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영국 감독은 때로 관객을 웃겼고 때론 울렸지만 그 밑바닥엔 항상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가 있었다. '거장' 켄로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아일랜드 독립사의 아픔을 전했고, <엔젤스 셰어> 같은 작품으론 웃음기를 머금고도 젊은 청년들의 순수함과 경제적 하층민의 삶을 매우 현실적으로 제시했다. 세계 평단과 관객들이 그를 두고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2년 전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발표한 직후 그 자신을 비롯해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연출작이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작품 직전 은퇴 얘길 꺼냈던 그는 83세를 맞이한 올해에도 작품을 들고 관객 앞에 섰다. 그만큼 그는 여전히 영화로 말해야 할 것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다.

<쏘리 위 미쓰드 유>로 제72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켄 로치를 영화제 기간에 직접 만났다. 인터뷰 자리엔 오랜 시간 감독과 함께 작업했고, 이번 영화에서도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각본을 쓴 폴 레버티도 동석했다. 

"본질은 결국 착취다"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의 한 장면.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의 한 장면.ⓒ Joss Barratt

  
영화는 하루 14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택배 사업자 리키(크리스 하천)와 그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업자라는 말과 그의 근로 시간은 서로 모순이다. 비정규직, 계약직 등 노동유연화 현상을 지나 이젠 긱(gig) 노동자, 그러니까 스스로 '고용 당하는' 임시직이 영국 사회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현실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거대 자본이 개인을 세련된 방식으로 길들이고 옥죄는 것.

<쏘리 위 미쓰드 유>는 결국 약자와 소수자를 생각하지 않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나타날 수 있는 비극에 대한 묵시록과도 같다.  

좌파 영화인의 대표주자처럼 여겨지는 켄 로치에게 그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꾸준히 보수화 되고 있는 영국 사회를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예전 좌파는 실패했다. 노동자 문제, 실업률, 평등 문제, 환경 파괴 등에 있어서 변화를 줄 수 있는 권력을 잃었다"고 그는 진단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나타나는 분노가 전 세계 곳곳에서 생기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종의 '강한 좌파(serious left)'다. 대기업끼리의 경쟁에서 점점 가치가 떨어지는 노동과 환경 문제에 이야기 할 수 있는 권력 말이다. 기업가와 자본주의는 마치 노동을 수도꼭지처럼 그냥 틀고 잠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업은 큰 문제다. 사회적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박사 학위를 가진 대학 강사라도 임시직처럼 일하고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경제 모델을 제시할 강한 좌파(serious left)가 필요한 것이다. 

영국에는 가능성이 있다. 영국 좌파당(Labour)은 대기업의 권력을 낮추고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제공할 것을 제안한다. 물론 이런 주장이 공격을 당하고 있기도 하다. 큰 투쟁이다. 영국에선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프랑스에서는 보이지 않고, 유럽의 많은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그게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다. 우리는 강한 좌파(serious left)가 필요하고 경제 모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파당과 싸울 수 있다."


켄 로치 감독은 "내가 과학자가 아니기에 노동환경 변화를 예측할 순 없었지만, 기술과 자본주의의 급격한 변화에도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 갈등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대부분 영화를 꿰뚫고 있는 본질이기도 하다.

"결국 착취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고용주들에게 압박당하는 것에서 본사와 에이전트에게 압박당하는 걸로 바뀌었을 뿐이다. 기술은 결국 착취하는 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그 기술과 지식이 있었다면 인생은 달랐을 것이다. 내가 30, 40대였을 땐 어떻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지를 배웠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오전엔 일하고 오후엔 쉴 수 있을 거라 다들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 것이다. 고용자는 노동자 수를 줄이고, 그만큼 (남은) 노동자에게 일을 열심히 시킬 테니까. 지금은 더 많은 착취를 하는 회사가 더 많은 투자를 받는다. 그래야 돈을 더 많이 버니까. 그렇기에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셈이다."

거대 담론에 수놓은 인간미와 현실성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를 연출한 켄 로치(Ken loach) 감독(왼쪽)과 각본을 쓴 폴 래버티(Paul Laverty).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를 연출한 켄 로치(Ken loach) 감독(왼쪽)과 각본을 쓴 폴 래버티(Paul Laverty).ⓒ 이선필

  
켄 로치 영화가 인정받는 건 앞서 말한 거대 담론 자체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구체적인 현실과 사람들을 등장시켜 말하는 데에 있다. <쏘리 위 미쓰드 유> 역시 택배 사업자 아빠, 사회 돌보미 서비스 사업자 엄마, 그리고 사춘기를 맞은 아들과 사랑스러운 막내딸이 각자의 위치에서 갈등을 겪고, 어떤 사건의 중심이 된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중요한 갈등 요소는 아빠와 아들 간의 불신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켄 로치 감독은 여느 때처럼 배우들에게 모든 대본을 주지 않고, 상황에 맞게 즉흥적으로 표현하게 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어떻게 준비하고 촬영할지 방식을 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린 시퀀스 별로 찍는다. 배우들은 자신의 시퀀스 이후 뭐가 나올지 모른다. 이번 영화에서도 막내딸이 어떤 비밀이 있잖나. 다른 배우들은 모르게 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반응을 담았지. 배우들 역시 자기 장면에서 단어를 몇 개 추가하거나 바꾸면서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건 사실 (각본가) 폴의 글이 정확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쇼팽 곡을 치는 피아니스트를 떠올려 보라. 그 피아니스트가 마치 즉흥적으로 아무 준비 없이 머리에서 떠오르는 걸 연주하는 것 같지만 그건 이미 200년 전에 나온 곡이다.

