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이몽>.ⓒ MBC

  
독립운동 진영이 심각한 분열상을 보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지난 4일 첫 방송을 탄 MBC 드라마 <이몽>에서도 돈 문제와 관련된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상이 묘사됐다.
 
무장 항일투쟁을 선도한 의열단장 김원봉을 다룬 <이몽>에서는 1922년 김립 피살 사건이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 드라마는 소련이 지원한 자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은 김립이 살해된 사실을 자막으로 소개한 뒤, 자금의 행방을 놓고 김원봉 계열과 김구 계열은 물론이고 일본 경찰까지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을 보여줬다.
 
본명이 김익용인 김립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했다. 1910년 2월 30세 나이로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법과를 졸업하기 전부터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졸업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고 주로 러시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립(金立)이란 이름을 쓴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보성전문 입학 전의 일본 유학 시절에 고향 후배 허헌과 맹약을 하면서 그 이름을 썼다고 한다. 김립과 함께 고려공산당 활동을 했던 김철수의 글에 이 사연이 소개돼 있다. <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에 실린 '김철수 친필 유고'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립과 허헌(許憲) 사이는 일본 동경 유학 시에 장래 조선을 입헌(立憲)군주국으로 하자는 심맹(心盟)으로 입(立)자와 헌(憲)자로 양인(兩人)의 명(名)을 삼았던 것으로. 그만치 돈의(敦誼)의 막역(莫逆)이었다고 한다."
 
조선을 입헌군주국으로 만들자는 맹약을 하면서 '입'과 '헌'을 각자의 이름으로 삼았을 정도로 김립과 허헌이 돈독한 막역지우였다는 이야기다.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입헌군주국으로 바꾸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세웠고 그 포부를 독립운동 당시에도 잊지 않았겠지만, 김립은 결국 공금횡령 의혹을 받고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또는 '코민테른 자금 사건'

<이몽>에서도 비중 있게 다룬 이 사건은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또는 '코민테른 자금 사건' 등으로 불린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공산주의운동 기구인 코민테른을 통해 제공한 선전비 명목의 활동 자금을 김립이 착복했다는 의혹이 일어나자, 임시정부에 속한 독립운동가들이 김립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살해를 주도한 인물은 백범 김구였다.
 
이 사건은 러시아를 무대로 한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에서부터 시작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동차로 9시간 거리인 하바로프스크에서 1918년 설립된 한인사회당과, 1919년 9월 몽골 북쪽의 이르쿠츠크에서 설립된 전로(全露)한인공산당이 저마다 정통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다.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 구글 지도

  
두 단체는 1921년 똑같이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앞의 고려공산당을 이끈 이동휘는 한동안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활동했다. 그가 이끈 고려공산당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린다. 후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린다.
 
상하이파 이동휘는 1919년 8월 소련으로 측근들을 보내 선전비 명목으로 40만 루블 혹은 400만 루블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다음 달인 9월 이르쿠츠크파가 중간에서 돈을 탈취했다(실패했다는 설도 있다). 이크쿠츠크파는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공산주의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자신들한테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돈을 '접수'했다.
 
돈을 빼앗긴 이동휘는 그해 11월 소련에 재차 요청했다. 당시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다. 이동휘의 밀명을 받고 소련에 간 인물들이 한형권이다. 그는 소련에서 2백만 혹은 60만 루블을 약속받았다.
 
일차적으로 60만 루블을 받은 한형권은 20만 루블은 소련 외교부에 맡기고, 40만 루블은 몽골 서북쪽이자 카자흐스탄 북쪽인 옴스크에서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에게 전달했다. 이때 김립이 인수한 금전의 양에 대해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김립과 항일운동'은 이렇게 설명한다.
 
"40만 루블은 한 상자가 다섯 사람의 무게에 해당하는 금화 20부대씩 일곱 상자였고, 1948년 한형권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48년 당시 화폐로 4억원에 상당하는 자금이었다고 한다."
-한국근현대사학회가 발행한 <한국근현대사 연구> 2005년 봄호(제32집).
 
지금 돈으로 4억이 아니라 1948년 기준으로 4억이다. 그런 거금이 김립에게 전달됐다. 그런데 김립이 상하이에 갖고 간 돈은 그 절반인 20만 루블이었다. 그러자 그가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일어났다. 의혹을 제기한 쪽은 바로 이르쿠츠크파였다. 위 논문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아래 인용문의 '상해파'는 '상하이파', '북간도'는 '북만주'이고, 박진순는 소련에서 한형권을 도운 인물이다.
 
