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터 오브 마인> 스틸컷

<도우터 오브 마인> 스틸컷 ⓒ 씨네룩스

 
'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로 모성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는 좀처럼 '막장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낳은 엄마는 아이를 낳은 사실을 숨기고 신분을 세탁한 채 살아가는 비정한 엄마로 등장하고, 기른 엄마는 아이를 입양한 사실을 숨기느라 전전긍긍하며 계속 숨기기 위해 비정해지는 엄마로 나타난다.

낳았건, 키웠건 '비정한 모성'이라는 유구한 오해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재생된다. 낳는 일과 기르는 일은 누가 더 제대로의 모성을 가지고 있냐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낡은 이분법, 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를 묻는 어리석음을 가볍게 차버리는 영화가 있다. 바로 지난달 25일 개봉한 <도우터 오브 마인>이다.
 
한 엄마, 안젤리카
 
티나(발레리아 골리노 분)와 안젤리카(알바 로르와처)는 친구다. 티나는 의지할 곳 없이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는 안젤리카가 안타깝다. 안젤리카의 삶은 총체적 난국이다. 알코올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성적으로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다. 티나는 종종 들러 술에 절어있는 안젤리카를 보살펴주곤 한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한 안젤리카는 사는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데, 곤궁한 안젤리카는 빚을 갚을 아무런 방도가 없다. 집을 뺏기고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안젤리카는 티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티나의 딸, 비토리아(사라 카수 분)를 데려와 달라는.
 
안젤리카가 임신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의지할 피붙이 하나 없으니 적막강산이었다. 그때 그녀의 출산을 돕고 그녀에게 힘을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티나였다. 안젤리카는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 아버지도 없이 아이를 기를 자신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티나에게 아이를 주기로 한 결정은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이를 입양시키는 일이 아이를 품고 있었던 열 달을 지우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보냈다고 해서 죄책감을 말끔히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만드는 일에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가 공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은 언제나 여성 혼자 지게 되는 일은 동서양을 막론한다. 낳았지만 잘 키울 수 없다면, 더 나은 엄마를 찾아주고 싶은 것 또한 모성이다. 티나는 안젤리카로서는 가장 믿을만한 엄마감이었다.
 
또 한 엄마, 티나
 
 <도우터 오브 마인> 스틸컷

<도우터 오브 마인> 스틸컷 ⓒ 씨네룩스

 자식을,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세간의 눈총을 받던 티나는 비토리아를 키우기로 한다. 갓난아기를 10년 동안 사랑으로 키운 사람에게, 낳은 정과 기른 정의 상관성을 묻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슴으로 낳았다'느니 하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연약한 생명을 사람으로 키워낸다는 것엔, 낳는 것 이상의 헌신이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엄마에게 있어 실상, 모든 것을 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티나는 애지중지 키운 비토리아가 생모의 존재를 안다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한다. 비토리아가 자기 몰래 안젤리카를 만나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티나는 분노한다. 티나는 안젤리카와 대립하게 될까?
 
두 엄마의 딸, 비토리아
 
비토리아는 10살에 접어들고 있다. 아직 여성의 신체적 성징은 없지만, 차오르는 호기심으로 제법 어른의 세계를 힐끗대며 당돌한 시간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비토리아는 이미 안젤리카를 시장통에서 조우했는데, 안젤리카는 남자와 공공장소에서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벌이다 비토리아에게 들킨 바 있다.
 
비토리아는 안젤리카를 만난 후 이상한 끌림을 느낀다. 이 끌림은 티나에게 말하지 않고 안젤리카를 찾아 가게 한다. 엉망으로 취해 있지 않을 때, 안젤리카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비토리아에게 서툴지만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을 내보인다.

티나에 비해 충동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안젤리카는 비토리아에게 좀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해준다.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과 교감하는 법을 알려주고, 바닷물 속에서 잠수하여 숨 쉬는 법을 전수시킨다. 티나와는 전혀 다른 안젤리카의 삶의 방식은 비토리아를 매혹시킨다. 안젤리카가 자기를 낳아 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한 비토리아는 더욱 대담해진다.
 
비토리아는 두 엄마 사이에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티나와 있으면 안젤리카가 생각나고, 안젤리카와 있으면 티나에게 미안하다. 집을 뺏기지 않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안젤리카가 비토리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자, 비토리아는 화를 내지만, 결국 모험을 감행한다. 두려움과 미움을 누르고 작은 구멍에 몸을 비집어 넣으며 비토리아가 통과시킨 것은, 실상 여린 몸이 아니라, 아이라는 세계였다. 즉, 낯선 지대를 통과하며, 유약한 세계를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작은 구멍을 통과한 짧은 여행은 '성장의 통과의례'로서 비토리아를 한 뼘 크게 만든다. 살아갈 날들에 무겁게 드리울지도 모르는 억장을 다치지 않고 들어낼 수 있게 해준 셈이다. 해보니 별것 아니라는 자신감은 보다 주체적인 삶으로 그녀를 인도할 것이다. 0과 1은 다르듯이, 한 번 해본 것과 해보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하지 않던가.
 
연약하게 소비되던 아동성을 무너뜨린 비토리아
 
 <도우터 오브 마인> 포스터

<도우터 오브 마인> 포스터 ⓒ 씨네룩스


비토리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놓고 벌이는 엄마 둘의 선택권 갈등에서, 그 선택권을 엄마들에게 양도하지 않는다. 엄마 둘 중 누군가 자신을 선택하게 두는 대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껏 영화 등의 텍스트에서 아동을 수동적, 피해자적으로 다루는 진부한 방식을 영리하게 극복한다. 누구에게 선택당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비토리아는 어른들의 폭주에 휘둘리지 않고 제 생각을 견지하며, 연약하게 소비되던 그간의 아동성을 무너뜨린다.
 
두 엄마의 딸, 비토리아는 엄마 둘을 닮을 수도 있고 닮지 않을 수도 있다. 비토리아는 티나보다 다이내믹하게 하지만 책임지는 인생을, 안젤리카보다 단단하게 하지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도우터 오브 마인>은 엄마 둘이 만든 모성 서사가 아니다. '나의 딸'이 아닌 '우리의 딸', 비토리아가 두 엄마에게 선물한 창조적 모성 서사다. 이런 이유로 <도우터 오브 마인>의 히어로는 단연코, '비토리아'다. 비토리아는 어떤 엄마도 선택하지 않으면서 두 엄마 모두를 품는 새로운 딸의 길을 어리지만 용감하게 보여 준다.

지난해 방송된 tvN 드라마 <마더>에서 '윤복'은 비록 어리지만, 누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지를 명확히 판단한다. 자신을 구하려는 '수진'의 진정성과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수진과 함께 생모를 떠나는 대담한 도전을 벌인다. 윤복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통제하기 위해, 저항과 도전을 반복한다. 자신을 사람답게 살게 해 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어른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판단으로 믿으며 자신을 지켜나간다. '윤복'은 학대당하던 '혜나'를 훌륭히 극복하며, '학대받은 자 불행하다'는 오래된 암시를 말끔하게 지운다. 윤복과 마찬가지로 비토리아도, 아이는 무력한 존재가 아님을, 자기 앞의 생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음을 도도하게 알려 준다.
 
티나와 안젤리카는 이제 더 이상 "비토리아에겐 우리보다 나은 엄마가 필요했어"라는 쓰린 회한으로 가슴을 저미지 않아도 된다. 당찬 '비토리아'가 두 엄마의 억압당한 '모성 신화'를 그렇게 고통받을 이유 없는 일로 치환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두 엄마는 기구한 모성 따위에 주눅 들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게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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