로의 모습.

▲ 행복한 라짜로 얼굴과 눈빛, 표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예수나 천사를 떠올리게 하는 라짜로의 모습. ⓒ (주)슈아픽처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종교적 색채가 짙은 영화다. 라짜로는 한국에선 나사로로 알려진 인물로, 예수가 벌인 기적 가운데 꽤나 유명한 대목에 등장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모 없이 살던 가난한 세 남매가 일찍이 예수와 연이 있었다. 그중 오빠인 라짜로가 병에 들자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린다. 소식을 들은 예수는 이들이 사는 도시로 찾아와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라짜로를 살려낸다. 부활이다.
 
<행복한 라짜로>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믿기 힘든 설정부터, 다분히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분)의 순결무구한 생김, 그가 짓는 표정까지가 모두 그렇다. 때로는 부활한 라짜로가 읽히고 때로는 예수가 떠오르는 주인공 라짜로의 모습에서, 감독 로르와커가 던지고자 했던 질문이 읽힌다.
 
처음 두드러지는 건 계급이다. 라짜로는 이탈리아 시골마을 인비올라타에 사는 젊은이다. 인비올라타는 어느 후작부인이 지배하는 영지로, 60여명의 소작농이 담배농사를 지어 먹고 산다. 후작부인은 중간관리자를 보내 이들에게 대가를 받아내는데 어찌나 과한 값을 요구했는지 소작농들이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빚은 줄어들지 않는다.
 
인비올라타에서 가장 높은 자는 후작부인과 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 분)다. 그리고 다음은 중간관리자이며 마지막이 소작농이다. 그런데 이 소작농들이 착취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라짜로다.

늑대 떼로부터 가축을 지켜야 하는 사내는 제 자리를 라짜로에게 넘기고는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 내내 라짜로는 쉼 없이 일한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안아 옮기고 트럭에 무거운 물건들을 옮겨 싣는다. 감독은 담배농장에서 수확을 하는 장면을 통해 라짜로와 마을사람들의 관계를 단박에 내보인다. 딴 담뱃잎을 옮기기 위해 너나할 것 없이 라짜로를 불러대는 농부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농부들은 라짜로에게 험하고 귀찮은 일을 맡기면서도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대가는커녕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싫은 소리까지 듣는다. 언젠가 라짜로가 몹시 앓았던 날엔 마을 사람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 침대를 내주지 않는다. 라짜로를 정말로 위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왜 하필 '라짜로'인가
 
행복한 라짜로 인비올라타의 주인처럼 행세하며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후작부인과 그의 아들. 후작부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착취할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 행복한 라짜로 인비올라타의 주인처럼 행세하며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후작부인과 그의 아들. 후작부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착취할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 (주)슈아픽처스

  
영화가 후반으로 나아가면 이야기는 보다 선명해진다. 거대한 사기극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소작농들은 해방되지만 진정으로 변한 건 없는 듯 보인다. 인비올라타의 소작농들은 도시의 빈민이 되고, 여전히 고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 한 끼 먹을 것을 구하려 절도와 사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앞에 오래 전 헤어진 라짜로가 다시 나타난다. 여전히 선한 눈망울을 가진 라짜로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크고 작은 일들을 겪어나간다.
 
성당신은 영화의 백미라 할만하다. 탄크레디의 초대를 받은 옛 소작농들이 라짜로와 함께 그를 찾았다가 헛걸음을 하고 난 뒤 이어진 바로 그 장면이다. 제대로 대접받으리란 기대가 박살나고 타고 온 차까지 퍼져버린 상황에서 일행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듣는다. 일행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어느 성당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선 한 사내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몇몇 수녀들이 이를 듣고 있다.
 
변변치 않은 차림의 일행이 성당에 들어서자 수녀 하나가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비공개 미사입니다. 들어올 수 없어요."
 
끝내 쫓겨나는 사람들 뒤로 음악소리가 함께 빠져나간다.
 
그때 터져 나오는 수녀의 외침이 일품이다. "음악이 떠나고 있어. 어서 문을 닫아!" 하지만 이미 늦은 걸까. 연주자가 아무리 건반을 눌러대도 음악은 다시 흘러나오지 않는다.
 
