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 요즘 새벽 기도를 나가잖아요."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만나자마자 전한 깜짝 뉴스다. 워킹맘으로 집과 가정을 돌보는 것만 해도 숨이 차 했는데 그 와중에 새벽기도라니. 의아했다. 무슨 절박한 일이 있나 싶어서 물어보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새벽마다 우리 팀 부장에 대한 저주 기도를 퍼부어요."

물론 농담이었지만, 회사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선명하게 가늠이 되었다.
후배는 얼마 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었다. 워낙 경력이 오래 되고 실력도 좋아서 회사에서도 1순위로 정규직 전환을 해준 눈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로 이어졌다.

비정규직일 때도 어느 정도의 조짐이 있기는 했지만 정규직이 된 이후로 부장은, '나 덕분에 정규직이 되었으니 나한테 잘해'라는 무언의 압박이 심해졌다. 후배가 다 해놓은 일을 자신이 한 것처럼 둔갑시키기도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후배에게 다 던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규직 시켜놓고 뽕을 빼려나 봐요. 월급도 정규직이 받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깎였는데."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 ⓒ MBC


후배는 속상했지만 어디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더 답답한 눈치였다. 그래서 나를 만난 날은 스트레스로 대상포진까지 왔다고 하면서도 2시간 내내 속사포 랩으로 속상함을 쏟아냈다. 어쩌다 보니 나도 비정규직으로 10년 넘게 일하고 있어서 후배의 마음고생이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비정규직으로 가장 어려운 점을 꼽으라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나도 하루아침에 잘리고 실업자가 되었을 때, 외주 일을 받아서 기한 내에 일을 마쳤음에도 거의 두 달 동안 작업비가 입금되지 않아서 노심초사할 때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아쉬웠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왜 이런 일이 당하는지 이유가 납득되지 않을 땐 더 답답하고 억울하다.

그렇다고 곧바로 그런 상황을 동네방네 알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혼자 속앓이를 하며 감내하면서도 한편으론 억울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이어도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후배는 새벽에 교회를 찾았으리라.

고작 3100원 때문에 해고를 당한 버스기사
 
 MBC 월화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MBC 월화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 MBC


비에 젖은 승객에게 거스름돈을 주느라 받은 만 원짜리 지폐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잊어버린 버스 운전사가 '운송수입비 부정 착복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잘린다. 고작 3100원 때문에 해고를 당한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는 해고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찾아서라고 납득하고 싶은 버스기사는 다른 이유를 찾는다.

"3100원, 그거 떼먹었다고 해고래요. 이해가 가세요?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어요. 진짜 이유가 뭘까? 내가 뭘 밉보였나, 아님 내가 뭘 잘못했지? 파업하는 기사들 간식 갖다 준 것 때문인가? 아니면 박 기사하고 부장 욕한 걸 들었나? 아니면 부장 딸 결혼식 안 가서? 그때 다들 얼마씩 냈다고 했는데, 제가 그건 못 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런가?"

요즘 사이다 같은 전개로 화제가 되고 있는 <근로감독관 조장풍>에 나오는 대사다. 버스기사의 호소를 진중하게 듣고 있던 주인공 조진갑이 담담하게 한 마디를 던진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조진갑은 근로감독관이다. 이름도 생소한 직업인 금로감독관은 힘이 아닌 법으로 갑질을 심판하는 공무원이다. 어떻게든 상식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진갑이라는 캐릭터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액션신을 소화하기도 하고, 혼자 조직 폭력배 소굴에 쳐들어가서 일을 해결하기도 한다.

그래서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은 판타지물에 가깝다. 악덕기업주를 법으로 혼내주는 조진갑의 활약에 속은 시원하지만 '저런 사람이 어디 있어?'하는 현실자각타임이 오면 이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근로감독관이 조진갑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을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로감독관은 한 달 평균 45.4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1인당 1400개의 사업장(2015년 12월 기준)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조장풍처럼 갑질 사업주를 응징하는 역할까지 기대할 순 없다.

억울함을 풀지 못한 사연들

2017년 12월 '직장갑질 119'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노동자의 77.5%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드라마가 판타지물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진갑에 열광한다. 열광하는 이유는 그가 히어로처럼 악덕 기업들을 혼줄 내주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끝까지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이 히어로의 모습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부당 해고를 당한 버스기사에 이어서, 진갑은 웹디자이너 장은미의 부당한 노동현실을 언니인 장은지에게 전해 듣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민원인의 진술을 진중하게 들어주는 진갑은 모습은 그 어떤 것보다 큰 위로였다.
 
18회에서는 명성병원 근로감독을 나간 진갑이 과거 폭력을 사용했다는 뉴스가 폭로되면서 갑자기 산재재심사위원회로 전보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산재재심사관이 된 진갑이 산재재심사에 처음으로 참여하는데, 그때 이루어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민원인 각 개인은 절박한 마음으로 호소하는데 비해, 심사관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 아픈 질문이 올라왔다. 억울함을 풀지 못한 사연들은 얼마나 많이 이 세상을 둥둥 떠다니고 있을까.
 
아무것도 고치지 않고 넘어간다면,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MBC 월화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MBC 월화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 MBC


너나없이 힘든 삶이다. 일한 만큼 돈을 지급해야 하고, 시간 외로 일할 경우 초과근로수당을 줘야 하고, 법적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하는 등 상식선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도 잘 지켜지지 않는 시스템이니 더하다.

시스템이 불안하면 "나만 아니면 돼" "나는 손해보면 안돼"라는 의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누군가를 돕는 것도 버겁고, 공감해 준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건 아니다 싶어도 내 일이 아니면 무심해진다. 언젠가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 불행이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고치지 않고 넘어간다면, 절대 세상은 나아지지 않을뿐더러, 언젠가 남의 불행이라 여긴 일이 나에게 이르기도 한다. '나도 살기 힘든데 남 신경 쓸 틈이 어디 있어?'보다는 '함께 덜 힘들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로감독관 조장풍>은 판타지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 속에 더 중요한 현실적인 해법을 주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조진갑의 경청이다. 함부로 판단하거나 묻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은 히어로의 장풍만큼 힘이 세기 때문이다. 나에게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퍼뜩 달려가서 말할 곳이 하나만 있어도 그것은 안전망이 된다. 갑자기 닥친 불행이나 억울함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쿠션의 역할도 해준다.

진갑의 경청. 나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억울함을 해결해주는 '히어로 조장풍'은 될 순 없어도 '들어주는 조진갑'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관심이 모아지다 보면 함께 덜 힘들게 살 수 있는 방법들이 모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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