또한 영화에서 아들(Rhys Stone)과 리키 간 갈등의 골이 깊다. 어른들보다 이들의 미래가 더 암울해 보인다고? 맞는 말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하고, 기성세대는 귀 기울여야 한다. 청춘들이 충분히 말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게 중요하다. 뭔가 자기의 생각이 있고 뚜렷한 메시지가 있는 청춘들이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젊은 세대는 근본적으로 같다. 예전과 같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 표현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빠를 무너뜨리고 또 살아가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1967년 <불쌍한 암소들>로 데뷔한 이후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TV 드라마 시리즈든 영화에서든 진보적 입장을 취하며 보수화와 자본주의를 경계했다. 감독으로서 50여 편이 넘는 작품으로 꾸준히 메시지를 전달해 온 그다. 특히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공공 시스템이 무너진 영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으로 인한 변화를 그는 체감하고 있었을까.
 
"좋은 질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많은 사람들이 토론을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면 정권의 정책과 어떤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보수 정권은 여전히 (노동자의) 배고픔을 무기로 사용한다. 단 1인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나 책, 음악 등 문화로 토론을 시작할 수 있지만 변화를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정권의 생각을 영화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에 반대하는 의견은 커지고 있다."

켄 로치 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리키 같은 긱(gig)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려면 당장 무료급식소로 달려가 보라"고 전했다. "자원봉사자, 여러 기관들의 연대를 볼 수 있다"며 그는 "개인 중심으로 고립된 삶의 방식은 큰 문제다. 그게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고 함께 활동하기 어렵게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영화 흥행 만능주의... "투자자들 잘못"

'며칠 만에 몇 만 돌파'. 한국 상업영화 관련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기사 문구다. 독립예술영화, 다양성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어려워지고, 상업영화는 조금이라도 상영관을 확보하려 애쓴다. 흥행만으로 영화의 명암이 갈리고 나아가 그 작품의 의미마저 가리는 현상, 나아가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성찰하는 작품이 갈수록 나오지 못하는 현상을 켄 로치 감독에게 물었다.

"깊은 유감을 표한다. 유럽도 비슷한 상황이다. 여러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표현할 수 있다. 결국 드라마와 영화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영화를 만들라고 돈을 주는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기에 영화인들의 잘못이라 할 순 없다. 영화 투자자들이 사람들의 일상을 보고 싶어 할 경우, 그걸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분명 나올 것이다. 문학이나 미술에서 인생을 성찰하며 작품을 만드는 건 꽤 긴 전통이지 않나.  

영화에 투자하는 이들이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할 경우, 영화를 만들 사람은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나 미술 등으로 우리의 인생을 성찰하는 게 오랜 전통이지 않나. 영화 만드는 사람을 탓하지 말고 투자자들을 탓해라."


넷플릭스, 애플, 아마존 등 OTT(인터넷 스트리밍을 기반으로 한 TV 서비스) 플랫폼이 막강한 자본으로 영화 산업에 영향을 주고 있는 요즘이다. 올해 칸영화제 마켓에서도 OTT 플랫폼의 강세로 영화 거래의 방식이 크게 바뀌는 모습을 쉽사리 포착할 수 있었다. 이런 흐름에서 켄 로치 감독은 영화, 그리고 창작자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한껏 드러냈다.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를 연출한 켄 로치(Ken loach) 감독(왼쪽)과 각본을 쓴 폴 래버티(Paul Laverty).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를 연출한 켄 로치(Ken loach) 감독(왼쪽)과 각본을 쓴 폴 래버티(Paul Laverty).ⓒ 이선필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를 연출한 켄 로치(Ken loach) 감독(왼쪽)과 각본을 쓴 폴 래버티(Paul Laverty).

영화 <쏘리 위 미스드 유>를 연출한 켄 로치(Ken loach) 감독(왼쪽)과 각본을 쓴 폴 래버티(Paul Laverty).ⓒ 이선필

 
"난 '시네마'에 굉장히 특별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이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본다는 그 아이디어 자체가 참 특별한 것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잘 교감하지 않으려 한다. 이건 문제다. 극장은 우리가 소통할 수 있고, 관객으로서 영화에 답변할 수 있는 곳이다. 굉장히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티에리 프레모(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OTT 사업자가 제작한 영화의 경쟁 부문 진출을 반대하고 있다. - 기자 말)를 지지한다. 
 
맞다. 이건 영화적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가 다른 플랫폼으로 들어갈 수 있지. 스트리밍 서비스일 수도 있고, TV나 DVD, 블루레이일 수도 있다. 아, 이제 DVD는 올드하군(웃음). 우린 극장 관객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극장에서 터지는 웃음은 객석 곳곳에 줄줄이 퍼져 당신까지 웃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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