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업전야> 포스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 일어선 철의 노동자들

영화 <파업전야> 포스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 일어선 철의 노동자들 ⓒ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멍키스패너를 높이 치켜든 기름때 묻은 노동자의 얼굴과 손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에 이르자 누군가 기립 박수를 쳤다. 함께 영화를 관람했던 '노투사' 백기완 선생도 야윈 손으로 오래오래 손뼉을 쳤다. 엔딩 크레디트가 채 올라오기도 전이었다. 영화가 끝자락으로 치달으며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벅찬 느낌과 감동을 표현한 것이리라.
 
최근 전태일재단과 영화동호인 모임 장산곶매, 명필름이 마련한 <파업전야> 가족시사회 자리의 모습이다. 시사회에 가족이라니 조금 낯설게 느껴졌지만, 영화가 끝날 때쯤 되니 '가족시사회'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1987년 치열한 노동자 대투쟁과 파업의 대열에 서 있었던 노동자들, 독립영화 제작자들, 1990~2000년대 여전히 파업 현장에서 때론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리에서 투쟁한 노동자들과 지금도 여전히 투쟁 중인 노동자들을 초대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에 힘을 받아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간 치열한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된다. 어용 노조, 구사대, 용역 깡패를 동원해 노조 결성과 노동자의 권리를 원천 차단하려던 사측에 노동자들은 파업과 가두 투쟁으로 맞선다. 7월에서 9월까지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인원은 200만, 파업 건수는 3300건에 달하며, 1200여 개의 신규 노조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독점대기업 사업장 중심으로 본격화 된 노동자 대투쟁

1987년 노동자 파업투쟁은 독점대기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7월 16일 현대미포조선 노조 결성 신고 서류 탈취 사건이 발생하자 회사의 행동은 전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됐고 8월 17~18일 4만여 명이 참여한 울산 현대그룹 노조연합 가두시위로 절정에 이른다. 8월 22일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 가두시위에서 이석규가 직격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으로 투쟁은 수도권으로 확산되어 9월까지 이어진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3개월간 전 지역·전 산업에 걸쳐 일어난 최대 규모의 노동자-대중 투쟁으로 기록된다. 선 파업·후 협상, 가두시위 등 87년 투쟁은 이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건설로 이어지는 자주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시작점이 되었다고도 평가받는다.
 
노동영화의 전설이 된 <파업전야>는 87년 노동자대투쟁과 파업 현장을 배경으로 만들었다. 그 엄혹한 시절 노동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급이 되었을까. 영화의 배경이 된 한독금속 노동자들은 탄압과 감시가 일상적이던 1889년 회사 측으로부터 일방적인 휴업을 통보받는다. <파업전야> 제작진은 노조간부를 중심으로 정상조업재개 투쟁을 벌이던 한독금속 사업장에서 합숙하며 촬영을 시작했다.
 
영화의 제작과정이나 배급은 험난했다. 제작 기간은 1년이 넘게 걸렸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영화가 파업을 조장한다면서 상영관에 최루탄을 터트리고 헬기까지 동원해 필름을 탈취하고 관객을 연행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영화 상영은 게릴라 투쟁을 방불케 했다. 경찰의 압수수색 정보를 미리 제보 받고 낡은 영사기와 가짜 릴을 준비해 압수당한다. 경찰을 혼란시키려 전국의 문화운동단체들은 '전국 동시상영' 작전을 펼쳤는데, 주말 단위로 전국적으로 동시다발 상영을 하는 것이었다. 자본가들과 정부가 왜 그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영화의 배급을 방해했는지는 영화를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일반인들의 정치, 사회적 의식을 마비시키려는 3S(영화, 스포츠, 섹스) 정책의 일환으로 1986년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프로야구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노동자들의 각성과 노조 결성, 치열한 투쟁을 막지는 못했다.
 
영화 <파업전야>는 의식있는 문화예술인과 노동계의 합작품이다. 영화적 실천에 동의하는 영화인들과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동료, 후배, 선배들이 후원금을 내놓았다고 한다. 출연료 대신 명예를 선택해 참여한 배우들, 영화 음악을 작곡한 가수 안치환, 보급에 힘을 모은 전국단위의 문화예술 단체가 없었다면 제작도 상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목숨 건 투쟁
  
 영화 <파업전야> 포스터. 민주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자 파업 투쟁을 그린 노동 영화.

영화 <파업전야> 포스터. 민주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자 파업 투쟁을 그린 노동 영화. ⓒ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파업전야>는 단순히 서른 해 전에 만든 노동 영화의 전설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현 주소는 30년 전과 크게 변하지 않았고 파업과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기계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노동자들이 700만 명을 웃돈다.
 
서른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자본가의 노조 와해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석탄 가루가 묻은 수첩과 동전 몇 개, 컵라면을 남기고 희생당한 고 김용균씨, 조선소에서 일하다 해고당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불법 회계조작으로 해고당해 10년을 거리에서 싸우다 복직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2007년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부당해고 당한 채 지금도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는 금속노조 콜텍지회 조합원 임재춘씨의 목숨을 건 사투는 노동자의 현 주소를 말해준다.
 
노조활동을 한다는 이유의 부당 해고를 당하고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것은 물론 성희롱에 시름하는 여성노동자, 이해 못 할 이유로 임금차별을 당하는 노동자 등 그들은 인권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 권리를 말하면 빨갱이나 불순 세력으로 몰아가는 자본가의 논리도 변하지 않았다.

노동절, 전설의 영화가 온다

1990년에 제작해 노동영화의 전설이 된 <파업전야>는 서른 해 만에 2019년 5월 1일 노동절에 극장에서 정식으로 재개봉을 한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한때 유행했던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제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참세상이 되었습니까?"
 
안타깝게도 노동자가 주인 된 세상,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참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여전히 일부회사에서는 노조할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여전히 거리에서 투쟁 중이고 때론 파업 중이다. <파업전야>는 바로 이런 우리 시대 노동자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영화다. 노동자로 사는 우리 모두가 이 영화를 봐야 하는 분명한 이유다. 오는 5월 1일 노동절 개봉.
노동영화 파업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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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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