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스 포스터

▲ 바이스 포스터 ⓒ 콘텐츠판다

  
선한 얼굴을 한 악마가 있다. 좋은 남편, 다정한 아버지의 탈을 쓰고서 지구 저 편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결정을 내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 나치 친위대 장교로 유대인 말살작업을 지휘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뒤 한나 아렌트가 남긴 소감도 그와 같은 것이었다. 때로 거대한 악은 매우 평범한, 심지어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인간에게서 발현한다.
 
담배 끊듯 코미디를 끊어버린 아담 맥케이의 두 번째 사회풍자극 <바이스>는 '평범한 악'에 주목한다. 9·11 테러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ISIS의 탄생 이면에 숨겨져 있던 주동자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 분)가 주인공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이라 불린 체니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벌였는지를 스크린 위에서 까발리는 게 맥케이와 <바이스>의 목표인 듯하다.
 
체니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은 있겠지만 그가 누구이며 위에 언급한 사건들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알았다면 맥케이가 그에게 주목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체니는 강력한 부통령이자 비밀스러운 권력이었다. 그 스스로 말을 아끼고 주목을 피하는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누구도 체니의 실체를 공개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지 W. 부시가 전 세계인이 시청하는 TV 앞에 서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와중에, 체니는 전쟁이 가져올 이득을 조용히 챙겨서 주머니에 담을 뿐이었다. 요컨대 도널드 럼즈펠드,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를 알면서도 체니가 생소한 게 우리의 탓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노오력' 만으론 부족하다
 
바이스 <빅쇼트>에 이어 다시 한 번 아담 맥케이 감독과 함께한 스티브 카렐과 크리스찬 베일.

▲ 바이스 <빅쇼트>에 이어 다시 한 번 아담 맥케이 감독과 함께한 스티브 카렐과 크리스찬 베일. ⓒ 콘텐츠판다

 
 
맥케이는 영화 시작에 앞서 제작진이 'X나(Fu*king)' 최선을 다했다는 자막을 띄운다. 정치풍자극이란 점을 감안해도 파격적인 이 문구는 사건과 사람을 다루는 <바이스>의 태도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코미디 전문가의 성역 없는 연출임을 알리는 경쾌한 선전포고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충분한 곳까지 도달하진 못했다는 걱정도 함께 읽히는 건 왜일까. 말하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치밀한 작품이었다면 이런 문구 따윈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영화는 정치인 딕 체니의 탄생부터 그가 걸어온 길,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선 뒤 내린 결정과 후폭풍,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체니 가의 권력을 차례로 살핀다. 한 편의 전기영화로 봐도 무방할 전개 가운데 미국의 정치와 사회가 저지른 실패와 잘못을 비추는 것이다.
 
예일대에서 퇴학당한 시골 출신 망나니가 어떻게 정계에 진입해 승승장구하게 됐는지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알콜중독 노동자에서 최연소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승진하기까지 단 11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에 대한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심지어는 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체니와 각별히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려진 아내 린 체니(에이미 아담스 분)가 그의 변화와 성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설정이 특히 그렇다. 체니가 무릎 꿇고 울며 변화를 요구하는 아내 앞에서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됐다는 건 크게 설득력이 없는 부분이지만, 맥케이에겐 이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아무튼 정신을 차린 체니는 정계에 입성해 도널드 럼즈펠드(스티브 카렐 분)와 연을 맺고 그의 밑에서 승승장구한다. 럼즈펠드가 헨리 키신저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실각한 뒤에도 한동안은 자리를 지켰지만, 워터게이트로 공화당 정권이 교체되자 끝내 정계를 떠난다.

