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덕미에게 삶의 에너지원이다. 하지만, 검은색 옷과 마스크로 꽁꽁감쌀만큼 덕질하는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

덕질은 덕미에게 삶의 에너지원이다. 하지만, 검은색 옷과 마스크로 꽁꽁감쌀만큼 덕질하는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 tvN

 
사실 나는 덕후가 '오빠부대'로 불리던 시절부터 덕후였다. 잠시 덕질을 쉰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덕질은 내게 삶의 각종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최고의 처방전이었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몇 명을 빼고는 나의 덕질에 대해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의 취향이며 다양하게 삶을 즐기는 방식 중 하나라고 자부하지만, 덕질에 대한 편견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내게 두려운 일이다.  

이 때문일까. 종영을 앞둔 tvN 수목드라마 <그녀의 사생활>은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인 드라마였다. 덕질을 해 본 이라면 '백퍼공감'할 덕미(박민영)의 마음에 내 마음을 비춰보며 빠져들었다. 처음엔 덕후의 마음만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이 드라마 자체가 내뿜는 어떤 매력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졌다. 종영을 불과 며칠 앞둔 지금 지난 스토리를 돌아보니 그 매력의 실체가 느껴졌다. 그건 바로 나와 너, 우리의 마음과 취향을 존중하는 시선이었다.  

'타인의 취향'을 평가하지 않기
 
 라이언은 덕미의 덕질까지도 편견없는 시선으로 존중해준다.

라이언은 덕미의 덕질까지도 편견없는 시선으로 존중해준다.ⓒ tvN


드라마의 큰 줄기는 덕질보다는 덕미(박민영)와 라이언 골드(김재욱)의 연애다. 이 둘의 연애는 가짜연애에서 진짜연애로 그리고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해간다. 가짜연애 단계에서 이들은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만 신경 쓸 뿐, 자신의 감정과 상대방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가짜 연애를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연 이들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특히 라이언은 덕미가 '시나길'(시안은나의길, 극중 아이돌인 차시안의 팬)임을 눈치 챈 후 '라떼'라는 이름으로 시나길의 카페에 가입하고, 이를 통해 덕미의 사생활을 알아간다.

하지만 라이언은 덕미의 덕질을 평가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덕미의 취향을 존중해주고, '시나길'임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덕미의 마음까지 헤아려 준다. 7회 방송분에서는 팬 사인회에 간 덕미가 자신의 정체를 들킬 뻔 하자, 라이언이 도와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라이언의 배려는 '타인의 취향'을 비평가적으로 존중해주는 모습이었다.

'진짜 연애'를 시작한 후 라이언이 자신의 정체에 알고 있었음이 밝혀진 11회에 덕미는 "놀라지 않았냐", "화나지 않았냐"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라이언은 "조금 놀랐고 조금 화가 났지만 싫진 않았어요. 덕미씨를 더 잘 알게 됐으니까"라고 답한다. 관심을 갖고 알고자 하는 라이언의 마음을 알게 된 덕미는 마음의 문을 더욱 활짝 열게 된다. 이런 덕미에게 라이언 역시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며 둘은 '성장하는' 진실한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라이언의 존중하는 자세는 둘의 관계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타인의 취향'에 대한 존중은 실은 연인 관계만이 아닌 모든 관계에서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다른 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취향이 나와 다르더라도, 일단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알아가고자 한다면 "놀라거나 화낼" 일은 없어질 테니 말이다.

여성들의 진실한 우정
 
 덕미와 선주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진실한 우정을 나눈다.

덕미와 선주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진실한 우정을 나눈다.ⓒ tvN


드라마에서 양념 역할을 한 덕미와 선주(박진주)의 우정도 상호 존중하는 태도의 본보기였다. 서로를 '덕질 메이트'라고 부르는 덕미와 선주는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해준다. 덕미는 출근길과 퇴근길에 선주가 운영하는 커피숍에 들러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과 생각을 모두 털어 놓는다.

