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심원들> 메인포스터 영화 <배심원들> 메인포스터

▲ 영화 <배심원들> 메인포스터영화 <배심원들> 메인포스터ⓒ CGV아트하우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지난 2008년 2월 12일 오전 10시 대구지법 11호 법정에서는 첫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참석한 배심원은 총 12명. 이 중 최종 배심원은 9명이었고 나머지 3명은 예비 배심원이었다. 이들은 모두 대구지법이 무작위로 통지한 관할 지역 내의 만 20세 이상 후보 주민 230명 가운데 법정에 나온 86명 중에서 선발되었다. 사법 사상 첫 국민참여재판이었으므로 판사와 검사, 변호인은 재판에 앞서 까다로울 수 있는 법률 용어를 재판 일정과 함께 비전문가인 배심원들에게 알기 쉽게 해설하기도 했다.

이날 재판이 진행된 사건은 피고인 이씨가 2007년 12월 집주인 할머니의 집에 셋방을 구하는 것처럼 위장해 들어가 금품을 뺏으려다 반항하는 할머니를 흉기로 위협하고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건. 피고인은 범행 이후 피해자 정씨 할머니를 병원으로 데려간 뒤 마을 주민을 통해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도록 한다. 공판에서 다툰 검사와 변호인간의 쟁점은 '치밀한 준비 끝에 저지른 범죄인가, 우발적인 범행인가'에 대한 문제와 '제3자를 통한 자수도 자수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배심원단은 피고인 이씨가 범행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피해자를 업고 병원까지 가는 과정에 자수 의사를 밝히는 등의 행위를 직접 하였으므로 자수를 한 경우에 해당하기에 이 사건이 강도상해죄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양형에 있어서는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낸다. 재판장(대구지법 제11형사부 부장판사)은 배심원단의 의견에 따라 이씨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8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하는 판결문을 낭독한다. 9시간이 넘는 긴 시간의 사법 첫 참여재판의 결과가 구속 기소된 피고인의 석방으로 끝이 난 것이다.

영화 <배심원들>은 대한민국 사법 사상 처음으로 열렸던 국민참여재판을 스크린으로 옮겨낸 작품이다. 극의 긴장감과 구성을 위해 일정 부분 재해석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홍승완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당시의 분위기와 재판 현장을 현실감 있게 그리기 위해 사전 취재와 조사 과정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 작품의 다루는 소재가 현실에 실재했던 사건이기도 하고 사법 역사상 중요한 기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기에 핵심이 사실성에 있다고 본 것이다.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인을 재판장 앞에 앉지 않도록 하는 자리 배치와 검사석 왼쪽에 배심원석을 배치하는 실제 국민참여재판 법정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 것 역시 그 의미와 무게를 스크린에 그대로 담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CGV아트하우스


02.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실제 국민참여재판 내용은 영화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다. 선발된 배심원단의 수도 차이가 있고, 피고인이 저지른 범행의 종류도 다르다. 극의 재구성을 위한 허용 가능한 범위의 변용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여전히 국민이 참여하는 역사상 최초의 재판, 대한민국 사법 사상 첫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그려낸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의 죄를 심판해야 하는 배심원단과 사상 처음으로 일반인들과 함께 재판을 진행해야만 하는 재판부. 이는 분명히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며 모두가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영화 <배심원들>은 사건의 경과를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는 구성의 작품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건의 진행 방향에 따라서 흐름을 그대로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화가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몰랐던 배심원들이 누군가를 처벌하는 일의 무게에 대해 깨달으며 성장해 나가는 모습과 각 상황마다 주어지는 다양한 쟁점의 제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배심원들이 너무 어수룩하게 그려진다는 점과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그것이 인물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반인이 법리적 쟁점이나 용어를 잘 알지 못하는 것과 어수룩한 행동을 보이는 것에는 분명 의미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 사건에서 일반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인들이 직접 해설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연출이 다분히 의도적임을 알 수 있다.

03.

