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 세미콜론 스튜디오, 그린나래미디어(주)

 
수갑을 찬 자인에게는 출생증명서가 없다. 자인의 나이는 그를 낳은 부모도 모른다. 그저 의사의 소견서대로 동물 치아감식처럼 치아의 발육상태를 보아 열두 살로 추정할 뿐이다. 개, 고양이 그리고 유골. 이들의 나이추정에 필요한 치아검사가 영화 <가버나움>의 주인공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징표다. 검열 받는 짐승처럼 입을 벌려 치아감식을 받는 소년. 분명히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지만 그 아이의 존재를 증명해 줄 서류는 어디에도 없다. 이미 인간인데 인간이라는 증거가 필요하다는 아이러니가 보는 내내 가슴을 묵직하게 한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무표정의 어린 소년, 자인이 수감된 이유는 열한 살 여동생의 남편을 칼로 찔렀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초경이 시작되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팔려가서 죽은 여동생에 대한 핏빛 애도였다. 다른 아이들이 부모의 보살핌으로 먹고 자고 놀고 학교에 갈 때, 자인은 학대에 가까운 노동을 통해 엄마의 담뱃값과 가족이 먹을 것을 벌었다. 여러 명의 동생들을 이끌고 아침 주스를 파는 자인 곁으로 통학버스가 지나간다. 버스에 매달려 있는 책가방들이 훈장처럼 당당해 보인다. 학교에 가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윽박지르는 아버지에게 자인의 엄마가 말한다. "학교에서 음식도 주고 빵도 줄 거다. 그러니까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는 학교에 갈 수 없는 자인이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 세미콜론 스튜디오, 그린나래미디어(주)

 
지옥 같은 삶 속에서도 열한 살 여동생의 초경을 발견하자 옷을 벗어 생리대를 마련해준 것도 오빠 자인이었고, 울부짖으며 동생의 조혼을 막아보려 했던 것도 자인이었다. "사는 게 통닭처럼 구워지는 것 같다"고 절규하는 자인에게 보이는 세상은 모순투성이다. 폭력적인 방관과 가난의 배고픔 속에도 신의 축복을 기원하며 기도하는 수감자들을 바라보는 자인의 시선과 지붕 위의 하얀 십자가가 공존하는 불균형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세상의 불균형을 통해 나의 모순을 바라보게 만든다.

부모의 흥분한 폭력 앞에서 무심하게 얻어맞는 자인의 모습은 폭력에 익숙한 무기력한 동의가 아니었다. "우리 부모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살아온 것뿐"이라고 항변하는 부모에게 "엄마의 말이 칼처럼 찌른다고, 엄마는 감정이 없냐"고 외치는 자인은 더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보였다. 사랑이 아름다우며 그 사랑의 결실이 출산이라면 당연히 그 아이를 돌보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라는 자인의 논리가 식상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 세미콜론 스튜디오, 그린나래미디어(주)

 
아사르와 젖먹이 요나스를 돌보려했던 자인의 책임감은 부모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몫이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들 돌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미혼모 라힐을 보면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잎새가 오버랩 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아이를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한' 자인에게 요나스의 어린 엄마 라힐은 자인에게도 부러운 엄마의 모습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불법체류자로 감옥에 갇힌 라힐을 대신해서 요나스를 데리고 길거리를 떠도는 자인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요나스를 태웠던 그 어설픈 유모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도움을 청하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냄비의 철컥거리는 소리는 "좀 도와주세요. 나도 사랑받고 관심 받고 싶어요"라는 무언의 절규로 들렸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눈은 모두 스쳐가는 타인의 눈빛이었다. 영화는 쉽게 손 내밀어 잡기 어려운 타인들과의 경계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바라보는 건조한 눈빛들. 바로 내 모습은 아닐는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보이고 이해되던 것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수미상관식 구성으로 반복되는 영화의 첫 화면과 마지막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거였구나 했다. 나홀로 공화국의 독재자처럼 내 머릿속의 공화국에서 함부로 재단하고 동정하고 비난하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수많은 도식화의 틀 속에서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던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 세미콜론 스튜디오, 그린나래미디어(주)

 
가난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승리가 나팔처럼 울려 퍼지길 강요받는 느낌이 덜해서 도리어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던 영화였다. 거짓 희망을, 근거 없는 희망을 노래하지 않아서 도리어 낫다. '사는 게 개똥같다고, 지옥 같은 삶'이라고 외치는 수많은 자인과 폭력적인 결혼제도에 묻혀야 했던 수많은 어린 신부 아사르가 가르쳐주는 부끄러움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노라고 누구도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눈물바람 하는 자인의 엄마에게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을 가르쳐주는 영화<가버나움>의 묵직함이 벅차다.

영화관에 쓰여 있던 정현종 시인의 시 '비스듬히'를 다시 읽어본다. 그렇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혹은 갸웃하게 기울여 바라보는 세상에는 직립으로만 서있을 때와는 다른 각도의 세상이 보일 것이다. 직립에 몰두할 때 보였던 것들과 비스듬히 서서 보이는 것들과의 간격을 통해 세상의 다른 단면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나도 희망한다. 수많은 자인들이 지옥 같은 그 곳에서의 탈출이 성공하기를, 나에게도 기존의 습에서 한 발 나와 좀 더 넓고 깊게 보는 눈이 열리기를. 그 가난 속에서도 미혼모 라힐이 아기를 위해 향을 피우며 신의 축복을 빌듯이 여전히 신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하고 싶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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