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일본은 우리 영토를 수탈하고 조선 사람들을 일본이나 사할린 등지로 강제로 끌고 가 가혹한 노동착취를 일삼았다. 뿐만 아니다. 무기를 만들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조선 사람들을 국내 광산이나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 그리고 건설 현장 등에 강제동원시키기도 하였다. 이른바 '국내 강제동원'이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사망한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나, 국내 동원이라는 이유로 잘 알려지지도 않은 데다가 그러한 까닭에 온전한 피해보상도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지난 13일 오후 방송한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에서는 국내 강제동원과 관련한 아픈 역사의 흔적과 피해자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둘러보았다.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 SBS

 
국내 강제동원의 흔적과 피해자들의 절규

전라남도 해남군에 위치한 옥매산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 입구에 있는 남도의 명산이다. 이 옥매산은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국민들이 강제동원됐던 쓰라린 아픔이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로 인한 상흔은 정상을 비롯한 옥매산 곳곳에 드러나 있다. 한때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한다며 쇠말뚝을 박았던 정상 부근은 채석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훼손이 심각했다. 광석을 얻기 위해 산 이곳저곳이 파헤쳐지면서 없던 절벽과 골짜기까지 생겼으며, 깨진 바위에는 어김없이 착암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옥매산 인근 해변에는 아파트 4층 높이의 흉물스러운 대형 콘크리트 건물이 우뚝 서있다. 옥매산에서 캐낸 광물을 임시로 저장하던 창고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광산에서 알루미늄의 원료인 명반석을 실어와 저장고 옥상 구멍으로 쏟아 부으면 아래에서 수레로 받아 곧바로 일본행 화물선에 옮겨 싣는 용도였다. 희생자 유족회 박철희 회장에 따르면 "많을 때는 600명에서 1200명가량이 이 광산에 종사했다"고 한다.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 SBS

 
한편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3월 어느 날, 옥매광산을 운영하던 일본회사 간부는 한국인 노동자 200여 명에게 회의가 있으니 광장으로 모이라 전달했고, 이들은 무장된 일본 헌병의 감시 속에서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세 척의 배에 올라타 어디론가 끌려갔다고 한다. 이들이 끌려간 곳은 다름 아닌 제주도였다. 패망이 가까워진 일본이 제주도를 일본 본토 수호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방공호와 비행장 따위의 군사시설을 구축하면서 옥매광산 노동자들을 강제동원한 것이다.

방송에 따르면 이곳에서 연일 이어지는 가혹한 중노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에게 제공된 음식은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지옥과도 같은 5개월의 고역 끝에 마침내 광복이 찾아왔지만 이들을 기다린 건 또 다른 비극이었다. 옥매광산 징용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올라탄 배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구조되지 못한 120여 명의 조선인들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 그대로 수장되고 만다.

한편 부산 기장군의 옛 광산마을에도 강제동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1930년대에 조성된 이 마을은 아직까지 일본식 주택들이 남아있었고, 일본인들이 광산 사무실로 사용하던 건물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을 부근의 광산은 한때 조선 5대 구리 광산으로 꼽혔는데, 일본 스미토모사가 광산을 개발하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던 곳이다. 방송에 따르면 강제동원된 사람들은 쉬는 날도 없이 매일 주야간을 2교대로 갱도에 투입됐으며 일주일에 두세 번은 군사훈련까지 받아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혹독한 근무환경은 수많은 징용자들을 폐질환으로 내몰았다.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 SBS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에 있는 야산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트막한 지형이지만 이곳에도 강제동원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군사 장비를 숨기기 위해 일제가 뚫은 무려 24개의 지하호가 산자락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부평문화원 김규혁 기획사업팀장은 "일본군이 미군의 폭격을 대비해서 조병창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조병창에서 이뤄지는 무기생산이라든가 보관을 바로 옆에 있는 한봉산 주변에 굴을 파놓고, 그 안에서 굴들이 서로 이어지게 한 다음 일련의 작업들을 이 지하에서 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지하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군수품을 만드는 일본 육군 조병창이 가동되고 있었다. 부평역사박물관 김정아 학예팀장은 "한반도에서 무기를 생산해서 바로 전장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그 적지가 바로 부평이었는데, 여기 100만 평 규모의 일본 육군 조병창이 들어서게 되고 또 대표적인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들어오게 된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 SBS

