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1월 21일 오전 파리 혁명광장(현 콩코드 광장) 한복판에 하늘 높이 치솟은 단두대(기요틴)를 향해 손이 뒤로 묶인 한 남자가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그는 삼색 휘장(자유, 평등, 연대를 의미하는 프랑스 국기)과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부터 광장을 가득 메운 민중, 북을 두드리는 군악대까지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며 말한다.

"내 백성은 어디에 있는가? 선량한 내 국민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목소리는 군중의 외침과 군악대 북소리에 묻히고, 그의 목은 기요틴의 칼날이 내려오는 곳에 밀어 넣어진다. 기요틴의 밧줄이 끊어지자 사방에 피를 튕기며 목이 잘리고 목 없는 몸뚱이가 관에 담긴다. 잠시 후 집행관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왕의 머리를 높이 쳐들어 단두대 아래 모인 민중들에게 보여준다. 피의 혁명을 통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역사의 전환기를 맞는 순간이다.
 
 영화 <원 네이션> 포스터

영화 <원 네이션> 포스터ⓒ 세미콜론 스튜디오


프랑스 혁명 23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프랑스 영화 <원 네이션>에서 루이 16세가 처형 당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원제는 '백성과 그의 왕'이다. 영화는 1789년 10월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의 첨탑을 부순 것부터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광장에서 공개처형하는 장면까지 담아낸다.
 
주목할 점은 혁명의 주체로서 가장 밑바닥에서 처철한 삶을 살며 노예처럼 굴종하던 부랑자와 세탁부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 두 주인공이 혁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변해가는 모습을 핵심적으로 다뤘다.
 
 영화 <원 네이션>의 한 장면

영화 <원 네이션>의 한 장면ⓒ 세미콜론 스튜디오


주인공인 바질(가스파르 울리엘)은 이름을 숨기고 떠도는 최하층민 부랑자다. 바질과 사랑에 빠지는 프랑수아즈(아델 하에넬) 역시 세탁부이며, 하루 13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견디고 낳은 아이를 굶주림으로 잃은 파리의 빈민층 노동자다. 바질은 프랑수아즈와 사랑을 하고 아들을 얻은 후 떠돌이 노예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 살기위해 혁명에 가담한다. 정착을 위해 유리 세공 기술도 배운다. 프랑수아즈는 1789년 베르사이유 궁으로 행진하는 여성노동자 대열에 참여한 뒤 시민혁명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며 인권과 시민 의식에 눈을 뜬다.
 
영화는 태양으로 상징되는 절대 왕권을 보여주는 장면과 그 절대 권력이 민중에 의해 무너지는 장면들을 곳곳에 대조적으로 배치한다. 절대왕정의 부와 권력의 장치를 보여주는 베르사유 궁전, 바스티유 감옥 첨탑, 민중의 해방구가 되는 혁명 광장과 의회, 유리세공과 빨래터 등이 보여주는 고된 파리 민중의 삶,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성난 군중이 찢어 날리는 이불 깃털, 떨어진 솜 위를 맨발로 거니는 소녀까지. 모두 세심하게 봐 두자.
 
 영화 <원 네이션>의 한 장면

영화 <원 네이션>의 한 장면ⓒ 세미콜론 스튜디오


영화는 성 금요일에 왕인 루이 16세가 가난한 아이들의 발을 씻기고 발에 키스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긴 장면을 재현한 것인데 한 아이의 "나도 곧 나막신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비만 오면 진흙탕에 오물이 둥둥 떠다녀서 귀족은 높은 굽의 신발이 필요했다고 한다. 가난한 아이들이나 민중들은 오물이 넘쳐나는 곳을 맨발로 다녀야 했을 것이다. 진실로 가난한 아이들 삶을 살폈다면 발을 씻겨주기보다 나막신을 만들어 나눠주지 않았을까?
 
바스티유 감옥의 감시탑을 부수자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던 곳에 햇살이 비춘다. 죄수와 노동자들이 손에 비친 햇빛에 감격하며 소원기도를 하는 장면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햇빛과 나막신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혁명의 실질적 주체였으나 의석도 없이 테라스 주변에서 혁명 의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민중들 모습은 또 어떤가. 혁명의 핵심 행동세력이던 파리의 여성노동자들은 보통 선거가 도입된 지 100년이 지난 1848년에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떠돌이 부랑아 바질과 세탁부 프랑수아즈야말로 프랑스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잘 보여주는 주인공들이다.

