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검찰과 별도로, 정치적 편파성 없이 공직자 비리를 수사할 수 있는 공수처(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처). 이 공수처 설치 법안이 '여의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공수처가 설치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SBS 드라마 <해치>에 등장하는 사헌부 감찰들의 활약을 통해서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드라마 속의 사헌부 감찰들은 우리 시대 검찰이 쉽게 하기 힘든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고 있다.
 
비운의 세자인 소현세자의 증손자라는 이유로 숙종 임금의 총애를 받는 밀풍군 이탄(정문성 분)의 비리를 과감히 들춰내고,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세제(후계자인 동생)가 된 연잉군(정일우 분, 훗날의 영조)한테도 거침없이 칼날을 들이댄다. 밀풍군이나 연잉군에 관해 묘사한 부분은 실제 역사와 다르지만, 드라마 속 감찰들은 공직자 비리는 물론이고 왕족 비리도 용감하게 파헤친다.

조선시대 공직자들의 공포의 대상 셋
 
 드라마 <해치>의 사헌부 사람들.

드라마 <해치>의 사헌부 사람들.ⓒ SBS

   
<해치>에 등장하는 사헌부와 더불어, 조선시대 공직자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3대 기구가 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그것이다. 셋은 삼사(三司)로도 통칭됐다. 사헌부와 사간원만 묶어서 양사(兩司) 혹은 대간(臺諫)이라고도 했다. 구체적 직무는 달랐지만 삼사의 공통점이 있었다. 임금한테 바른말을 하는 언(言)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삼사는 과거시험 급제자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신하들이 들어간 곳이다. 삼사는 임금과 고위 공직자들의 문제점을 포함해 국정 전반을 비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사헌부는 그에 더해 검찰청 비슷한 기능까지 수행했으므로, 사간원·홍문관보다 강력했다. 이들 삼사가 발휘한 위력에 관해 농림부장관 출신의 역사학자 정시채는 <한국 관료 제도사>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다 같이 언론의 관(官)으로서 국가의 중대사에 관하여 왕의 뜻을 움직이려 하는 경우에는 양사가 합의한 의견으로써 양사합계(兩司合啓)를 하기도 하며, 때로는 홍문관을 합하여 삼사의 합계를 하기도 하며, 그래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합사복합(合司伏閤)이라 하여 양사 또는 삼사의 관원이 일제히 궐문 앞에 나아가 국왕의 청종(聽從)을 간청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임금이 고위 공직자에 대한 처벌을 기피하면, 삼사는 궁궐 대문 앞에까지 가서 시위를 벌였다. 만약 우리 시대에 검찰청 검사들이 청와대 정문 앞에 엎드려 "아무개 장관을 수사하게 해주십시오", "아무개 비서관을 기소하게 주십시오"라고 외쳐댄다면, 매우 진귀한 풍경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그런 풍경이 제도화돼 있었다. 그 정도로 강력하게 고위 공직자 처벌을 관철시킬 수 있었으니, 삼사의 기능이 공수처와 비슷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서편의 사헌부 터. 건너편에 주한미국대사관이 보인다.

서울 광화문광장 서편의 사헌부 터. 건너편에 주한미국대사관이 보인다.ⓒ 김종성

  
선비 출신인 삼사 관원들은 대체로 꼬장꼬장한 근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타고난 천성이 어땠느냐를 떠나서, 삼사라는 조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들은 같은 선비들인 재야 사림(유림)의 지지를 받았다. 사림들이 그들에게 대쪽 같은 근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삼사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그런 쪽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삼사를 왕이 징계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송웅섭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논문 '연산군 초반 정치적 갈등에 대한 구조적 접근'에 이런 대목이 있다.
 
"왕실 문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있어서는 대간(臺諫)이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국왕의 심기를 거슬리어 사헌부나 사간원 혹은 대간 전체가 교체되기도 했다. 이 때 새로운 인사들로 구성된 대간에서는 이전 대간들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가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갔다.
 
간혹 대간이 왕의 위세에 눌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할 경우, 홍문관에서는 언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며 대간을 논박하기도 했다. 홍문관의 논박을 받은 대간은 일단 피혐(자발적 직무정지)을 통해 사직을 요청하였다. 만약 국왕이 사직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다시 그 안건을 재개하여 언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체직(관원 교체)이 허락될 경우 새로운 대간이 그 안건을 재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가 2015년 발행한 <인문과학연구> 제20집.
 
삼사는 질긴 기구였다. 왕의 관점이 아닌 선비 세계의 관점으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 와중에 삼사 관원 중 일부가 겁을 먹고 물러서려 하면, 다른 삼사 관원들이 그를 공격했다. 그래서 누구 하나가 도중에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전투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산군마저 압박했던 그들
 
 사간원 터에 관한 표지석. 맞은편에 서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이 보인다.

