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의 김원봉(유지태 분).

<이몽>의 김원봉(유지태 분).ⓒ MBC

  
MBC 드라마 <이몽>은 약산 김원봉의 항일투쟁을 실제와 다르게 묘사하는 측면이 많다. 실제의 김원봉은 중국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뒤에야 귀국했지만, 드라마 속의 김원봉(유지태 분)은 한국과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서울 거리도 마음대로 활보한다.
 
또 드라마 속의 김원봉은 정치적 색깔이 다른 백범 김구(유하복 분)와의 공조 체제 하에 일상적인 항일투쟁을 수행한다. 6월 1일 방송된 <이몽> 15회에서 김원봉은 임시정부 김구의 힘을 빌려 친일파 거두 송병수(이한위 분)을 암살한다. 김구의 양해 하에 임시정부 밀정인 의사 이영진(이요원)과 함께 송병수를 독살한 것이다.
 
같은 날 방송된 제18회에서는 김원봉이 이영진에게 부탁해 조선총독부 출입증을 얻은 뒤 총독부에 들어가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실제 역사와 다른 허구다. 이 드라마는 좌파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김원봉과 우파 민족주의자 김구의 공조 체제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이몽>의 이영진(이요원 분).

<이몽>의 이영진(이요원 분).ⓒ MBC

  
이상과 같은 드라마 속의 좌우합작은 실제 역사와 무관하다. 김원봉(1898년 생)은 아버지뻘인 김구(1876년 생)와 사적으로는 친밀했지만, 항일투쟁에서는 노선을 달리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은 어느 정도는 서로를 낮게 평가했다.
 
김원봉 진영은 김구와 임시정부를 '유명무실한 자리에 앉아 제대로 된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인식했고, 김구 진영은 김원봉과 의열단·조선의용대를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 있다'고 인식했다. 여기다가 사상적 입장마저 달랐으므로, 두 사람이 <이몽>에서처럼 일상적으로 좌우합작을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김원봉과 김구는 결정적 순간에는 힘을 합쳤다. 평소에는 입장을 달리했던 두 사람이 중요한 순간에 가서는 좌우합작을 이루고 항일투쟁을 함께했던 것이다. 지금은 1930년대 상황을 보여주는 <이몽>이 1940년대 상황까지 보여주게 된다면, 시청자들도 실제 역사 속의 김원봉·김구 좌우합작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김원봉, 그의 쉽지 않았던 선택

지난 6일 서울현충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두 사람의 좌우합작을 언급했다.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와 김구가 만든 한국광복군, 이 두 부대가 하나로 통합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戰地)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좌우합작으로 강화된 광복군이 항일전쟁을 수행한 데 이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된 점 역시 크게 칭송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급히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국군의 근간을 형성하는 뿌리가 됐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은 민주공화국의 법통이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있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군의 법통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광복군이 보다 강화된 역량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한때 300명을 넘었던 조선의용대 병력이 가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원봉이 광복군에 힘을 실었으니, 그와 김구의 좌우합작에서 국군의 뿌리를 찾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용대와 김구의 광복군을 통합하기로 한 김원봉의 결단은 그처럼 훌륭한 의의를 갖는 사건이지만,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의 고뇌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1세 때인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일본인과 일본 기관에 폭탄 공격을 가함으로써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김원봉이다. 사람과 돈을 자기 힘으로 모으고 스스로 폭탄 제조법까지 익히며 항일투쟁을 했던 김원봉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38년(40세)에 독자적 군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게 됐다.
 
간략하게나마 그의 인생 역정을 들여다보면, 그가 의열단과 의용대에 얼마나 큰 애착을 품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자수성가한 기업가가 자기 회사에 대해 갖는 애착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의용대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김구의 광복군과 통합하는 일이 그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의용대와 광복군의 통합을 촉구한 곳 중 하나가 국민당이 이끄는 중국 정부였다. 중국 관내에 있는 항일투쟁 역량을 총결집할 목적으로 한국 독립투사들에게도 좌우합작을 권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의 권유가 있었건 없었건,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이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일본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좌우합작이 필수적이기는 했지만, 김원봉한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김구가 이끄는 우파와의 통합이라 더욱 더 그랬다. 설령 김원봉이 주도적 입장에 선다 해도 우파와의 통합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분열의 소지를 안고 합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김원봉 중심의 통합이 아니라 김구 중심의 통합이었다. 김원봉이 굽히고 들어가는 합작을 요구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가 우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김구의 역량이 김원봉을 능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원봉이 통합을 위해 포기한 것들

처음에는 아들뻘인 김원봉이 김구보다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한·중·일 삼국을 무대로 한 의열단 활동이 대단한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2년에 이봉창 의거 및 윤봉길 의거가 국제적 주목을 받으면서 이를 지휘한 김구의 위상이 급부상한 결과로 1940년대 초반에는 김구가 김원봉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서 김원봉이 불리한 조건의 통합을 권유받았던 것이다. 이때 김원봉이 처한 난처한 입장을, 한상도 건국대 교수의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에서는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 측의 수차에 걸친 합류 종용에 동의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민족혁명군 편성을 시도했다"는 말로 표현한다. 의용대를 해체하고 광복군에 합류하는 일이 처음 한동안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김원봉은 결국 통합을 선택했다. 일본과 싸우자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1942년 12월 1일 광복군 부사령관 자격으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함으로써 광복군 합류를 공식화했고, 나흘 뒤인 12월 5일 김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사령관 취임식을 가졌다. 한편,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독립>지에서 이렇게 피력했다. 한상도 교수의 책에 인용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우리 민족의 혁명전투 깃발인 조선의용대는 금년 가을에 한국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하게 되었으며, 또 이는 군사 통일을 위한 성의에서 우리의 최대의 양보인 것이다. ······ 물론 우리 의용대의 발전을 위하여 다년간 분투 노력해온 동지들과 더욱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한 동지들로서는 어느 정도 서운한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 그러나 우리의 무장 역량을 집중 통일하기 위한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합병은 우리 운동의 진보와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함께 인식할 것이며, 또 함께 기뻐하고 치하할 바라고 믿는다."
  
광복군으로 통합된 것을 기뻐하고 축하하자는 글을 쓰면서도, 서운한 감정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최대한의 양보를 했다'거나 '동지들은 서운한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통해, 위 글을 쓸 당시의 김원봉이 어떤 심정을 품고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김원봉은 자기 자신과 자기 조직을 희생하면서까지 좌우합작을 이루고 광복군을 강화시켰다. 이념적 분열이 심했던 독립운동 진영에서, 그만한 역량을 보유한 인물이 스스로를 꺾고 통합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입영열차에 탑승한 병사의 마음 이상으로, 광복군에 '입대'하는 김원봉도 착잡했을지 모른다. 겉으로는 아닐지라도 마음속으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단번에 통합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많은 고뇌와 갈등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 끝에 결국엔 대의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서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민족독립이 최상의 가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포들의 독립을 최우선 가치로 인식했기에, 자기 부대를 이끌고 김구의 광복군에 기꺼이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김원봉이 현충일 추념사에 짤막히 거명된 것을 두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발끈'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원봉을 칭송한 것도 아니고 김구와 임시정부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통합해 광복군을 강화한 사실을 칭송한 것인데도, "대통령이 좌파 김원봉을 찬양했다"면서 엉뚱하고도 과도한 비판을 하고 있다.
 
광복군은 국군의 법적인 뿌리다. 그런 광복군이 잘되게 하고자 김원봉은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했다. 그는 통합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모범적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한국당과 미래당의 비판이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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