선주 역시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진 소소한 일들을 덕미에게 이야기하며 마음을 나눈다. 이들은 6회 "너 진짜 좋아하는 구나. 반짝반짝 빛나서. 나도 내가 좋아하는 거 할 땐 반짝반짝 빛났었는데"라는 선주의 대사처럼 눈빛만 보고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준다.

물론, 둘이 한 대화의 내용의 비밀은 반드시 지켜진다. 때로는 날카로운 조언도 주고받지만,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때로는 침묵으로 곁에 있어주는 둘의 우정은 한때 라이언이 '퀴어'로 오해했을 만큼 끈끈하다. 이들 우정의 핵심은 수평적 관계다. 둘은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에 따라 서로를 위계 짓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과 한 사람으로 교류할 뿐이며 보다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포장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런 '평등한' 여성들의 우정은 최근의 여러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로 등장해왔다. 지난 3월 종영한 <눈이 부시게>에서도 할머니가 된 혜자(김혜자)와 그녀의 젊은 친구들은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덕미와 선주가 그랬듯, 드라마 속 많은 여성캐릭터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평등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의미를 알아간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

드라마 속 인물들은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존중한다. 특히, 덕미와 가족 같은 친구인 은기(안보현)는 자기 존중의 본보기였다. 은기는 덕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회피하지 않고 맞닥뜨리며 스스로 그 마음을 인정해준다. 그리고 11회 용기를 내 덕미에게 마음을 표현한다. 라이언과 덕미가 연인 사이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이런 고백을 했다는 건 매우 큰 용기를 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기는 덕미가 소중하듯, 자기 자신이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고 표현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고백 후 덕미와 은기는 잠시 동안 불편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은기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13회에 덕미에게 "난 그냥 니가 웃는 게 좋아.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더라도 덕질을 하든, 다른 사람이 옆에 있든 니가 행복하고 웃고 있으면 그게 젤 좋은 거더라구"라고 이야기 한다. 은기는 이처럼 자신의 감정은 존중하되, 덕미에게 '관계'는 강요하지 않는, 자신과 타인을 모두 존중하는 태도를 취한다.

은기의 이런 마음을 알게 된 덕미는 눈가가 촉촉해진 채 '오래된 친구' 은기가 돌아왔음을 환영해준다. 아마 둘의 우정은 이전보다 더 솔직하고 힘이 되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tvN 수목드라마 <그녀의 사생활> 속 신디(김효진, 김보라분)

tvN 수목드라마 <그녀의 사생활> 속 신디(김효진, 김보라분)ⓒ tvN


"어머니는 왜 안 물어보세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12회 신디(김보라)가 어머니 엄소혜(김선영)에게 건넨 이 대사는 어쩌면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한다면, 내 방식으로 상대방의 취향을 판단하지는 말자고,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물어보고 알아가지 위해 노력해보자고 말이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되면 이해와 존중은 따라오게 될 것이다. 혹시 지금 "내가 내 딸에 대해 모르는 게 뭐가 있지?"라는 엄소혜의 자기중심적 시각으로 나의 가족, 친구, 이웃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딘지 뜨끔한 느낌이 든다. 관심을 가지고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존중하고 좋아하게 된다. 나태주 시인도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덧)
"덕밍아웃 하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

덕미가 처음 자신의 방을 라이언에게 공개하는 날 했던 말이다. 이 말에 나도 덕밍아웃을 하고 후련해질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다. 하지만, 40대 아줌마의 덕질을 곱게 봐줄 것 같지 않아, 난 여전히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덕후가 자신이 덕후라는 사실을 숨긴 채 일반인처럼 행동하는 것)'중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덕질은 하나의 취미생활 정도다.

이 정도도 밝히는 게 이리 어려운데 자신의 정체감과 관련된 것들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자신의 정체성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아마도 일코 정도의 불편이 아닐 것이다. 일코가 필요없는 세상, 그러니까 모두가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평가받지 않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지 잠시 상상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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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하며 평등과 생명존중을 담은 글을 쓰고 소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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