사간원 터에 관한 표지석. 맞은편에 서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이 보인다.ⓒ 김종성

  
그런 전투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연산군 때의 김효강 사건을 들 수 있다. 김효강은 연산군을 보좌하는 내시였다. 1496년 당시 정4품 상전(尙傳)이란 관직을 갖고 있었다. 정3품을 기준으로 고위직이냐 아니냐를 가렸으니, 고위직에 거의 근접한 내시였다고 볼 수 있다.
 
김효강은 연산군의 비호를 받았다. 그래서 실제 위상은 정4품을 능가했다. 실세 내시였던 것이다. 음력으로 연산군 2년 1월 12일자(양력 1496년 1월 27일자) <연산군일기>에, 실세 내시 김효강이 사헌부와 사간원의 공격을 받은 사실이 소개돼 있다.
 
"(사헌부) 지평 이자견과 (사간원) 정언 유세침이 '유점사와 낙산사에 소금을 공급하는 일과 관련해 김효강이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함부로 보고한 것은 매우 불가한 일이므로, 저희들 부서에서 서면 조사를 하는 중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강원도에 소재한 유점사와 낙산사에 소금을 지원하는 문제를 내시 김효강이 승정원(주상 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연산군에게 보고한 사실이 문제가 됐다. 그래서 사헌부와 사간원이 공격한 것이다. 승정원에 보고했더라도, 어차피 이런 공격은 있었을 것이다. 불교에 대한 지원을 승정원의 선비 출신 신하들이 지지할 리 없었다. 승정원에 보고했든 안 했든, 김효강의 불교 지원은 공격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들은 연산군은 불쾌해 했다. 자기한테 알리지도 않고 어떻게 측근을 조사할 수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사헌부 지평(정5품) 이자견은 '사찰에 대한 소금 지원은 불가하다'며 김효강에 대한 조사를 정당화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국문 절차를 요청했다. 임금의 명령으로 공식 조사를 개시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연산군이 거절했지만 양사는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집요하게 연산군을 괴롭혔다. 어찌나 귀찮게 하는지 "지금 봐서는 내시가 권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너희) 대간이 권세를 부리는 것이다"라며 연산군이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양사는 끈질겼다.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피혐과 사직 카드를 들이밀며 연산군을 계속 압박했다. '이러시려면 우리를 자르십시오'라고 요구한 것이다. 연산군이 사표 수리를 거부하면, 또다시 국문을 요구했다. '우리를 자르지 않으려면, 김효강을 벌주십시오'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정도의 고강도 압박에도 연산군이 김효강을 계속 비호하자, 이번에는 홍문관이 가세했다. 삼사가 공격 진용을 갖춘 것이다. 왕과 신하들의 세미나인 경연이 열릴 때면, 홍문관 관원들도 학술 토론은 하지 않고 연산군 앞에서 김효강 문제를 거론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질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관청이 대한민국에 하나쯤 있다면

연산군도 만만치 않았다. 그 역시 쉽게 굴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왕실은 불교 신앙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가 볼 때는 김효강의 일이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역시 끈질기게 버텼다. 하지만 유학자들이 볼 때, 김효강은 묵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임금을 밀어붙였다. 어떤 날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하루에 여섯 번이나 집단 사표를 제출한 적도 있을 정도다.

이런 식의 공방이 근 2개월간 계속됐다. 결국 굴복한 쪽은 연산군이다. 김효강에 대한 국문을 승인한 것이다. 고집 센 연산군을 2개월 만에 굴복시켰으니, 조선시대판 공수처의 집요함과 위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국문이 열린 뒤로도 연산군과 신하들은 계속 싸웠다. 이번에는 김효강을 징계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오랫동안 대립했다. 결국, 김효강은 직첩을 잃어야 했다. '공수처'가 승리한 것이다.
 
삼사가 김효강을 공격한 일은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다. 불교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당한 일이었다. 왕조 국가의 가치관은 왕실을 기준으로 정립되므로, 왕실이 불교를 믿었으므로 조선왕조의 국교는 엄밀히 말하면 불교라고 해야 옳다. 개념적으로 따지면 조선은 불교국가였다. 하지만 왕실보다 강력한 사대부들이 유교를 신봉하고 왕실의 신앙을 무시하는 바람에 조선은 결과적으로 유교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결과적으로 유교국가가 된 이 나라의 사대부 신하들이 볼 때, 김효강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공수처가 나서서 김효강에 대한 처벌을 집요하게 추진하다가 결국 관철시킨 것이다. 이 사례는 조선시대판 공수처의 실효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조선시대에는 공수처 기능을 수행하는 관청이 적어도 셋은 있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부정부패를 다 막지 못했다. 대한민국 시대에는 이런 제도가 더 필요하지 않은지에 대해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관청이 하나쯤 있다면, 대한민국 공직 사회가 지금보다 더 깨끗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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