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녹두꽃>.ⓒ SBS

   
녹두장군 전봉준과 1894년 동학혁명을 다룬 SBS 금토 드라마 <녹두꽃>이 지난 4월 26일 첫 방송을 탔다. 지난 주 방송에서는 희대의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장광 분)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1회~3회 방송분에서는 세금을 거둔다는 허위 명분으로 주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조병갑의 모습과 이에 맞서 봉기를 결행하는 고부군민들의 모습이 묘사됐다. 조병갑이 주관하는 잔치 현장이 농민군에 의해 뒤엎어지고 조병갑이 외지로 도주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비쳐졌다.
 
조병갑은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인물이다. 왕조의 뿌리를 흔드는 데 기여했다. 나쁜 의미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전봉준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베일에 가려진 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조병갑은 정조 임금의 증손자인 헌종 때 출생했다. 태어난 해는 1844년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조카이자, 관찰사를 지낸 조병식의 사촌이며, 태인군수를 지낸 조규순의 서자다.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이다.
 
친정조카와 수시로 편지를 교환한 명성황후

조병갑은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소과(1단계 과거시험) 급제자인 생원·진사의 명단이 담긴 <사마방목>에도 그의 이름이 없고, 대과(2단계 시험) 급제자의 명단이 담긴 <국조방목>에도 그의 이름이 없다. 그런 그가 탐관오리들이 꿈꾸는 '노른자위' 고부군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뇌물 제공 덕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명성황후와 민씨 가문에 뇌물을 제공했음을 추론케 하는 기록이 있다. 명성황후는 친정조카 민영소와 수시로 편지를 교환했다. 그 내용의 상당부분은 인사청탁에 관한 것이었다. 관직 희망자가 민씨 가문에 뇌물을 주면, 민영소가 황후에게 보고하고, 황후는 고종에게 보고했다.
 
그런 편지 중 하나에 "조병갑이는 그러하나, 그 색(色, 자리) 외 아니 나는 것을 할 수 없으니, 다른 데로나 하겠다"는 황후의 글이 적혀 있다. 조병갑의 경우에는 그 자리 외에는 생기지 않는 것을 어쩔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내용이다.
 
조병갑의 인사청탁으로 명성황후가 고심하는 흔적을 보여주는 편지다. 이렇게 왕실에까지 뇌물을 제공하고 관직을 받았으니, 본전을 찾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의 호주머니를 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는 데마다 탐욕스럽고 가혹했다"는 조병갑
 
 본문에 인용된 명성황후의 편지. 이기대 편저 <명성황후 편지글>에 수록돼 있다.

본문에 인용된 명성황후의 편지. 이기대 편저 <명성황후 편지글>에 수록돼 있다.ⓒ 저작권 만료

  
조병갑은 고부군수가 되기 전부터 탐관오리로 유명했었다. 고종시대 역사를 기록한 황현의 <매천야록>은 "(조병갑은) 가는 데마다 탐욕스럽고 가혹했다"고 말한다. 다른 지역 군수를 지낼 때도 부정부패가 심했던 것이다.
 
지방 수령의 임기는 5년이었다. 그런데 고부군수의 임기는 평균 1년 6개월이었다. 한 해에 여러 차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자리였다.
 
조병갑이 고부군수 자리를 지킨 기간은 2년 정도다. <녹두꽃>에도 묘사된 것처럼, 그는 하마터면 자리를 빼앗길 뻔했었다. 동학혁명 직전에 익산군수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익산에 안 가고 버티면서 중앙에 로비를 한 결과, 그 자리에 다시 임명될 수 있었다. 고부군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것이다.
 
고부군에 부임한 뒤 조병갑은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고부군에 흉년이 든 것이다. 농민들보다도 그의 마음이 더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도 세금은 풍년 때처럼 거둔다는 각오로, 각종 명목을 만들어 세금과 기부금을 악착같이 징수해댔다.
 
