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던 청춘 한가운데서 사랑했던 친구를 잊고 살다가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나러 가는 느낌이었다. 공평무사한 세월은 그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윤기 있게 빛나던 검은 머리카락은 반백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윽한 눈빛만은 여전했다. 목소리는 한층 낮고 깊어져 마치 범종의 맥놀이처럼 가슴 깊은 곳까지 저릿저릿 울려왔다.
 
지난 10일 정태춘 박은옥의 <날자, 오리배> 부산공연에 다녀왔다. 공연장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과 함께 청춘을 보냈을 법한 연배의 중년들이었다. 20여 년 만의 갑작스런 그들의 등장이 반갑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처럼 자신의 청춘 한 자락이 떠올라 한달음에 달려왔을 지도 모른다.

무대 밖에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정태춘이 쓴 붓글들이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노래 부르기를 중단한 그는 배운 적도 없는 붓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태춘의 붓글

정태춘의 붓글ⓒ 추미전

  
스스로 '막글'이라고 폄하하지만 유려하고 멋이 느껴지는 정태춘의 붓글, 음유시인같은 그의 노랫말처럼 그의 붓글이 던지는 이야기가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래, "노래 마음이 부르지, 목이 부르나." 20여 년 만의 무대로의 외출은 그가 사랑하는 딸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늙은 아빠가 부르는 젊은 시절의 노래가 듣고 싶어요."
   
늙은 정태춘이 부르는 젊은 시절의 노래는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반가움이다. 무대는 한없이 단순했다. 가요인 듯, 가곡인 듯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노래처럼 이번 공연의 반주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피아노를 비롯해 밴드와 기타 연주자들이 함께했다. 무대 뒤에 연주자들의 좌석이 배치됐고 무대 앞에 의자 2개와 악보를 놓을 수 있는 보면대 2개가 달랑 놓여 있었다.
 
 늙은 아빠가 부르는 젊은 시절 노래가 듣고 싶어요, 딸의 간청덕분에 다시 무대에 선 정태춘과 박은옥

늙은 아빠가 부르는 젊은 시절 노래가 듣고 싶어요, 딸의 간청덕분에 다시 무대에 선 정태춘과 박은옥ⓒ 추미전

 
 
 정태춘 박은옥 <날자, 오리배> 부산공연 무대

정태춘 박은옥 <날자, 오리배> 부산공연 무대ⓒ 추미전

 
암전과 더불어 파도 소리 같은 박수소리들이 밀려왔다. 이어 정태춘과 박은옥이 등장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의상이 너무나 그들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보통 가수들이 공연을 할 때 입는 무대의상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무대가 아니라 객석에 앉아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일상복 차림으로 그들은 무대 위에 섰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됐다.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 갈 길은 머나먼데 / 고요히 잡아주는 손 있어 서러움을 더해 주나" - 서해에서 

나무가 세월을 나이테로 남기듯 정태춘의 목소리에서도 나이테가 느껴졌다. 시디에서 듣는 젊은 날의 목소리에 비해 다소 굵고 거칠어졌지만 서늘하게 깊어진 목소리였다. < 서해에서 >와 < 회상 >을 마치자 관객들이 소리쳤다.

"보고 싶었어요."

다시 한번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객석의 반응이 이럴 때 요즘 연예인이라면 립서비스 한마디쯤 할 만하다. 예를 들어 "저희도요" 라든가 아니면 유머 한마디로 좌중을 웃길 법도 하지만 "아~~예" 어정쩡하게 대답하더니 그냥 다음 노래로 이어간다. 웃음을 과장하지도 않고 행복을 과장하지도 않아서... 그냥 있는 그대로 서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그들다웠고 좋았다.

"저 어둔 밤 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 북한강에서
  
소속사 사장님이 정태춘에게 신춘문예에 응모해 보라고 했다는 <북한강에서>는 마치 북한강 새벽풍경을 사진으로 보는 듯 고스란히 눈앞에 떠오르게 했다.

