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ever it takes. (모든 것을 걸고)"

최근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 게임>의 명대사다. 어벤져스의 히어로들이 '모든 것을 걸고' 우주를 구한다면,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인생을 구하려는 이가 있다. 프로 복서 장인수. 이제 막 소년에서 남자가 된 그를 만났다.   

창살 없는 감옥
 
장인수 선수는 일요일 저녁이면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복통 때문이다. 그 습관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면 학창시절의 악몽 같은 기억이 있다.

"세상에서 월요일이 제일 싫었어요. 악몽이 시작되니까요. 흔한 말로 빵 셔틀이죠. 그나마 할머니한테 돈이라도 받는 날에는 일진들한테 먹을 거 사다 주고. 돈이 아예 없는 날에는 이리저리 발로 차이고, 식판은 뒤집혀 있고. 가방에 우유를 넣어놓고 일부러 발로 밟아 교과서를 망가뜨려 놓을 때도 있었어요." (장인수 선수)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시작된 따돌림.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이 이혼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입학했던 것.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브랜드 옷보다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다녔던 것밖에. 창살 없는 감옥. 어려운 형편에 늘 손자 걱정인 할머니에게 힘든 것을 티 낼 수도 없었다. 소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맨주먹뿐인 소년은 복싱으로 인생 대역전의 드라마를 쓰는 중이다.

맨주먹뿐인 소년은 복싱으로 인생 대역전의 드라마를 쓰는 중이다. ⓒ 박송원


빵셔틀 소년, 전설의 복싱장에 발을 들이다
 
중학교 1학년. 따돌림은 여전했고, 점차 심해졌다. 지긋지긋하고 비루한 인생을 끝내고 싶었다. 어느 날이었다. 밧줄을 들고 산에 올라가서 목을 매려고 했다. 할머니 얼굴이 아른거렸다. 산에서 내려오며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살고 싶다.'

"아버지한테 바로 전화했어요. 복싱을 끊어달라고 했죠." (장인수 선수)

어리둥절해 하던 아버지도 단호한 그의 결심을 믿어줬다. 미안함만 가득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렇게 우연이 닿은 곳이 김광수 관장이 운영하는 현대권투체육관(인천 남구 삼산동)이었다.

김광수 관장은 장인수 선수와의 첫 만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인수의 눈빛에서 만연한 두려움, 좌절, 포기의 모습을요." (김광수 관장)

그는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사실 김광수 관장은 왕년의 전설적 트레이너로 세계 챔피언을 2명이나 배출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절망에서 허우적대는 소년의 구원자였다. 복싱 스타, 인생 역전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내일을 위한 삶' 그에게 복싱이 그렇게 정의된 이후, 단 한 번도 쉬운 마음으로 링 위를 올라간 적이 없다. 장 선수에게는 매일매일이 정글이다

'내일을 위한 삶' 그에게 복싱이 그렇게 정의된 이후, 단 한 번도 쉬운 마음으로 링 위를 올라간 적이 없다. 장 선수에게는 매일매일이 정글이다 ⓒ 박송원


하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김광수 관장의 큰 그림과 달리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장인수 선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복싱장은 그저 도피처. 결과는 처참했다. 아마추어 대회, 5전 전패. 김광수 관장은 소년을 모질게 내쳤다.   
"맹수는 새끼를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고 해요. 살아남을 놈만 살아남는 거죠. 그게 세상이에요. 쟤(장인수 선수)는 복싱장을 놀러 왔어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성공할 수 없어요.

저는 기술이 아니라 싸움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승부를 좌우하는 건 이기고 싶다는 열망이죠. 제가 키워줄 수 있는 게 아니예요. 투지가 없으면 복싱이건 인생이건 성공할 수 없어요." (김광수 관장) 


장인수 선수는 당시 자신에게만 불같이 화내는 관장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복싱을 그만두고 아픈 할머니 병원비에 신문도 돌리고, 다양한 알바를 하면서 지냈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가정형편, 앞이 캄캄했다. 1년 반이 흘렀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으며 우울증이 찾아왔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표현이 맞을까요. 사실 그때까지 저한테는 오늘밖에 없던 것 같아요. 누군가 꿈을 물어보고, 내일을 물어보면 너무 막막해서 화가 났죠." (장인수 선수)

깊은 절망 속에 떠오른 건 오로지 복싱뿐이었다. 유일한 행복했던 기억, 발걸음이 닿은 곳, 복싱장을 찾아갔다. 김 관장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장인수 선수를 내보내고 동네 사람들과 신부님으로부터 계속 소식을 듣고 있었다고 했다. 

