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몽>의 이영진(이요원 분)과 김원봉(유지태 분).

드라마 <이몽>의 이영진(이요원 분)과 김원봉(유지태 분).ⓒ MBC

 
MBC 드라마 <이몽>에는 의열단장 김원봉(유지태 분)과 '독립국가를 위해 투쟁한다'는 목표는 같지만, 어떤 독립국가를 세울 것인가에서는 입장이 다른 이영진(이요원 분)이 장한다. 일본군 장교인 양아버지의 지원 하에 의사로 성장한 이영진은 백범 김구(유하복 분)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비밀 요원으로 우파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이몽>은 그런 이영진이 좌파 독립운동 노선을 걷는 김원봉과 얽히면서 생겨나는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김원봉과 이영진이 이몽(異夢)을 꿈꾸는 사이라는 점은, 지난 25일 방송된 13회에도 잘 나타났다. 러시아 공산당이 제공해준 독립운동자금 일부를 찾고자 대륙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파트너십을 구축하게 된 두 사람이 서울(경성)의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나눈 대화 속에서 그 점이 언급됐다.

이영진: 제가 도울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김원봉: 김구 선생이 그러던데, 의열단과 애국단은 가는 길이 다르다던데.
이영진: 결국 한 곳에서 만나지 않을까요?
김원봉: 글쎄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백범 김구(왼쪽, 유하복 분)와 비밀 접촉하는 이영진.

백범 김구(왼쪽, 유하복 분)와 비밀 접촉하는 이영진.ⓒ MBC

 
<이몽>은 '다른 꿈을 꾸는 우파 독립투사 이영진과의 파트너십'이라는 가상의 설정 하에 전설적 독립투사 김원봉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김원봉의 삶에는 이몽이 아닌 동몽(同夢)을 꾼 여성과 파트너십을 구축한 시기가 있었다. 은근히 경계심을 느끼게 만드는 이영진 같은 여성이 아닌, 경계심을 느낄 필요 없이 민족해방을 위해 협력하기만 하면 되는 여성과의 파트너십. 그 기간은 실제 김원봉의 인생에 약 13년간 있었다.

김원봉에겐 '동몽'을 꾼 아내가 있었다  

경남 밀양 출신인 김원봉(1898~1958년)과 동몽을 꿈꾼 여성은 부산(동래) 출신 독립투사인 박차정(1910~1944년) 의사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 김원봉의 동반자였던 박차정은 김원봉을 만나기 전인 10대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한 열혈 투사였다.
 
박차정은 국권 상실이 있었던 1910년에 출생했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열네 살 때부터. 집안 사람들도 그의 의식에 영향을 줬지만, 아홉 살 때인 1919년 벌어진 3·1운동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볼 수 있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 일신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근우회는 좌우 합작으로 이뤄진 대표적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자매단체였다. 19세 때인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이 된 박차정은 그해에 아래와 같은 활동에 참여했다. 위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 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 파업 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피체된 그녀는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박차정.

박차정.ⓒ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함께하던 박차정은 보석(보증 석방)으로 석방된 뒤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것이 김원봉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이몽이 아닌 동몽을 함께 꾸게 될 두 사람이 중국에서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됐던 것이다. 의열단원인 오빠가 그 인연을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강대민 경성대 교수의 논문 '박차정, 민족해방운동의 여성 투사'는 그 과정을 이렇게 소개한다.
 
"두 차례에 걸친 구금과 고문으로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박차정은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북경으로 탈출한다. 박문호는 당시 의열단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중앙위원으로, 1929년 10월에 조직된 이 동맹의 7인 중앙위원 명단에 박차정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에는 박차정이 국내 활동에 전념하던 시기였고, 중국에 도착해 의열단에 합류한 것은 1930년 3~4월경이다."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2006년 발행한 <내일을 여는 역사> 제23호.
 
중국 망명 이전부터 이미 명의상으로나마 박차정이 김원봉과 뜻을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차정의 의열단 합류로부터 두 사람의 결혼까지는 약 1년이 걸렸다. 위 논문의 이어지는 부분이다.
 
"(의열단에 합류한) 그는 당시 김원봉의 주도 하에 설립된 레닌주의 정치학교의 운영과 교육에 깊이 관여했으며, 결국 1931년 3월에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을 하게 된다."

신혼의 단꿈이 허락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부부 
 
혼인 당시 박차정은 21세, 김원봉은 33세였다. 개띠 띠동갑인 두 사람은 신혼의 단꿈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박차정도, 김원봉도 독립운동으로 '허니문'을 대신해야 했다. 무장 독립투쟁을 이끄는 김원봉은 물론이고, 박차정도 아내로서보다는 독립투사의 삶을 사는 데 주력했다.
 
박차정은 의열단이 양자강 연변의 난징(남경) 교외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했다. 또 난징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연합체인 민족혁명당의 부녀부 주임으로 활동하고,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해 독립투사 가족들의 단결을 도모했다. 또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대(對)일본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시 선전 활동에 참여했다. 1938년에는 독립군 부대인 조선의용대 내에서 부녀복무단을 조직했다.
 
유명 독립운동 지도자의 아내라고 해서 편하고 안전한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위험한 일에도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일본군과의 전투에도 직접 참여했다. 1939년 2월에는 장시성(강서성) 쿤룬산(곤륜산)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당했다.
 
결국 그 후유증을 견디다 못해 1944년 5월 27일 충칭(중경)에서 눈을 감았다. 34세 때의 일이다. 일제 패망 1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안타까운 순국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의 김원봉, 드라마보다 조금은 행복했기를 
 
독립운동가들이 분열을 보인 이유 중 하나는 경제 체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김에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부조리한 경제체제'도 함께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경제 체제보다는 민족 독립에 올인해야 한다고 생각한 부류가 있었다.
 
김원봉은 전자의 입장, 김구는 후자의 입장이었다.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목표는 같았지만 '어떤 독립국가를 세워야 하는가' 하는 면에서 입장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드라마 <이몽>이 말하는 '서로 다른 꿈을 꾼 사람들'이었다.
 
박차정은 김원봉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김원봉과 동몽을 꾸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원봉은 박차정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방을 내심 경계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드라마 <이몽>의 김원봉이 이영진과 협력하면서도 속으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몽>의 김원봉은 이영진 앞에서 "글쎄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김원봉은 확신을 갖고 박차정과 손을 잡을 수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꿈마저도 같은 것을 꾸는 완벽한 파트너와 함께한다는 사실에 가슴 깊은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몽> 속의 김원봉보다 실제의 김원봉이 조금은 더 행복한 남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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