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녹두꽃>.

드라마 <녹두꽃>. ⓒ SBS


1894년 동학혁명은 농민군도, 정부군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엉뚱하게도 일본군의 조선 상륙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SBS 드라마 <녹두꽃> 최근 방영분에서도, 일본군이 동학혁명을 빌미로 조선에 마음대로 상륙한 사실이 거론됐다. 청나라가 조선의 파병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일본군이 조선 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임의로 군대를 보냈던 것이다. 드라마뿐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다.
 
동학혁명 때 창작됐을 것으로 보이는 동요가 있다. <녹두꽃>에서도 자주 흘러나오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다. 녹두밭을 해치지 말 것을 파랑새에게 촉구하는 동요다.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한다. 전봉준은 당시 남자 평균 키인 160센티미터에 훨씬 못 미치는 단신이었다. 그래서 녹두콩처럼 작다 해서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붙었다. 파랑새는 일본군을 상징한다. 일본군의 군복이 파랑색이었다. 동학군과 전봉준을 진압하는 일본군에 대한 반감을 노래한 게 바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다.
 
파랑색 군복의 일본군은 조선 정부도, 동학군의 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임의로 상륙했다. 그런 뒤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청나라군과 일전을 벌이고(청일전쟁), 동학군을 최종적으로 진압했다. 동학군의 궐기가 엉뚱하게도 일본의 내정간섭과 일본의 전쟁 승리로 연결된 것이다. 청나라를 꺾은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내에서 최강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브라질에서 시작된 바람은 처음에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주 미미하지만, 미국 텍사스에 이르러서는 태풍 같은 큰 바람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농민들의 궐기도 처음에는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그랬던 것이 동학혁명으로 이어지고 청·일 군대의 참전으로 연결되더니, 급기야 일본의 국제적 지위 상승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동학혁명 상상화.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동학혁명 상상화.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동학혁명이 낳은 연쇄적 효과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감소시킨 일본은 조선 무대의 또 다른 라이벌인 러시아와의 한판을 준비했다. 이것이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고, 뜻밖에도 러시아 제국의 충격적 패배로 연결됐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뒤로 영국과 러시아는 세계 최강 자리를 공동으로 차지했다. 그런 러시아가 일본한테 충격적 1패를 당하고 쓰러진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멸망은 1917년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을 낳고, 이것은 1945년 이후의 냉전 질서로 연결됐다.
 
물론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내부의 요인에 일차적으로 기인한 것이다. 그에 더해, 동학혁명이 러시아 혁명을 부채질한 측면이 크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고부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갯짓이 러시아에서 혁명의 토네이도가 일어나는 데 어느 정도 일조했던 것이다.
 
이런 연쇄적 결과를 관찰하다 보면, 동학혁명이 러시아혁명에 미친 영향은 차치하고라도 일본군 상륙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 때문에 안타까움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봉준의 궐기가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 때문에 서글픔을 금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을 불러들인 데는 좀더 큰 요인이 있었다. 동학혁명이 일본군을 불러들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보다 훨씬 큰 측면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조선 정부의 무능이다.
 
1800년대에 조선 정부는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약 100개의 민란을 겪었다. 전국 각지에서 빈발하는 민란들을 그럭저럭 진압하던 조선 정부는 1882년 임오군란 때는 통제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했다.
 
한양 시민들과 하급 직업 군인들이 주도한 이 민란으로 인해 고종의 왕권은 약 1개월간 정지됐다. 그 기간, 고종은 허수아비였다. 고종의 은밀한 요청을 받은 청나라군이 상륙해 지금의 서울 왕십리에 주로 거주하던 시민군 지도부를 진압하지 않았다면, 고종의 재위기는 1907년이 아니라 1882년에 끝났을 수도 있다. 임오군란은 조선 정부군이 대규모 민란을 진압할 역량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였다.
 
조선 정부의 무능력은 12년 뒤인 동학혁명 때까지도 치유되지 않았다. 호남 곡창지대 중심지인 전주성이 점령되자, 정부는 의욕을 상실하고 청나라에 SOS를 타전했다. 외세의 힘을 빌려 혁명군을 진압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청나라가 파병을 준비하자, 일본도 덩달아 채비를 서두르게 됐던 것이다.
 
동학혁명이 일본군을 불러들인 측면도 있지만, 조선 정부의 무능이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무능했기 때문에 동학혁명이 아니라 다른 사건이 일어났대도 일본군이 욕심을 낼 만했던 것이다.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의 상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의 상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에 더해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이 있다. 두 건의 국제조약이 일본군 출병의 명분이 됐다. 하나는 1882년 체결된 조선과 일본의 제물포조약이다. 이 조약은 임오군란 때 일본인들과 일본공사관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약 제5조에서는 일본이 자국 공사관을 호위할 목적으로 병력을 파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것이 청일전쟁 때 일본이 상륙할 수 있게 된 한 가지 근거가 됐다.
 
또 하나는 1885년 체결된 청나라와 일본의 톈진조약(천진조약)이다. 정식 명칭은 중일천진회의전조(中日天津會議專條)다. 김옥균이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서 상호 충돌했다. 이로 인한 대립 상태를 정리할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 제3조는 아래와 같다.
 
"향후 조선국에서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발생하여 중·일 양국 혹은 일국이 군대를 파견할 경우에는 사전에 문서를 보내 통지하고, 사안이 종료되면 즉시 철수하고 계속 잔류하지 않는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근거로 한 주장이었다. 그런 청나라가 일본과의 톈진조약에서 일본의 조선 파병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면서, 어느 쪽이든지 조선에 출병할 때는 사전에 꼭 통지하자는 약속을 했다. 이것이 청일전쟁 때 일본이 상륙할 수 있도록 만든 또 다른 근거가 됐다.
 
1894년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톈진조약 제3조에 따라 청나라는 일본에 이 사실을 통지했다. 그러자 일본은 제물포조약 제5조를 근거로 공사관 및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파병을 결의했다.
 
일본 정부는 공사관 호위는 물론이고 청나라군과 전쟁을 벌이는 데 필요한 병력을 준비했다. 수 척의 군함과 300여 명의 선발대를 파견한 직후, 육군 제5사단을 중심으로 한 1개 혼성여단의 출병을 서두르는 방법으로 대규모 전쟁을 준비했다. 공사관 및 자국민 보호는 명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의 행동은 명백한 침략행위였지만, 일본 정부는 제물포조약과 톈진조약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일본이 대규모 군대를 보내도 된다는 조약은 없었지만, 조선 비상사태 때 공사관과 자국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조문이 일본의 행동에 힘을 실어줬다. 조선·청나라 두 정부의 외교적 부주의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1894년에 일본군을 불러들인 진짜 요인은 조선 정부의 무능과 더불어 조·청 두 정부의 외교상 부주의였다. 동학혁명을 빌미로 일본군이 들어왔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민중의 궐기는 외세 개입을 초래하는 우둔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외세를 불러들인 진짜 요인은 동학혁명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녹두꽃 동학혁명 동학농민전쟁 전봉준 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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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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