"복싱장 앞에 인수가 앉아있더라고요. 쭈뼛쭈뼛 오더니 다시 등록해도 되냐고. 별말 안 했죠.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회비 얼마냐고 묻는데. 참." (김광수 관장)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밥이나 사 먹고 빨리 들어오라고 어깨를 툭툭 쳤다.
 
7전 8기, '복싱'으로 인생을 그리다   
 
 김광수 감독은 장인수 선수의 첫 눈빛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바닥 끝까지 내려가 본 자만이 다시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김광수 감독은 장인수 선수의 첫 눈빛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바닥 끝까지 내려가 본 자만이 다시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 박송원


강도 높은 훈련이 시작됐다.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제 그가 마주한 건 인생이다. '내일을 위한 삶'이 시작됐다.

어려움도 찾아왔다. 배민철 선수를 상대로 5회 KO패를 당하기도 했다. 펀치의 강도도 달랐고, 위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표가 있는 한 실패는 자양분일 뿐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경험으로 터득한 것. 패배 이상의 성과다.  
김광수 관장은 장인수 선수의 미래 가능성을 더 높게 친다. 복싱 지능이 높아서다. 복싱 지능은 경기를 스스로 읽어가면서 풀어내는 능력으로, A급 복서가 되었을 때 긴 라운드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 라운드 후반으로 갈수록 스펀지처럼 상대방의 움직임을 흡수해 상대를 강하게 압박한다. 그의 선배들인 최희용, 장정구처럼.

땀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결국 배틀로얄2(신인왕전)에서 손목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해 승리를 거뒀다. 신인왕이 탄생했다. 인생 역전 드라마, 성공의 희망이 보였다.  

신인왕 장인수 복서, 6월 25일 도쿄대전
 
 한일루키전. 2019년 6월 25일 도쿄 고라쿠엔홀에서 도쿄대전이 열린다. 배수진을 치고 인생성공의 걸음을 내딛는다. 사진은 경기포스터 아랫줄 첫번째가 장인수 선수, 네번째가 이번에 장인수 선수와 대적하는 다카야마 스즈미 선수다.

한일루키전. 2019년 6월 25일 도쿄 고라쿠엔홀에서 도쿄대전이 열린다. 배수진을 치고 인생성공의 걸음을 내딛는다. 사진은 경기포스터 아랫줄 첫번째가 장인수 선수, 네번째가 이번에 장인수 선수와 대적하는 다카야마 스즈미 선수다. ⓒ 박송원


다음 경기는 6월 25일 도쿄 고라쿠엔홀에서 열리는 한일루키교류전이다. 현재 세계 복싱의 심장(경량급)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다. 장인수 선수의 기량을 본 일본 프로모터가 복싱협회(KBM)로 연락을 해왔다. 

상대 선수인 다카야마 스즈미는 일본의 명문 체육관 집안 출신으로 아마추어 전적 51전 35승 17패 10KO다.(프로 데뷔 국제전 6라운드 태국 선수에 3회 KO승) 매우 강력한 상대이기에 일각에서 '승리는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집념은 두려움보다 크다. 장인수 선수는 도쿄대전을 도쿄대첩으로 만들 것이라고 확신해 보였다.

"저, 장인수는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감이 없고 꿈이 없는 친구들의 전형입니다. '헬조선'이라고 외치며 포기를 강요당하는 세상에 맨주먹을 날려보겠습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복싱 챔피언을 넘어 인생 챔피언이 되고 싶습니다." (장인수 선수)  

현재 한국 프로복싱 시장은 처참할 수준으로 오랜 기간 침체에 빠져있다. 국내에서 프로복싱 선수를 한다고 하면 바보 소리 듣기 딱 좋다. 하지만 사제지간보다 부자지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두 남자는 세상의 비난과 무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적을 만드는 중이다. 
 
 사제지간보다 부자지간이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리는 환상의 콤비는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써가는 중이다.

사제지간보다 부자지간이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리는 환상의 콤비는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써가는 중이다. ⓒ 박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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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글은 박송원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songwon.me/boxing)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장인수 김광수 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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