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잘 알다시피 '시작이 반이다' 혹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단 시작하면 일은 순조롭게 풀린다는데 정말 그럴까요? 심리학에 이와 관련된 이론이 있습니다. '작동흥분이론(Work Excitement Theory)'이라고 부르는데요. 독일의 정신과 의사 에밀 크레펠린이 주창한 이론입니다.

크레펠린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일을 착수(着手)하기만 해도 의욕이 생긴다고 합니다. 뇌에서 보상을 담당하는 측좌핵 부위가 흥분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일을 멈추려고 해도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이를 멈추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2.

'의욕이 없어 일을 시작도 못 한다'가 아니라 거꾸로 '일을 시작하면 의욕이 생긴다'의 역발상입니다. 크레펠린의 이 '작동흥분이론'은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을 연상시킵니다. 제임스이론이 뭐냐고요? '우리는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즐거워진다'는 겁니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슬플 때, 억지로라도 웃으면 우리 뇌는 이것을 우리가 즐거워한다고 착각한다는 겁니다. 웃음 치료가 어느 정도 과학적 타당성이 있다는 소리죠.

3.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크레펠린의 말처럼 일을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멈추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은 왜 나왔을까요? 일을 끈기 있게 지속하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다는 거지요.

그래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자', '의지가 굳으면 마침내 일은 이루어진다(有志者事竟成)'는 말들이 나온 것이겠지요.

4.

숀 펜이 연출하고 연기파 배우 잭 니콜슨이 주연한 영화 <써스펙트>(2001)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입니다. 베테랑 형사 제리(잭 니콜슨 분)은 은퇴를 몇 시간 앞둔 시점에 연쇄살인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써스펙트> 스틸컷

<써스펙트> 스틸컷 ⓒ Morgan Creek Entertainme

 
그냥 집으로 돌아가 쉬라는 상관의 지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리는 사건현장으로 출동합니다. 어린 소녀를 성폭행한 후 잔인하게 살해한 엽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붙잡힌 살해 용의자는 범행을 자백하자마자 경찰의 총을 빼앗아 자살하고 맙니다.

백전노장 민완 형사답게 제리는 직감적으로 죽은 범인이 진범이 아니라는 확신을 합니다. 그리고 은퇴한 몸인데 불구하고 홀로 수사에 나섭니다. 일 중독에 걸려 두 번이나 이혼을 당하고 홀로 살아온 제리. 그는 살해된 소녀의 엄마에게 "범인을 꼭 잡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를 기필코 지키리라 다짐합니다.

제리 앞에는 이중의 과제(dual task)가 펼쳐졌습니다. 그에게 단란한 가정을 파괴한 연쇄 살인범을 잡는 일(외적 과제)은, 일 때문에 깨어진 자신의 가정을 복구하는 일(내적 과제)과 심리적으로 등가물(等價物)입니다. 당연하게도 제리는 과제해결을 위해 집요할 정도로 고군분투합니다.

5.

1930년생. 올해로 우리 나이 90세가 된 명감독이자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직접 감독하고 주연까지 맡은 영화 <라스트 미션>(2019).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평생 꽃 농사에 미쳐 가정을 등한시한 한 노인의 말년을 다룹니다.

한국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주인공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은 원예 관련 행사에 참석하느라 딸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합니다. 이런 아빠를 딸 아이리스(알리슨 이스트우드 분)가 좋아할 리가 없지요. 아버지를 원수처럼 대합니다. 일에 미쳐 아내에게 이혼당한 건 <써스펙트>의 제리 형사와 비슷합니다.

원예계의 대부로 잘 나가던 스톤도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합니다. 최신 원예 공법과 인터넷 판매에 밀려 스톤의 꽃 농장은 파산합니다. 화려한 시절은 막을 내리고 손녀의 약혼식장에 나타난 '돌아온 탕자'와 같은 스톤을 반갑게 맞이하는 건 손녀 지니(테이사 파미가 분) 뿐입니다.

가족들에게도 푸대접을 받는 스톤에게 낯선 사람이 접근합니다. 자신들의 물건을 잘 전달해주기만 하면 고액의 배달료를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입니다. 스톤은 평생 무사고였거든요. 파산하여 궁핍한 처지인 데다가 사랑하는 손녀의 결혼식 비용을 대고 싶은 욕심에 스톤은 앞뒤 잴 것도 없이 그 제안을 냉큼 수락합니다.

제리 형사처럼 스톤에게도 역시 깨어진 가정도 회복하고, 무너진 일터도 복구해야 하는 이중 과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생긴 거액은 손녀의 결혼식 비용으로, 그리고 퇴역군인들의 모임터인 재향군인회관의 재건립 비용 등으로 잘 사용됩니다.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한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린 스톤. 그는 자신이 배달하는 물품이 마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내친걸음입니다. 스톤은 자신의 이중과제를 해결하는데 마약을 운반하고 받은 검은돈을 활용합니다. 하지만 돈을 흥청망청 탕진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6.

"비유컨대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의 흙을 더 붓지 않아 산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도 내가 그만두는 것이다. 비유컨대 산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한 삼태기의 흙을 쏟아붓고 나아가는 것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蕢 進吾往也)" (<論語>〈子罕〉)

<논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공자가 '덕(德)을 쌓아 인(仁)을 이루는 일을 산을 쌓는 위산(為山)에 비유'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생활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흙을 쌓아 산 모양을 만들 때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란다면 제대로 된 산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곳에 마지막 한 삼태기 분량의 흙을 갖다 부어 제대로 된 산모양을 만드느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거꾸로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 때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마지막 한 삼태기 흙을 갖다 부어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이 결단을 내려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무슨 일을 하든지 '열렬한(誠)' 마음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애쓰는(文)' 모습이 바람직할뿐더러 아름답다는 말이겠지요. 

