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녹두꽃>.ⓒ SBS

  
1894년 동학혁명을 다룬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은 동학 평등사상에 감흥된 농민들이 혁명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이 곧 하늘이며 인간은 다 평등하다는 동학 사상의 위력은, 가상의 인물인 백이강(조정석 분)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백이강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실력자 이방의 얼자로 태어났다. 얼자는 첩의 자식이란 점에서는 서자와 같지만, 어머니가 노비라는 점에서 서자와 달랐다. 서자보다 못한 얼자로 태어난 이강은 이방 아버지의 수족처럼 살면서 온갖 나쁜 일을 서슴지 않았다. '거시기'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그는 폭력배나 다름없는 하급 아전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함부로 폭행하고 세금 징수를 빌미로 재산을 갈취하곤 했다.
 
그 때문에 이강은 동학전쟁 서막인 고부민란 때 단단히 경을 쳤다. 그때 죽을 고비에 처했던 그를 구해준 인물이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 분)이다. 전봉준은 군중 앞에서 이강의 손바닥에 칼을 내리 찍으며 "이로써 거시기는 죽었다"고 한 뒤 그냥 풀어줬다.
 
결국 그게 인연이 돼 이강은 동학군에 자진 합류한다. 전봉준과 측근들의 냉대도 견뎌내며 기어이 들어가고야 만다. 그 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전투에 앞장선다.
 
그런 이강을 움직이는 에너지 중 하나가 바로 '평등 사상'이다. 그는 "녹두 장군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며 동학전쟁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 거라고 확신한다. 평등 사상에 마음이 끌려 1894년 조선을 뒤흔들었던 그 시대 민중들처럼, 이강도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에 투지를 불태운다.
 
왜 1860년 이후에야 평등 위한 싸움에 나섰을까
 
 하급 아전들과 함께 악행을 일삼았던 백이강(조정석 분).

하급 아전들과 함께 악행을 일삼았던 백이강(조정석 분).ⓒ SBS

  
이쯤에서 한 번쯤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된 1860년 이후의 조선 민중들만 평등을 꿈꾼 것은 아니다. 계급제도가 생겨난 이래, 인류는 항상 평등을 꿈꿔왔다. 그런데 어째서 조선 민중들은 1860년 이후에야 평등을 위한 싸움에 나서기 시작했는가 하는 점이다. 하필 왜 이 시기에 그렇게 했느냐는 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교체되는 과도기를 살았던 중국인 진승은 기원전 209년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느냐?"며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려시대인 서기 1198년에 노비해방운동을 벌인 만적 역시 진승의 말을 모방하면서 노비들을 규합했다.
 
이처럼 인류는 어느 시대건 간 항상 평등을 염원했다. 이따금은 그런 염원을 중심으로 상당수 민중들이 결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나라 전체를 움직일 정도로 역량은 모아지지 않았다. 이것이 실현된 것은 서양에서는 1700년대 후반부터이고, 조선에서는 1800년대 후반 동학혁명 때부터다. 오랫동안 꿈꿔온 것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평등을 위한 대규모 투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는 '평등 이념을 꿈꾸는 것'과 '평등 이념을 앞세워 정치 행동에 나서는 것'은 전혀 별개임을 보여준다. 불평등 체제를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으면 평등을 위한 싸움이 본격화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야 민중이 용기를 내서 투쟁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1860년에 최제우가 평등 이념을 내세워 동학을 창시하고 1894년에 전봉준이 동학 조직을 이용해 민중을 혁명운동으로 이끈 것은, 1860년 이전에 평등 운동과 관련된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노비제도 동요란 위기에 봉착한 조선 사회
 
 백이강(조정석 분).

백이강(조정석 분).ⓒ SBS

  
그런 여건이 성숙되는 과정을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의 결과, 조선 사회는 노비제도 동요라는 위기에 봉착했다. 6년간 조선팔도를 뒤흔들었던 이 전쟁은 노비와 주인의 불평등 관계에 기반을 둔 사회제를 동요시켰다. 장기간의 전쟁 때문에 노비들이 토지를 이탈하면서 인구이동이 급격화된 결과였다.
 