맥케이는 이쯤에서 가짜 크레디트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데, 이쯤에서 은퇴했다면 체니를 향한 영화를 만들 일도 없었을 거란 농담 섞인 어퍼컷이 아닐까 싶다. 이밖에도 영화는 '나레이터를 영화에 등장시킨 이유가 밝혀지는 장면' 등 창의적인 시도를 거듭하면서도 체니를 향한 고발성 짙은 작품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딕 체니를 향한 집념, 도리어 독이 됐다
 
바이스 딕 체니 역을 위해 몸무게를 크게 늘리는 등 많은 변화를 감행한 크리스찬 베일. 외모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 딕 체니가 되기 위해 극중 딕 체니가 알고 있었을 법한 정보를 그대로 습득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 바이스 딕 체니 역을 위해 몸무게를 크게 늘리는 등 많은 변화를 감행한 크리스찬 베일. 외모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 딕 체니가 되기 위해 극중 딕 체니가 알고 있었을 법한 정보를 그대로 습득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 콘텐츠판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체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모든 문제의 끝엔 체니 개인이 있다. 폭스 뉴스로 대표되는 언론, 코흐 형제로 대변되는 기업 모두 다루자면 한도 끝도 없는 중요한 주체이지만, 영화에선 체니의 곁을 스쳐지나는 조연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이스>의 근본적 한계다.
 
이는 감독의 전작 <빅쇼트>와도 큰 차이를 보인다. <빅쇼트>는 한 명의 실존인물 대신 네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2007년 발생한 일명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태출) 사태를 조망한 이 영화는 금융당국이나 금융회사 수뇌부가 아닌 금융업계 외곽의 네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덕분에 자유롭게 사태를 해부할 수 있었다. 인물 어느 하나에 불필요한 노력을 쏟는 대신,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바이스>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심지어 체니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에도 그랬다. 영화 내내 체니보다 매력적인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말 그대로 스치듯 지나칠 뿐이다.

UN에서 이라크에 선제 타격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연설하며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콜린 파월(타일러 페리 분), 티파티로 주목받은 찰스·데이비드 코흐 형제, 폭스뉴스 창립자 로저 에일스, CIA 국장이던 조지 태닛 등에 대한 정보가 체니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만약 영화가 이들에게 관심을 분산했다면, 부족한 정보로 체니라는 인물 하나를 해석하는 데 허덕이는 대신 훨씬 폭넓은 시각으로 사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미 <빅쇼트>에서 훌륭하게 해낸 방법이니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돈만 없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바이스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 미국 전 부통령의 실체에 주목한 <바이스>는 조지 W. 부시(샘 록웰 분) 전 대통령이 얼마나 무능한 인물이었는지를 과하게 느껴질 만큼 심하게 풍자한다.

▲ 바이스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 미국 전 부통령의 실체에 주목한 <바이스>는 조지 W. 부시(샘 록웰 분) 전 대통령이 얼마나 무능한 인물이었는지를 과하게 느껴질 만큼 심하게 풍자한다. ⓒ 콘텐츠판다

  
여러모로 <바이스>는 아쉬운 영화가 되었다. 영화 초반 '하루종일 일해도 월급이 줄어드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언급하며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려 했던 포부에 한참 미치지 못한 작품이 됐다. 체니라는 개인에 대한 관심이 드러내고자 했던 사건 전체보다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옳은 방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부족한 정보를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른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바이스>가 좋은 영화냐 묻는다면 내 답은 '그렇다'이다. 이 영화에 이어 체니는 물론 완전히 끝나지만은 않은 지난 시대를 겨냥한 책과 영화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와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상당 부분을 <바이스>에 의지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 영화가 보인 용기와 노력이 그런 수준이다.
 
<빅쇼트>가 거둔 대단한 성취에도 맥케이가 걸어온 길, 또 걸어갈 길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체니의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접촉한 모든 메이저영화사가 나가떨어졌고, 메건 앨리슨의 안나푸르나가 뒤늦게 제작에 나섰지만 흥행에 참패하며 최소 15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맥케이의 다음 영화가 흥행을 고려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측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맥케이는 여전히 주목해 마땅한 작가다. 양적으로 팽창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는 특히 더 그렇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보다 뒤늦게, 심지어는 훨씬 더 뒤떨어진 접근법으로 다룬 게 한국영화의 현실이다. 구중궁궐 안에서 허수아비 대통령을 앞세우고 제 이익을 챙긴 부통령 이야기를 맥케이는 아직 그 부통령의 세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에 뒤처진 게 오직 자본과 기술력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던 강수연과 <베테랑>의 외침이 더는 공허한 무엇으로 남아선 안 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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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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