"김립의 모스크바 자금 유용부분 비판은 상당부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은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등 공산당 기관에 대한 보고에서 상해파의 박진순 일파를 비방하면서, 김립이 모스크바 자금을 유용했다고 보고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김립이 북간도에 있는 부모에게 1만원(루블)을 보내서 토지를 매입하고, 5000원을 주고 중국 광동 기생을 사서 동거하고 이 기생과 자신이 쓸 5000원짜리 다이아몬드 반지 2개를 구입하고,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하루 방값만 20루블씩 하는 고급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김립 공금횡령 의혹에 대한, 김철수의 주장
    
 이동휘.

이동휘.ⓒ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이르쿠츠크파는 상하이파가 받아온 자금을 도중에 가로챘던 그룹이다. 그런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보고는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르쿠츠크파도 진정성을 갖고 독립운동을 했겠지만, 상하이파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사적 감정이 개입돼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김립의 횡령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은 새겨서 듣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김철수는 정반대 주장을 했다. '김철수 친필 유고'에 따르면, 그는 "여기에 먼저 해둘 말이 있으니, 문제의 40만원 건이다"라고 한 뒤 "세상에 떠도는 말이 많지만, 나만큼 확지(確知)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기만큼 이 문제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 뒤, 이렇게 증언했다.
 
"이동휘·김립 등은 그 돈으로 공산당 창립운동을 전개했다. 우리가 내지에서 상해 도착, 당 결성 시엔 18만원 남았다. 그래서 3만원은 김립에게 주고(그때 김립은 김구 일파가 죽이려 함으로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그 돈 3만원은 김립의 전 회계에게 맡기고) 15만원만 공산당에서 책임지고 쓰기로 ······"
 
이에 따르면, 김립이 상해에 왔을 때 남은 돈은 정확히 18만 루블이었다. 이 금액만 남게 된 것은 이동휘가 공산당 운동에 썼기 때문이라는 게 김철수의 주장이다. 40만 루블 중 3만이 김립에게 별도로 제공됐지만, 김립이 김구를 피해 은신 중이었기 때문에 김립 측근에게 제공됐다고 한다. 김립이 개인 용도로 사용한 돈은 없었다는 것이다.
 
김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동휘계는 처음에는 임시정부 활동에 돈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여타 세력들이 이동휘의 주장을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 진영을 위해서만 돈을 썼다고 한다.
 
이동휘와 노선이 다른 세력들은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을 신뢰했다. 백범 김구 역시 그러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이렇게 말했다.
 
"한형권이 그 돈을 지니고 서베를린에 도착할 때에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 김립을 밀파하여 한형권을 종용해서 빼돌렸다. 그 금괴는 임시정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김립은 그 돈으로 북간도의 자기 식구들을 위해 토지를 매입했고, 이른바 공산운동자라는 한인·중국인·인도인에게 그중 얼마를 지급했으며, 자기는 비밀리에 상해에 잠복해 광동 여자를 첩으로 맞아 향락에 빠졌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반병률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고려공산당의 파쟁에서 비롯된 이러한 기사 내용이 상해 임정 측에 의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비판하는 근거, 특히 김립에 대한 공금 횡령 혐의의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립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바로 상해파의 라이벌이었던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측에서 퍼트린 내용이 김구의 <백범일지>에 그대로 기록되어 전해진 것이다."
 
이르쿠츠크파에 의해 제기된 공금 횡령 혐의는 김립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원인이 됐다. 1922년 1월 26일 임시정부는 이동휘를 성토하는 한편 "(김립의) 그 죄, 극형에 처할 만하다"고 선언하는 포고문을 발포했다. 그 뒤 벌어진 상황에 대해 반병률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결국 이 포고문은 김립에 대한 사형선고가 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보름이 채 안 된 2월 10일 아침 김립은 상해의 파오퉁 거리에서 백주 대낮에 오면직·노종균 두 한인 청년에 의하여 7발을 맞고 즉사했다."
 
김립은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열혈 투사였다. 하지만 공금 횡령 혐의를 받고, 김구가 보낸 자객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공동의 적, 일본을 앞에 두고 극도의 분열을 보인 독립운동 역사 속의 슬픈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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