바질은 닭을 훔친 죄로 팔에 노예의 문신을 새겨야 했다. 이후 이름마저 숨기고 떠도는 부랑아가 된다. '삼부회'(프랑스 구 신분제 의회)와 한 약속을 저버리고 외국으로 달아나려던 루이 16세가 잡혀오는 것을 보러 간 바질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백성으로서 예를 표한다. 떠돌이 노예로 살며 국민으로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고 국민의 권리도 누리지 못했지만 왕에게 무조건 경의를 표하는 순진한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에 씌워졌던 착고(죄수를 가두는 형구)와 팔에 채워진 쇠고랑이 풀리고, 자유를 꿈꾸기 시작한 바질은 그제야 '혁명을 통해 모든 인간은 국가의 새로운 주인이 돼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탁부 프랑수아즈 역시 마찬가지다. 굶주림으로 출산한 지 6일 만에 아이를 잃었지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차에서 던진 손수건을 주워 헝겊에 싸서 감춰뒀다 꺼내보는 체제 순응적인 인물이었다. 글씨조차 읽을 줄 모르는 무지렁이 민중이었던 그가 '노예로 100년을 사느니 자유롭게 한 시간을 사는 게 낫다'며 혁명 대열에 이름을 올리고 쇠스랑과 칼을 들고 혁명의 대열에 앞장서서 왕의 시위대와 싸운다.
 
귀족이나 민중의 대표가 부르짖는 '평등과 자유'는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산과 학식과 교양을 갖춘 부르주아를 위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잘 보여준다. 여성과 재산이 없는 사람은 투표할 수 없었다. 민중 대표들은 자리가 구분되어 차별하고 차별받는다. 가난한 자는 발언권을 얻기도 어렵고 어렵사리 발언권을 얻어도 야유를 받거나 무시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 <원 네이션>의 한 장면

영화 <원 네이션>의 한 장면ⓒ 세미콜론 스튜디오

 
1789년 10월 5일 굶주린 여성노동자 수천 명이 "빵과 밀을 달라",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치며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해 왕과 왕비를 파리로 끌어온다. 왕이 "저들이 레볼트(폭동)를 일으켰다"고 외치자 라로슈푸코는 "아닙니다. 이것은 '레볼루시옹(혁명: 필연적인 역사의 전환)'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대가 혁명을 요구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에 의해 강제로 파리로 잡혀 온 왕은 라파예트 등 중도파의 요구를 수용해 절대왕정 군주에서 입헌군주국 프랑스의 원수가 된다. "프랑스의 왕인 나는 헌법을 수호하며 그에 따라 위임된 권한을 성실히 행사할 것을 국민에게 맹세한다"고 선서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기고 1791년 6월 가족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도주하다 발각된다. 왕이 나라와 민중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다는 사실에 민중들은 격노한다. 
 
잡혀온 왕의 신병 처리를 놓고 고민하던 국민 공회(프랑스 혁명의 최종 단계에서 구성된 의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모두 듣고 투표를 통해 처형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다. 영화에서 한명씩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인상적인데 역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자코뱅 당 혁명 지도자 3인방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도 등장해 설전을 벌인다. 700여 명이 투표에 참석해 찬성 387, 반대 334로  왕의 사형이 결정되고 왕은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다.

9개월 뒤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도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공포정치의 문을 열었던 강경파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에서 처형 당한다. 혁명 당시 사형도구였던 단두대는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된 이후로 1977년까지 쓰여지다가 1981년 프랑스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된 이후 폐기되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나라의 촛불 혁명이 떠올랐다. 프랑스 혁명군은 왕의 목을 잘라 왕정의 막을 내리고 공화정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비폭력 평화 촛불 집회로 정권을 바꾸고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하나하나 드러나는 대통령의 비리에 분노한 시민들은 한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을 들었다. 연 인원 1700만여 명이 총 20여 차례 촛불을 들고 박근혜 탄핵을 외쳤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마침내 헌법재판소는 박근혜를 탄핵했다. 민중이 촛불집회로 정권을 바꿔낸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직도 거리에서 "빵과 자유"를 위한 외침을 이어가고 있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차별없는 평등 세상, 참 자유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민중에게 국가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 혁명의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 지난 20일 '3.1혁명 100주년기념범시민추진위원회' 서울평화영화제 추진기획단은 <원 네이션> 시사회를 마련했다. 지난 3월 아르헨티나 혁명을 다룬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를 상영해 좋은 반응을 얻은 이후 두 번째 시사회였다. 서울평화영화제 추진단은 1억 원의 시민 후원금으로 앞서 강정 평화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앞으로 북한 영화, 제3세계 영화 등 시민들이 원하는 다양한 분야의 공동체 영화 상영회를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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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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