 
방송에 따르면 이곳에는 유독 어린 학생들이 많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열악한 근무환경은 어른들보다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미쓰비시 강제동원 피해자 아들 송영신씨는 "조선사람 옷이 이렇게 딱 여며지지 않으니까 옷깃 같은 게 걸려드는데, 아이들은 힘이 없어 빨려 들어가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말한다.

국내강제동원 피해자 연 650만 명, 요원한 피해보상

국내강제동원이 낳은 역사의 흔적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쓰라린 아픔이지만, 안타깝게도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고 있었다. 아픈 역사도 보전해야 한다는 측과 편의와 자산가치의 향상을 위해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측의 첨예한 대립 때문이다.

해남 옥매광산 저장 창고의 경우 역사적 가치가 높은 만큼 주민이나 지자체는 대체로 보존을 원하고 있었다. 희생자 유족회 박철희 회장은 "4킬로 전방에는 명량해전이 일어난 유명한 곳이 있다. 승전지도 있으나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이 아픈 역사도 같이 연계해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꼭 지키고 싶은 건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토지 소유자는 창고 보존 때문에 주변 개발이 묶일 가능성이 있다며 난색을 표명하는 입장이다.

부평의 미쓰비시 사택 역시 주민, 지자체, 시민단체 간, 그리고 주민들 내부에서조차 이의 보존을 두고 입장차가 상당하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하여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사적 교육 현장으로 남긴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주민들이 함께 역사성을 인정할 수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주민들의 편의를 봐줄 수 있는 합의점에 도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방송은 해외강제동원을 인정하면서도 국내강제동원을 인정하지 않는 피해보상의 차별문제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로 꼽고 있었다. 관련 학계는 해외강제동원 인력을 연인원 130만 명으로 추정하는 한편, 국내강제동원은 그보다 다섯 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의 피해보상 대상에는 국내강제동원 부분은 쏙 빠져있다. 정혜경 역사학자는 "작업현장으로 동원하는 근거법이 있는데 국가총동원법이나 국민징용법이라고 해도 한반도에서 동원한다는 게 명시되어 있다. 65년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에서 두 번이나 물어봤다. '한반도로 징용한 것도 포함할 것이냐?' 그랬더니 한국 정부가 '그건 안 해요' 이렇게 답했다"고 지적한다.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동원' 편의 한 장면 ⓒ SBS

 
21세기에 들어선 뒤 국내징용자도 피해자에 포함시켜 우리 정부가 보상해주는 방안이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막대한 예산이 걸림돌이 돼 결국 불발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여 일본에 피해 보상을 다시 청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정혜경 역사학자는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려면 일본 정부와 기업이 남긴 공적인 자료가 있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동원했던 기업은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의 대기업이 있었다. 아소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부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다 은닉 소각해버린 상태"라며 피해보상의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강제동원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은 대표적인 수탈 행위로 꼽힌다. 해외 강제동원의 아픔 너머에는 그보다 무려 다섯 배나 많은 국내강제동원이라는 비극이 숨어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다. 일본으로부터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우리 정부로부터도 외면 받아온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과 신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실정이다.

기자가 마지막 멘트로 "큰 아픔을 함께 겪었지만 상대적으로 크게 소외된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의 절규와 그 아픈 현장은 날이 갈수록 무뎌가는 우리의 역사인식과 정부의 안일한 대응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언급했듯이 이는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볼 사안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새날이 올거야(https://newday21.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SBS 뉴스토리 잊힌 아픔 국내 강제 동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