이로 인해 노비들이 신분을 숨기고 큰 읍으로 나가 임금 노동자로 살거나 장사를 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것은 농촌의 노비 인구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지주들은 노동력을 구하기 힘들어지고 노비들은 발언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경영 여건의 악화를 의미했다. '경제가 힘들다'는 불평이 쏟아져 나올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최고 지주)과 지주계급이 대안으로 찾아낸 것 중 하나가 머슴 고용의 확대다. 1485년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에 머슴을 지칭하는 고공(雇工)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머슴 제도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지주들이 대안을 찾아낸 것이다.
 
노비와 달리 머슴은 신분상의 자유인이었다. 고경명(임진왜란 의병장)의 후손인 고유(高庾)가 집안이 망한 뒤 한동안 머슴 생활을 했다는 <금계필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인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머슴 생활을 하곤 했다.
 
지주들은 신분상의 불만을 품은 노비를 평생 고용함으로써 생기는 손익과, 자유인인 머슴을 단기간 고용함으로써 생기는 손익을 비교했다. 그 결과, 1700년대와 1800년대의 지주들은 후자가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주들이 이렇게 노비보다 머슴을 선호하게 되면서, 소수에 불과했던 머슴의 비중이 1700년대부터 급격히 늘어났다. 기존 노비들도 신분을 숨기거나 세탁하고 머슴으로 살아가는 일이 많아졌다.
 
신분상의 자유인인 머슴
 
 전붕준(최무성 분, 왼쪽)과 함께 혁명운동에 참여한 백이강(조정석 분).

전붕준(최무성 분, 왼쪽)과 함께 혁명운동에 참여한 백이강(조정석 분).ⓒ SBS

  
노동자 인구에서 머슴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중대한 사회적 변화가 생겼다. 고용주뿐 아니라 고용인도 자유인인 경우가 늘어나면서, '노사'가 신분상으로 대등해지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노동자가 노비인 경우에는 고용관계뿐 아니라 신분상으로도 수직관계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고용주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동자가 머슴인 경우에는, 적어도 신분상으로는 수평관계가 존재했다. 이정수·김희호의 공동 저서 <조선시대 노비와 토지소유방식>은 "이 시기 노동의 고용계약은 신분적 예속관계라기보다는 상당히 대등한 경제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고용주의 절대 우위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머슴이었던 고유가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지금 당장에는 머슴이라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웠다. 머슴이 과거시험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자유인인 머슴을 대할 때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법률제도는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을 앞서거나 현실에 뒤처지는 제도는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특정 시기에 특정 제도가 별 무리 없이 잘 시행됐다면, 그 제도에 맞는 현실이 그 시기에 조성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조가 죽은 직후인 1801년부터 공노비(관노비) 해방이 순차적으로 이뤄지다가, 1894년에 사노비(개인 노비)와 공노비가 제도상으로 완전히 소멸됐다. 이는 1801년 이전에 노비제도가 이미 동요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미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비제도를 축소하는 제도적 개혁이 가능했던 것이다.
 
노비들의 도망과 저항으로 노비제도가 흔들리고 지주들이 노비보다 머슴을 더 선호하다 보니, 예전 같은 노비제도를 더 이상 운용할 수도 없고 운용할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노비제도 해체가 시작됐던 것이다.
 
평등 실현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믿음

1894년 동학혁명 뒤에 노비제가 완전 해체된 것은 더는 노비를 고용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생산관계가 작동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됐음을 의미한다. 머슴이 노비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실과 지주계급이 노비제도 해체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800년대 이전부터 머슴 고용의 확산 속에, 평등 이념이 조선 민중 속으로 퍼지고 있었다. 물론 머슴과 지주 간에도 실질적 불평등은 존재했지만, 머슴 고용의 확대로 인해 '고용인과 고용주는 신분상으로는 평등하다'는 관념이 민중 속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민중은 평등 이념을 머리뿐 아니라 몸으로도 체감하게 되고, 또 평등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평등이 더 이상 불순 사상도 아니고 위험 사상도 아닌 상황에서 최제우가 평등을 종교적으로 이념화시켰기에 동학이 민중 속으로 빨리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여건이 이미 성숙돼 있었기에 동학이 민중의 마음을 매료시키고 1894년 혁명으로 민중을 이끌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비제도 약화와 머슴제도 성장으로 인한 '노사 평등' 이념의 확산이 1894년 동학전쟁의 정신적 밑거름이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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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101.9 (목)11시25분경.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노비들,왕의 여자,철의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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