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 포스터

▲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포스터ⓒ JIFF

 

색조가 없어 창백하게까지 보이는 흑백화면, 그보다도 창백하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한 듯한 인물들이 화면 위에서 연기를 한다. 처음 등장하는 건 죽음과 삶이 맞닿는 우스꽝스런 순간으로, 세 차례 가벼운 콩트 형식으로 연이어 나오는데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년의 아내와 남편이 멈춰 있는 카메라에 함께 잡힌다. 아내는 화면을 등진 채 부엌에서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고 남편은 거실에서 저녁자리를 준비 중이다. 아내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가락을 따라 흥얼거리는 사이, 남편은 와인마개를 따기 위해 애를 쓴다. 쉽게 빠지지 않는 마개를 따기 위해 구두 사이에 병을 고정하려 허리를 숙인 순간, 심장마비 신호가 온다. 창백한 얼굴이 더 창백해진 남편이 끝내 자리에 쓰러지는 동안 아내는 이 모두를 알지 못하고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3분 남짓한 첫 콩트가 끝난 뒤 화면엔 죽음과 삶이 맞닿는 두 번째 순간이란 자막이 뜬다. 그리고 나오는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장소는 어느 병원 병실, 나이든 아들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머니 한 명이 침상에 누워 있다. 눈길을 끄는 건 할머니가 웬 핸드백 하나를 두 손 모아 꼭 쥐고 있다는 것. 그때 뒤늦게 온 듯 보이는 셋째 아들이 병실에 도착한다.
 
오늘내일 한다는 어머니를 보러온 셋째 아들은 어머니가 핸드백을 움켜쥐고 있는 걸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차를 팔아 마련한 돈과 아버지의 유품이라는 금장시계, 결혼반지까지 돈 되는 것들이 가득 든 핸드백을 가져가겠다는 어머니와 이걸 빼앗으려는 아들 사이의 이야기가 웃음을 감출 수 없도록 한다.

스웨덴 영화계의 거목, 로이 안데르센의 대표작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 영화 한 장면

▲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영화 한 장면ⓒ JIFF

 
 
세 번째 콩트는 크루즈 식당 칸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뚱뚱한 남성이 바닥에 누워 있고 선원 둘이 그 옆에 붙어 앉아 있다. 상당한 시간 동안 남성을 살리려 노력한 모습으로, 그를 살릴 수 없단 사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한 듯하다. 이들 뒤에는 식사를 위해 식당에 온 손님 수십 명이 저마다 식사를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현장에 도착한 선장이 선원들에게 상황을 보고받는 도중, 식당 직원이 선장에게 묻는다. "여기 돌아가신 손님께서 식사를 결제하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맥주랑 새우샌드위치입니다" 결제한 손님은 죽고 새우샌드위치와 맥주가 남은 가운데, 선장은 원하는 사람에게 식사를 주라고 결정한다. 죽은 손님이 남긴 음식을 두고 벌어지는 상황이 관객의 관심을 붙들어 놓는다.
 
이상은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란 영화의 오프닝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가치를 인정받은 명작으로, 라세 할스트롬과 함께 현대 스웨덴 영화의 거장으로 분류되는 로이 안데르손의 2014년 작이다.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월드시네마 부문 후보로 초청돼 한국 영화팬 앞에 처음으로 선보였고, 5년 뒤인 올해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 다시 초청되며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이번 전주영화제가 아예 '인간존재의 전시'란 주제로 로이 안데르손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그의 영화 중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가장 큰 성취를 거둔 이 영화가 큰 관심을 끈 것이다. 독특한 스타일로 쌓아올린 명성에 비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은 아니기에 한국에서 로이 안데르손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팬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제 색깔을 간직한 북유럽 영화, 그 중에서도 제일이라 할 만한 스웨덴을 대표하는 거장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봄직 하다.

때로는 명확함보다 모호함이 더 큰 감동을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 영화 한 장면

▲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영화 한 장면ⓒ JIFF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란 제목은 스웨덴어로 쓰인 원제를 그대로 직역한 것으로, 극중 한 에피소드인 장애학생의 시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 속 다른 많은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주된 맥락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어쩌면 이것이 주는 감상이야말로 영화의 메시지와 닿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괴상한 놀이용품을 파는 두 중년 외판원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가운데 이들과 이렇다 할 연관이 없어 보이는, 심지어는 시간과 공간마저 초월한 인물 및 상황을 엮어서 한 편의 장편영화를 완성시킨 감독의 의중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안데르손을 대신해 이번 전주영화제를 찾은 촬영감독 게르게이 팔로스조차 그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은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때로는 명확함보다 모호함이 더욱 큰 만족을 안겨주는 법이다. 3년여의 제작기간을 들여 매 장면에 쓰인 모든 세트를 직접 제작하고, 각 신을 하나의 그림처럼 꼼꼼히 찍어낸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가 제목처럼 존재를 성찰했는지를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상업영화 일변도의 극심한 쏠림현상을 겪고 있는 한국을 벗어나서 저만의 관점과 스타일로 독특한 영화를 찍어내는 세계적 명장의 작품을 만나는 게 꽤나 신선한 자극이 되어준단 사실만큼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올해 전주영화제가 준비한 로이 안데르손 기획전은 이 같은 감상을 적지 않은 영화팬들에게 던져주었다는 점만으로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된 자막을 가진 블루레이나 DVD조차 유통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해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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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진행 / 인스타 @bll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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