(이상 이한우(Hanwoo Lee) <논어로 논어를 풀다> 408~409쪽 및 650~651쪽 참조)

이를 사람들은 공자가 이런 열렬하게 애쓰는 마음을 '산을 만들고 평지를 만드는 일'에 비유했다면 맹자는 이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합니다. 물론 완전히 동일한 맥락입니다.

'뭔가 뜻을 갖고서 행하는 자는 비유하자면 마치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까지 팠으나 샘이 솟아나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파지 않으면 이는 버려진 폐정이 되는 셈이다(有爲者辟若掘井 掘井九軔 而不及泉 猶爲棄井也).'(<孟子>〈盡心章句上〉)

(이상 번역 이한우 <논어로 맹자를 읽다> 917쪽 참조)

그런데 이렇게 어떤 일을 행할 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를, 산을 만들고[為山] 우물을 파는[掘井] 일에 비유한 것은 <논어>나 <맹자>보다 <서경>에 먼저 나옵니다.

'흙을 가져다가 아홉 길의 높은 산을 만들다가,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만 갖다 부으면 완성될 것을 방심하여 이를 행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일이 모두 한 삼태기 흙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다(爲山九仞, 功虧一簣).'(<書經>(서경)〈旅獒〉)

7.

제리 형사는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 용의자가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여인 로리의 어린 딸 크리시에게 접근하자 그를 잡기 위해 지역 경찰과 특수기동대의 도움을 받아 잠복근무를 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끝내 현장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로리는 제리의 진심은 모른 채, 제리가 자신의 딸 크리시를 미끼 삼아 범인을 유인하려 했다며 제리를 떠나 버립니다. 동료 경찰관과 기동대원들도 제리를 외면하고 떠나 버립니다.
 
 <써스펙트> 스틸컷

<써스펙트> 스틸컷 ⓒ Morgan Creek Entertainme

 
영화는 결말 부분에서 연쇄살인범이 범행 현장으로 오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더라면 제리의 추측대로 연쇄살인범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을 것입니다.

제리는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지만, 그는 어쨌거나 크리시를 범죄로부터 지킴으로써 로리의 가정을 지키게 되었고, 은퇴 직전에 부여받은 임무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이중 과제를 완수한 것이지요.

영화 초반부 연쇄살인범에 의하여 죽은 딸의 부모에게 했던 약속, '반드시 범인을 잡아 딸의 원통함을 풀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제리는 마침내 지키게 된 것입니다. 비록 오해와 외면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약속을 지키겠다'는 제리의 굳은 의지와 결단은 그로 하여금 '열렬한(誠)' 마음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애쓰는(文)'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게 합니다.

8.

FBI 마약특수수사반에 의하여 체포된 얼 스톤은 법정에 서게 됩니다.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악한 마약 조직이,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아온 아무것도 모르는 고령의 노인을 이용하여 행한 범죄이므로 정상을 참작해 주세요!"

그러나 얼 스톤은 변호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크게 외칩니다.

"난 유죄입니다(Guilty)!"

스톤은 단 한마디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재판장은 유죄를 인정하는 그를 수감합니다.

마약 배달 혐의로 체포되기 직전, 범죄조직의 살해 위협을 무릅쓰고 중병으로 입원하여 죽음을 앞둔 아내를 찾아가 그녀에게 진정 어린 용서를 구하고 마침내 화해를 한 얼 스톤.
 
법정에서 만난 딸 아이리스와 손녀 지니는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가족인 얼 스톤이 범죄조직에 연루되어 마약을 배달하는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얼 스톤의 진정성이 마침내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영화의 라스트 씬은 얼 스톤이 동료 재소자들과 함께 교도소 안에서 노역을 하는 장면입니다. 스톤 역시 제리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이중 과제를 충실하게 이행한 것입니다. 매사 '열렬한(誠)' 마음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애쓰는(文)' 아름다운 모습을 스톤은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비록 범죄조직과 연계되어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디딘 방향성의 오류는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더욱 돋보이는 것은 영화 속의 주인공 얼 스톤 역을 맡은 90세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입니다. 평생을 한결같이 영화 외길을 걸어오면서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최선을 다해 끝까지 이행해 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숭고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노 거장(巨匠)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1937년생 잭 니콜슨의 무병장수도 함께 축원합니다.

9.

사족 1
영화 <써스펙트>의 원제는 < The Pledge >입니다. '약속' '맹세' '서약' 이런 뜻입니다. 단순히 '의심하다'란 뜻의 '써스펙트(suspect)'란 단어로 선택한 우리나라보다, 역시 원제가 더 영화 내용에 합당해 보입니다. 제리가 죽은 어린이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그 자신과의 과거 및 현재와의 싸움이기도 하거든요

사족 2
영화 <라스트 미션>의 원제는 < The Mule >입니다. '노새'라는 뜻입니다. 속어로는 '국경을 넘나드는 마약 운반책'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네요. 이 'mule'이라는 단어가 영어권 관객한테는 몰라도, 역시 한국인들에게는 '마지막 임무'라는 뜻의 <라스트 미션>이 더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사족 3
한자문화권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어에 나온 말을 축약하여 '위산일궤(為山一篑)'라는 사자성어를 즐겨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대 중국인들은 이보다는 서경에 나오는 '공휴일궤(功虧一簣)'를 사자성어처럼 즐겨 써더군요.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공휴일궤'란 성어(成語)를 잘 압니다.
덧붙이는 글 페이스북 동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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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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