이 영화에서 배심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역설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있다. 처음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사건은 피고인(서현우 분)의 유죄/무죄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유죄가 인정되는 상황에서의 형량에 대한 것이었다. 다만, 재판이 진행되던 중 피고인이 자신의 혐의를 갑자기 부인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다. 배심원들 입장에서는 태어나 처음 참석한 재판에서 이미 유죄를 가정하고 진행되던 상황이 갑자기 무죄를 추정해야 것으로 급격하게 변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인지 능력을 갑자기 전혀 반대의 상황으로 바꿔 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유죄였던 사실이 무죄가 되려면 이를 납득시킬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법인데, 극 중 검찰 윗선에서부터 재판부까지 이 사건을 확대하거나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

영화 속에서 8번 배심원인 남우(박형식 분)에게 주어진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법한 수준의 합리적 판단과 정확하고 공정한 판단 사이에 위치한 현재의 사건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인물이다. 또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말 그대로 피고인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제로 베이스에 근거하여 무죄의 가능성을 찾는 일부터 시작하게 만든다. 이는 제도적 필요에 의해 모인 배심원들이 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체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또한 동시에 배심원이라는 역할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일당 10만 원 어치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과 사회를 위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것임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CGV아트하우스


04.

그 외에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8명의 배심원들은 원 배심원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기라도 하듯이 - 배심원은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해당 지방법원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주민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다. – 각기 모두 다른 성격과 정체성, 역할을 부여 받으며 영화가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 중에서도 중반부에서 이탈하게 되는 6번 배심원 장기백(김홍파 분)은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중요한 물음을 남기는 인물이다.

그는 시신 세정사로 근속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보다 시신의 상태나 사후 경직 정도 등의 판단에 밝다. 하지만 사건의 기존 증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뒤에 의사나 법의학자로서의 면허를 소지하고 있느냐는, 의문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격의 문제로 인해 불이익을 받게 된다. 유사 필드에서의 경험과 문서화된 자격의 경계에 대한 물음이 잘 표현된 장면이다.

그 외에도 4번 배심원인 상미(서정연 분)는 투표 권리를 최대한 연장하거나 미루는 행위에 대해 이미 선택을 한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논거로 피고인 유죄와 무죄 사이에서의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5번 배심원인 영재(조한철 분)는 남우가 어떻게든 피고인이 무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자 기존의 논거들을 갖고 그 행위를 불식시키고자 시도하기도 한다.

이들의 행동은 모두 피고인에 대한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처음에 자신이 세운 원칙 및 정의를 도중에 변경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 이상의 것을 책임지지 않겠다는 심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영화의 초반부, 재판장인 김준겸(문소리 분)이 배심원 선정 도중 내뱉는 대사와 정확히 부딪히며 관객들이 어떤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무 기준도 없이 사람을 처벌하면 되겠어요. 억울하게 누명을 쓸 수도 있는데."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CGV아트하우스

 
05.

모든 일이 원칙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 영화에서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포인트이기에 작품을 살펴보는 데 있어 그 문제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이 영화 <배심원들>에서는 정보의 불균형, 그러니까 피고인 스스로가 자신이 연루된 사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점과 재판부와 배심원단이 갖고 있는 질적·양적 정보의 차이, 그리고 남우가 다른 배심원들과 달리 재판 전에 피고인을 만나게 되면서 발생하는 차이 등이 영화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일부 요소는 인물의 특정 행동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극의 설정 속에서 유도된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극의 허용 범위 속에서 인정될만한 정도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때 그가 소년원 출신의 폭력전과 5범이라는 이유로 그 주장을 의심받거나, 피고인의 딸인 소라(심달기 분)가 아버지의 무죄를 변호하자 학생이 염색이나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말의 신빙성부터 의심하는 모습 역시 또 하나의 생각할 지점이다. 정황상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고 인정이 된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판단을 앞둔 자리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합리적 의심이 아닌 편견에서 기인한 견해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정보의 불균형과 편견에서 기인한 문제의 발생은 각각의 내러티브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요소로 활용된다. 그리고, 이 문제의 적극적 극복 및 문제 해결 과정을 통해 배심원들의 성장이 도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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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배심원들> 스틸컷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CGV아트하우스


06.

영화를 연출한 홍승완 감독은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실제 사건을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시킨 이유로 현실의 삶을 담아내고 조금 더 보편적인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긴 했으나 피고인의 사연이 기구하여 함부로 손가락질할 수 없는 사건을 고르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논란이 됐던 재판 500여 건의 판결문을 찾아 읽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 속 배심원들은 원 사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일 것이다. 다만 타인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배심원이라는 역할 앞에서 고민하고 그 책임을 체득해 나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건 감독의 깊은 고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재판장 김준겸의 선고. 그는 윗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또 특정한 결론을 지어 모든 것을 끝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틀을 깨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다. 누구도 경험한 바 없는 새로운 형식의 재판 배심원제를 경험하는 재판장 김준겸의 모습은 이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 경계에서 흔들리는, 수많은 유혹 앞에서 나약해지는 우리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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