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몽상가들> 포스터

영화 <몽상가들> 포스터ⓒ 오드


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영화 축제가 한창이던 2003년 부산의 가을. 부산 남포동에 위치한 한 극장은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새 작품 <몽상가들>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영화광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중엔 나도 있었다.

1968년 파리를 배경으로 세 명의 영화광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줄거리는 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고, 부산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에 비친 세 명의 배우들을 통해 관객들은 청춘과 사랑, 혁명과 영화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도대체 이 배우들은 누구란 말인가? 에바 그린, 마이클 피트, 루이 가렐.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이름들이지만 당시에는 낯선 얼굴, 낯선 이름이었던 이들을 발견하게 된 것 만으로도 이 영화를 본 의미가 충분하다고 느꼈을 만큼, 이들은 단숨에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오드

 
변화와 혁명의 꽃망울을 머금고 있던 1968년 파리의 이른 봄. 미국인 유학생 매튜(마이클 피트)는 공부보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네마테크는 영화광들로 언제나 북적였고, 이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일반 관객들과 씨네필, 그리고 영화인들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한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시네마테크 관장, 앙리 랑글루아를 강제적으로 해임시키자 영화인들과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고, 시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매튜는 시네마테크 정문에 쇠사슬로 팔이 묶인, 일종의 시위 퍼포먼스 중이던 이자벨(에바 그린)과 그녀의 쌍둥이 형제, 테오(루이 가렐)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단번에 서로에게 매료되고, 남매는 매튜를 자신들의 세계로 초대한다. 위험하리만치 매혹적인 세계로의 초대에 매튜는 기쁜 마음으로 응하고, 남매의 부모가 여행을 떠나있는 한 달 동안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자벨과 테오의 초대를 받은 첫날, 매튜는 부르주아 지식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대한 아파트에서 그들의 부모와 함께 식사한다. 그들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유명 시인이고, 식사 테이블에서 이들은 아버지와 문화, 정치, 철학에 대해 서로 거리낌 없이 논쟁한다. 테오는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즉 자신의 아버지를 비겁하다고 비판하지만 매튜에게는 부모와 이런 논쟁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테오가 품고 있는 반발심, 변화와 혁명에 대한 열망은 기성세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 혁명의 적으로 기성세대를 간주하고 있다. 결국 자식을 망치는 건 부모이기에 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정신 교육을 새로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부족하지만 그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과격함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오드

 
책들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 손님방에서 잠을 청하는 매튜는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소속감을 느끼고, 그동안 꿈꾸었던 우정을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테오와 이자벨의 유별난 친밀감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소외감을 그에게 안겨 주는데, 테오는 자신과 이자벨이 몸이 아닌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샴쌍둥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곧 이자벨이며 이자벨은 또한 자신이라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들 남매의 어깨엔 같은 모양의 점이 같은 위치에 있다. 서로가 유일한 친구인 이들 남매의 세계에 초대된 사람은 매튜가 유일하지만 매튜는 이들과 동등한 입장이 아닌 관찰자, 일종의 관객과도 같은 역할로 이들의 일상을 공유한다.

모택동 포스터와 중국 공산당원들의 사진, 그리고 각종 영화 포스터들이 페인트칠이 벗겨져 지저분한 벽 위에 붙어있는 테오의 방, 턴테이블에서는 제니스 조플린, 샤를 트레네의 음악이 흐르고, 청춘의 한 가운데 있는 매튜, 테오, 이자벨은 각자 책을 읽거나, 고급 와인을 마시면서 영화, 정치, 음악, 등등 여러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에 대해,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에 대해, 베트남 전쟁과 그곳에서 싸우고 있는 또래의 군인들에 대해,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매튜와 테오의 의견은 사사건건 부딪힌다. 매튜가 비폭력을 지향하고, 테오가 모택동을 우상화하는 것은 그들 개개인에 대한 이해보다 그들이 1968년의 청춘이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오드

 
이들이 '영화'에 취해 있는 것처럼, 그 시대를 알건 모르건, 관객들은 이들에게 취해 개연성을 따지지 않고 영화에 빠져든다.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영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스크린 속 이미지의 에너지를 누구보다 먼저 보고 싶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훼손되기라도 할 까봐 극장에 가면 항상 앞자리에 앉는다고 매튜의 나레이션은 고백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에서라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지만(<어벤저스:엔드 게임> 대형 상영관 상영 암표가 등장했다는 기사를 보면 대형 스크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이미지의 생동감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것은 21세기에도 여전한 것 같다) 영화 속 대사와 행동들을 모방하는 것이 일상이자 놀이인 세 청춘들을 통해 그들의 삶에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밥을 먹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출제자는 언제라도 영화의 한 장면을 재연할 수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그 영화의 제목과 개봉한 해를 맞혀야 하고, 못 맞힐 시 제출자가 요구하는 벌칙을 행해야 한다. 매튜는 이자벨과 테오가 내는 문제를 훌륭하게 맞힘으로서 그가 이들 멤버로 충분한 자격이 된 다는 것을 증명하고, 남매와 함께 장 뤽 고다르가 연출한 <국외자들>(1964)에서의 한 장면(세 주인공이 손을 맞잡고 함께 루브르를 최 단시간 안에 둘러보는)을 재연한다.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유대감이 이들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고, 이들은 자신들만의 게임을 계속 이어간다.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오드

 
영화를 통해 우리의 세계는 다른 세계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몽상가들> 속 세 주인공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투쟁하는 동안 부르주아 아파트 안에서 시간도 잊고, 외부와 단절된 채, 스스로를 격리시킨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매튜는 홀로 고립 된다. 이자벨과의 관계가 연인 관계로 한 단계 발전했음에도 이자벨은 테오와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민과 경찰이 대립한 어느 밤, 이자벨과 테오는 화염병을 들고 시위대 속으로 들어가고, 폭력에 동의 할 수 없었던 매튜는 남매와 이별한다. 이념의 실현 방식에 대한 생각 차이가 아니었어도 그는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들 남매와 결국 헤어졌을 것이다. 짧았지만 너무도 강렬했던 이자벨, 테오와 함께 했던 추억은 1968년 파리의 혁명처럼 그렇게 끝이 난다.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오드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이 시대의 청춘들이 믿었던 모택동과 중국 공산주의가 결국 허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지만 이 영화의 원작자, 길버트 아데어와 연출을 맡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몽상가들>의 주인공들과 세대가 비슷해서인지, 이 시대를 담는 그들의 시선엔 향수가 어려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68혁명이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프랑스 국민들의 인식을 변화시켰으며 유럽 전역을 비롯해 북미, 아시아(일본)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영화는 혁명의 표면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영화와 혁명의 허상 속에 도피해 있는 세 청춘들을 보여줄 뿐. 그럼에도 관객들은 이들 청춘을 한심하게 여기기는커녕 이들의 매력에 취하게 되는데 이는 곧 이들을 연기한 에바 그린과 마이클 피트, 루이 가렐의 매력에 취한 것과 다름없다. 단지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단지 연기를 잘해서도 아니다. 영화의 성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 이들의 등장은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하다고 감히 말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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