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어린 의뢰인> 메인포스터

영화 <어린 의뢰인> 메인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한국 영화 최초의 패러디 영화로 알려져 있는 <재밌는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 <약속>, <비트>, <주유소 습격사건> 등 당대 최고의 작품들을 활용해 웃음을 이끌어낸 작품이었다. 말 그대로 관객들을 작정하고 웃기고자 제작된 영화라고나 할까. 작품을 연출한 장규성 감독은 이후 <이장과 군수>, <여선생 VS 여제자>, <선생 김봉두> 등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코미디 세계를 선보였다. 그 중에서도 <선생 김봉두>는 아이들의 교육보다는 부모로부터 받는 촌지에 관심이 더 많은 불량 선생을 통해 코미디를 이끌어내는 작품으로 관객들의 사랑도 많이 받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감독은 코미디 장르에 대한 사랑으로 한때 '웃길 수만 있다면, 망가져도 좋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는데, 이는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로 유명한 김상진 감독의 영향이기도 했다. 장규성 감독이 장편 영화 데뷔 전 <돈을 갖고 튀어라>, <투캅스 3> 등의 작품을 그의 밑에서 조감독으로 함께 작업하며 친분을 쌓았기 때문. 두 감독 모두 코미디 장르의 연출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결을 함께하게 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장규성 감독의 신작 <어린 의뢰인>은 그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고려하면 다소 과감한 승부수처럼 보인다. 타이틀만 보더라도 그동안 그가 보여왔던 작품들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어린 의뢰인>은 지난 2013년에 있었던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 사건'은 의붓어머니 임씨가 의붓딸 A양(사망 당시 만 8세)을 때린 뒤 복통을 호소하는 데도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아 장간막 파열에 따른 복막염으로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일을 말한다. 그녀는 결국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게 되지만, 그 죄질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공분을 낳았다.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02.

영화 <어린 의뢰인>은 7살 친동생을 죽였다는 10살 소녀의 믿을 수 없는 자백으로 시작된다. 소녀가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변호사 정엽(이동휘 분)과 자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어른들을 의심하는 소녀 다빈(최명빈 분)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흐름이 방향을 바꿔가며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이와 더불어 어린 다빈이 어떤 이유로 어른들의 말을 믿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10살 소녀가 왜 동생을 죽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혀 나가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흐름이다.

정엽과 다빈, 두 사람의 사이에는 계모인 지숙(유선 분)이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상냥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집에서 아이들과 있을 때는 완전히 돌변해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이다. 하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크게 느껴왔던 다빈과 민준(이주원 분) 남매에게는 처음에 그 존재만으로도 행복한 대상이기도 하다. 진짜 엄마라고 생각했던 지숙이 본심을 드러내며 민준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하기 전까지. 폭력이 본격적으로 진행될수록 그녀의 행동은 점차 대담해지고 마지막에는 아이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일까지 저지른다. 대부분의 실화 모티브 영화가 그래왔듯이 이 작품 역시 드라마의 강화를 위해 약간의 변용을 활용하며 실제 사건과는 부분적 차이를 보이지만, 거의 유사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03.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제노비스 사건'으로 유명한 방관자 효과에 대한 이야기가 꽤 비중 있게 소개된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1964년 뉴욕의 한 공개된 장소에서 29세의 한 여인이 강도에게 살해당한 끔찍한 사건이다. 집으로 향하던 무방비 상태의 여인에게 가해진 폭행은 30분이 넘도록 오랜 시간 지속되었지만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살해 당한 뒤에 조사를 통해 알려진 사실은 그 폭행 사건을 목격하거나 구조 외침을 들은 사람의 숫자가 무려 38명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제노비스 사건은 조금 전 이야기했던 다빈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적 소재다. 사실 아동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그들을 구하기 위한 이들의 행동이 그려지는 기존의 유사 작품들과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폭력의 대상이 되는 소녀 다빈이 어느 지점까지 꽤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과 동생이 놓인 처지에 대해 주변 어른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한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경찰서를 찾아가 직접 신고하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하기도 한다. 집으로 아동보호 상담사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위기를 모면한 계모의 폭력과 주변 어른들의 소극적인 태도다. 절망적인 상황에 반복적으로 학습되는 다빈은 결국 마음을 닫는다. 영화 속의 진짜 방관자 효과다.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04.

그런 다빈에게 정엽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어른이다. 다른 어른들은 도와준다고 하고는 실제로 도와주지도 않고 다들 다빈이 틀렸다고만 하는데 정엽은 그렇지 않다. 정엽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적어도 다빈에게는 그렇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정엽이 다빈 남매를 만나게 된 건 구직 과정에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간 아동 복지 센터 때문이었으니까. 

정엽은 그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었고, 변호사 자격을 가진 자신이 현실적으로 그럴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다빈 남매가 정엽에게 가장 깊이 빠지게 되었을 때 서울의 유명 로펌으로부터 좋은 제안도 받게 된다. 물론 정엽 또한 다빈 남매가 마음에 걸린다. 단순히 그들이 불행해 보여서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 자신도 느끼지 못했던 엄마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결핍되어 있음을 공감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엄마의 사랑'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화두다. 정엽이 다른 어른들과 달리 방관자의 입장에서 벗어나게 되는 핵심적인 이유이며, 다빈과 정엽의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정 사건을 계기로 역할의 전환이 이루어진 정엽은 더 이상 단순히 조력자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도 엄마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며 항변하는 지숙의 반대편에서 자신도 직접 경험해 본 일은 없지만 다빈의 마음 속 빈 공간을 채워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랑이라는 건 이렇게 따뜻한 것임을 알려주고자 하는 존재가 된다. 정엽의 친누나인 미애(고수희 분)는 그 존재로서 더 현실적인 대상이 된다. 폭력으로부터 구출된 다빈이 미애, 진짜 어른의 품에 꼭 안겨 자신도 모르게 다행스러운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그녀의 몸을 감싸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녀는 이 장면에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지만 그 행동만으로도 그간 겪어야 했던 시간들의 고단함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05.

그 이후 결말로 향하는 극의 전개는 전형적인 편이다. 현행법 상 구속되기 전까지 살인범과 함께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살기 위한 선택을 위해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다빈의 처지가 설명되고 이해된다. 그리고 권선징악의 결말. 영화의 흐름 상 당연한 수순이다. 야광별이나 킹콩이와 같은 사물의 활용 역시 다소 고전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정해진 결말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을 이용했다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감정을 더욱 붙드는 부분도 분명히 있으니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다.

처음에 잠깐 언급했듯이, 영화 <어린 의뢰인>은 장규성 감독이 그동안 보여왔던 작품들과는 장르적으로 분명히 차이를 드러낸다. 어떤 지점에서는 그의 전작들에서 계승되는 부분도 있다. 인간 내면에 숨겨진 '죄책감'과 '반성', 그리고 '화해'와 같은 부분이다. <선생 김봉두>의 불량 교사 김봉두도, <여선생 VS 여제자>의 노처녀 여선생 여미옥도, <이장과 군수>의 두 사람도 모두, 장규성 감독님의 작품 속 인물들은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반성을 통해 화해의 결말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번 작품 속에서는 정엽이라는 인물이 그렇다. 순간의 선택으로 방관자가 되지만, 그는 소녀의 도움을 외면했던 다른 많은 어른과 달리 자신의 과거로부터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을 통해 나아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 속 이야기가 완전한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이, 지금도 어디선가는 또 다른 다빈 남매의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언젠가는 영화 속 아픔과 슬픔들이 아련한 곳에서만 존재하길 바라게 된다.
영화 무비 어린의뢰인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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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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