그런 상황이, 전봉준이 체포된 뒤에 나온 진술서에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조병갑은 주민들이 좋은 쌀로 세금을 바쳐도 "이 쌀은 품질이 떨어지니, 이 쌀로 내려면 좀더 내라"는 식으로 쌀을 추가로 징수했다. 그런 뒤, 추가분을 국고에 넣지 않고 자기가 착복했다. 이 때문에 고부군민들은 법에서 정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쌀을 납부해야 했다.

사기행각도 서슴지 않았던, 조병갑
 
 조병갑(장광 분).

조병갑(장광 분).ⓒ SBS

  
조병갑은 사기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황무지를 농민들에게 무상 불하한 뒤 "세금을 안 걷을 테니 한번 열심히 지어보라"며 주민들을 격려했다. 세금을 걷지 않겠다는 공문서까지 발부해주었다. 그래놓고는 막상 황무지가 개척되고 추수할 때가 되자, 포졸들을 동원해서 농작물을 강제로 걷어갔다.
 
이뿐 아니다. 일반적인 탐관오리들도 겁내는 일을 그는 과감히 저질렀다. 돈을 뽑아낼 목적으로 지역 유지들까지 괴롭힌 것이다. 지주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뒤 돈을 강탈했다. 부모에게 불효한 죄, 형제·친척들과 화목하지 않은 죄, 음행을 한 죄 등을 뒤집어씌운 뒤, 뇌물을 받고 사건을 종결했다. 부자들에게 망신을 주는 방법으로 돈을 뜯어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둬들인 돈이 2만 냥이나 됐다. 조병갑의 만행을 죄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조병갑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더 많은 돈을 챙길 목적으로 야심차게 벌인 지역개발사업이 그를 유명한 악당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녹두꽃>에도 등장한 것처럼, 고부군에 만석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둑을 쌓아 만든 저수지였다. 그런데 조병갑은 만석보를 새로 만들겠다며 기존 만석보 옆에 새롭게 둑을 쌓았다. 그는 공사 자재를 마련한다면서 민간 소유의 산에서 나무를 벌채했다. 또 일당 대신 저수지 무료 이용권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방법으로 노동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막상 공사가 끝나자, 그는 표변했다. '혹시나' 하고 도왔던 백성들은 '역시나' 하며 한숨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병갑이 애초의 약속을 뒤집고 농민들에게 과도한 저수지 이용료를 부과한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이 동학혁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주민들을 자극했으니, 농민봉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사형을 받았는데... 조병갑은 승승장구

<녹두꽃> 속의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잔치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의 조병갑은 그런 둔감하지 않았다. 상당히 민첩했다. 농민군이 습격하기 전에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일찌감치 도주해버렸다. 관청에서 빠져나온 그는 변장한 상태로 한밤중에 고부군을 탈출했다.
 
몇 달 뒤 조병갑은 의금부에 체포됐다. 그가 받은 형벌은 유배형이다. 민중봉기를 초래하고 국고를 횡령했다는 죄가 인정됐다.
 
그런데 행운이 찾아왔다. 일본군이 동학군을 진압하고 조선 정부를 장악한 것이다. 덕분에 조병갑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일본군이 조병갑을 살린 셈이다. 동학군이 승리했다면 당연히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만, 동학군이 패배하고 반역당으로 규정된 덕분에 불명예를 입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행운이 이만저만 많은 악당이 아니었다.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은 사형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면, 조병갑은 승승장구했다. 동학전쟁 4년 뒤 그는 법부(법무부) 국장에 임명됐다. 고등재판관에도 임명됐다. 조병갑한테 재판을 받은 피고인 중 하나가 동학교주 최시형이었다. 조병갑은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조병갑 같은 악당이 처벌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승승장구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왕조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 사람들이 활개치고 살았으니, 동학혁명 16년 뒤 조선이 멸망한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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