"시집 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옷장 속 깊이 모셔 두고서/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늙어지면 두고 갈 걸 생각 못하고/만져보고, 펼쳐보고, 둘러만 보고" - 양단 몇마름 
  
정태춘이 19살에 만들었다는 <양단 몇마름>, 마치 겨울 얼음장 밑을 흘러가는 물소리처럼 처연하게 맑은 박은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불현듯 40년 전 할머니 집 한 켠에 있던 반닫이장이 떠올랐다. 오래도록 그 속에 들어있던 양단 몇마름의 사연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듯했다.
 
2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단출한 무대에 조명만이 여러 분위기를 연출해내며 변화를 주었다. 가수들의 의상 한 번 바뀌지 않았다. 도무지 요즘 공연 같지 않게 보여줄 것이 별로 없는 공연, 그러나 그래서 더 좋았다. 모든 것은 배경이고 정태춘과 박은옥의 목소리만 진정한 주인공인 공연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 92년 장마, 종로에서 

  
드디어 < 92년 장마, 종로에서 >가 울러퍼졌다. 이 노래와 함께 그는 가수보다 투사에 한걸음 가까워졌다. 오랫동안 당연시되던 음반사전심의제도, 이 제도에 걸려 웃지 못할 이유로 금지곡이 된 명곡들이 많다. 심지어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또한 사전심의에 걸려 몇몆 구절들이 삭제되고 바뀌었다.
  
 정태춘의 붓글

정태춘의 붓글ⓒ 추미전

 
언젠가는 깨어져야 할 벽, 그는 자신이 그 선두에 설 각오를 한다. <아, 대한민국>과 < 92년 장마, 종로에서 >의 사전심의를 거치지 않고 음반을 발매한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이 앨범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단지 구호가 아니라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불법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 음악평론가 강헌

불법의 음악을 만들어낸 이후 6년간 그는 선두에 서서 치열하게 싸운다. 선두에 서서 싸우기 시작했을 때 그는 두렵지 않았을까? 유시민은 학생운동을 하며 한 차례 구속됐다가 나왔을 때 두려움의 문제를 풀기 위해 빈민운동가 제정원을 만나러 갔다. 제정원 대신 그의 형인 제정구 신부를 만나 묻자 제정구 신부는 대답했다고 한다.

"신앙인이 된다고 두렵지 않은 건 아니라고, 단지 두려워도 참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라고." 정태춘도 그렇게 두려움을 참고 앞장 서 나갔을까? 앞장선 그를 많은 후배들이 따랐고 결국 사전심의제도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낸다.

그 후 그는 의미 있게 투쟁하는 모든 현장에 함께 했고, 당연히 TV에서는 볼 수 없는 가수가 됐다. 빼어난 가사와 곡을 뽑아내던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뽑아내지 않고 대신 글씨를 쓰고 가죽공예를 했다. 오랫동안 무대를 떠나 있던 그를 다시 무대에 세운 건 그의 노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이다. 그들은데뷔 40주년을 빌미로 이들부부의 등을 떠밀어 무대에 세웠다.
   
"멀리 물가에 가 있었습니다. 잠시 들르러 왔습니다. 가더라도 인사는 제대로 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요." - 40주년 기념 콘서트 정태춘, 박은옥 
 
그가 노래를 그만둔 건 자신의 시집 <슬픈 런치>에서 밝혔듯 "열차는 달리고 나는 거기서 내렸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장성'과 '산업주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그는 노래를 그만두고 문명의 열차에서 내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시대와 타협하기보다 시대와의 불화를 선택한 그의 지조는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남아 상흔조차 아름다운 무늬가 된 바닷가 해송의 꿋꿋함을 연상시킨다.

주변에 등 떠밀려 다시 무대에 오른 정태춘과 박은옥, 이번 공연은 '정태춘, 박은옥 40프로젝트' 일환으로 올 한해 전국을 돌며 계속된다. 올해 공연이 끝나면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정태춘과 박은옥, 많은 이들이 공연장을 찾아 한동안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던 그의 지조에 늦게나마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면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지조를 굽히지 않은 채 다시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오래도록 그들만의 독특한 < 비극적 서정>이 담긴 노래들을 우리에게 계속 들려주지 않을까? 그의 이번 방문이 마지막 인사가 아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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