퍼진 차를 밀며 집까지 돌아오는 일행 뒤로 음악소리가 따라붙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이지만 이 장면에서만큼은 어느 배우 못지않게 선명하고 아름답다. 이 장면에 이어 라짜로는 일행 뒤로 떨어져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다가는 월계수 아래 앉아 눈물을 흘린다.

예수의 눈물과 라짜로의 눈물
 
행복한 라짜로 자신이 형제의 연을 맺었다고 믿는 탄크레디와 다시 만난 라짜로. 이들의 뒤로 검은 연기를 뿜는 오염된 듯한 도시 풍경이 인상적이다.

▲ 행복한 라짜로 자신이 형제의 연을 맺었다고 믿는 탄크레디와 다시 만난 라짜로. 이들의 뒤로 검은 연기를 뿜는 오염된 듯한 도시 풍경이 인상적이다. ⓒ (주)슈아픽처스

  
예수가 성전 정화를 벌일 당시의 신이 없는 교회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눈물을 흘리는 라짜로의 모습과 어우러져 절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게다가 라짜로 뒤에 심겨진 나무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철 푸르러 순결과 불멸의 상징이며 천사의 나무라고까지 불린 월계수가 아닌가. 불멸의 나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부활한 천사, 그리고 그와 그의 일행이 쫓겨나온 교회로부터 음악이 떠난다는 기묘한 설정은 곧 이 영화의 주제로 이어진다.
 
부동산업자와 은행,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들, 가난한 자를 성전에서 내쫓는 성직자들을 통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퍼스트 리폼드>와 <가버나움>, 그리고 <행복한 라짜로>는 우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이 땅에 만약 신이 온다면, 그는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관련해 성경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하고 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대목으로, 오빠인 라짜로의 죽음 뒤 예수를 맞이한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다. 라짜로를 죽음으로부터 살리기 위해 베다니아를 찾은 예수는 곧장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 어귀에서 마르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예수는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유명한 물음을 묻는다. 하지만 마르타는 이에 맞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답할 뿐이다.

결국 동생 마리아가 다시 불려가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야 예수는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먼저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따를 수 있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신이 다시 와도 어쩌지 못할
 
행복한 라짜로 부활한 라짜로를 마주한 안토니아는 그 앞에 무릎 꿇지만, 이내 라짜로를 신이나 천사가 아닌 옛날부터 알던 소년처럼 대한다.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끝내 예수를 눈물짓게 했듯, 안토니아 역시 라짜로를 울게 한 원인일지 모른다.

▲ 행복한 라짜로 부활한 라짜로를 마주한 안토니아는 그 앞에 무릎 꿇지만, 이내 라짜로를 신이나 천사가 아닌 옛날부터 알던 소년처럼 대한다.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끝내 예수를 눈물짓게 했듯, 안토니아 역시 라짜로를 울게 한 원인일지 모른다. ⓒ (주)슈아픽처스


예수가 베다니아로 들어선 뒤 이어진 일은 꽤나 충격적이다. 기적에 앞서 예수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성경은 마리아가 라짜로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눈물을 쏟자 예수 역시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한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수가 눈물을 보인 단 두 번의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에 대해 라짜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에 대한 동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나는 죽은 자를 살리겠다는 자신의 말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이들을 보며 예수가 느낀 절망감으로 보는 해석에 힘을 싣고 싶다.
 
영화 속 라짜로의 눈물은 그렇다면 어떤 의미였을까. 예수가 떠난 지 20세기 가까이 흐른 오늘에도 (라짜로의 일행이 성당에서 내쫓겼듯) 성전은 신의 것이 아니고, (후작부인이 소작농을, 소작농이 라짜로를 착취하듯) 사람들은 저보다 못한 이를 착취하며, (탄크레디가 라짜로 일행을 집에 들이지 않듯)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안토니아마저 부활한 라짜로를 완전히 신성한 무엇으로는 대하지 않듯) 믿음은 간직되지 않았다.
 
저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예수는 끝내 피하지 못할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짐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라짜로의 눈물 역시도 그와 얼마 다르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묻는다. 스크린을 넘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신이 다시 온다면, 그는 우리가 빚은 수많은 잘못을 용서할 수 있을까. 또 우리는 그를 진정으로 믿을 수 있을까. 라짜로는 정말 행복했을까.
덧붙이는 글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행복한 라짜로 알리체 로르와커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루카 치코바니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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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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