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경험이지만, 분명히 잊어서는 안 될 경험들이 있다. 보통 그것은 예전에는 사회 통념상 나쁜 일이 아니어서 더욱 더 쉽게 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제는 문제시되는 일들 말이다. 보통 여성 인권과 관련된 사안이 그런 경우가 많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포르노, 일명 '야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들이 그런 걸 얘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문제시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역시 '국산야동'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입에 오르내렸다.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시트콤이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소재로 쓰일 정도였다.

비단 '야동'뿐인가. 일부 남학생들은 성매매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대화 소재로 삼았다. 누군가는 아직 성경험이 없어서 마음이 급해진다며, 군대를 가기 전에 꼭 '업소'를 가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또 업소를 가봤다던 어느 선배는 그 경험을 동생들에게 자랑스럽게 풀어놓으며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이야기들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던 부끄러운 과거는 덤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강간 문화'
 
 가수 정준영과 승리가 14일 오전과 오후 각각 '불법동영상 촬영 및 유포 혐의'와 '성접대 의혹'과 관련,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출석하고 있다.

가수 정준영과 승리가 14일 오전과 오후 각각 '불법동영상 촬영 및 유포 혐의'와 '성접대 의혹'과 관련,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출석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정준영과 승리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요즘, 나는 과거의 이런 일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불법적으로 성관계 영상을 촬영하고 이를 '단톡방'에 올려 소비하거나 웹하드에 업로드를 하는 일은 이전부터 비일비재했지만 지금만큼 큰 반응을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정준영-승리 사건은 가해자가 얼마 전까지 대중들에게 사랑받던 '스타'라는 점만 다를 뿐이지, 여성의 성을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유린과 소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많은 일들과 동일한 선상의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와 정준영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왜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꽤 많은 이들이 오히려 이번 사건에서 남성 연예인들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영상을 단톡방에 올리고 돌려보는 것을 두고 '남자들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며 옹호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 '아시안 보스(Asian Boss)'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최근 한 영상을 보고 승리-정준영 사건이 그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영상에서는 길거리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버닝썬 게이트'와 정준영 사건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일부 남성분들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인터뷰이는 "남성들이라면 야동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런 영상을 공유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된다"고 답하기도 했다(3월 13일 영상이 업로드 된 이후 지금은 인터뷰에 응한 일부 사람들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었다).

여성의 성이 폭력적으로 유린되고 있지만 이것이 희화화되고 유희거리가 되면서 한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가 되고 있는 상황, 이것을 '강간 문화'(Rape culture)의 일면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강간 문화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갖는 사회적 태도 때문에 강간이 만연하고 정상화되는 환경을 설명하기 위한 사회학적 개념'을 이른다. 1970년대 미국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소개된 이 개념은 한 사회가 어떻게 성폭력을 부인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클럽 내 성폭력 근절 촉구하는 여성들 세계 여성의 날인 2019년 3월 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역 인근에서 '불꽃페미액션'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불태우자 강간문화'라고 쓰인 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클럽 내 성폭력 근절 등을 촉구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퍼포먼스 등을 마친 뒤 클럽 '버닝썬'까지 행진했다.

▲ 클럽 내 성폭력 근절 촉구하는 여성들 세계 여성의 날인 2019년 3월 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역 인근에서 '불꽃페미액션'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불태우자 강간문화'라고 쓰인 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클럽 내 성폭력 근절 등을 촉구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퍼포먼스 등을 마친 뒤 클럽 '버닝썬'까지 행진했다. ⓒ 연합뉴스


성폭행 피해자를 비난하고 그들의 행실을 문제 삼으며 남성의 성욕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여성도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무시하는 일, 혹은 특정한 이유를 들어서 강간을 정당화하는 광범위한 현상들은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단톡방에서 불법적인 동영상을 '공유'하고 '품평'하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조디 라파엘(Jody Raphael)은 그의 저서 <강간은 강간이다>(Rape is Rape, 2016)에서 술에 취한 여성, 성관계를 할 생각이 없다고 의중을 밝힌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서 가해자 남성들에게는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다. 버닝썬 사건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많은 클럽에서도 약물 성범죄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에서 강간 등의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강간 문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전혀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그는 또한 '강간'을 '섹스'라고 말하는 사회를 문제 삼는다. 앞서 말한 나의 경험에서도 나타나듯이 업소에 다녀왔다는 남자들은 '(섹스를) 했다'고 말하지 성매매를 하고 왔다고 말하지 않으며, 저속한 표현으로 '따먹는다'라는 말은 써도 '강간을 하고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부정확한 단어 사용과 문제의 행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강간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거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과연 버닝썬 게이트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일부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이 이러한 강간 문화의 일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은 별개의 문제?

강간 문화는 또한 성폭력을 별 것 아닌 문제로 취급하는 일이기도 하다. 버닝썬 게이트가 한국 사회를 뒤집어 놓고 있는 지금, 이것을 '연예인의 일탈일 뿐인데 왜 이렇게 과도한 반응을 보이느냐'는 태도가 그렇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버닝썬 게이트 때문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범죄 의혹 사건과 장자연 사건이 은폐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학의와 장자연 사건은 버닝썬 게이트가 발생하기 전부터 재조사의 대상이었다. 과거 인권 침해와 검찰권 남용 의혹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발족한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진상조사단은 지난해 2월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많은 언론들도 이를 보도했다. 현재는 과거사위의 활동 기간이 61일 늘어났을 정도로 현재 우리 사회의 큰 화두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배우 윤지오 씨가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고(故) 장자연 씨 강제추행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2019.3.18

배우 윤지오씨가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고(故) 장자연씨 강제추행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학의, 장자연 사건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더 중요한 문제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세 사건 모두 강간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남성 카르텔이 개입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가 덜 중요하며, 특정한 세력이 다른 사건을 막기 위해 그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래서 문제다. 성폭력이 한 개인의 존엄을 짓밟는 사건이 아니라 다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에 다름없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버닝썬 게이트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장자연과 김학의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까? 역으로, 장자연과 김학의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버닝썬 게이트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 결국은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아서 생긴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남성 카르텔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은 '일반 남성들이 무슨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 왜 그런 것처럼 몰아 가느냐'일 것이다. 그들은 <조선일보>나 특정 정치 세력, 검찰 등은 권력이 있어 카르텔이 될 수 있지만 그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평범한 남성'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대단한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가해자성을 애써 무시하고, 개인의 존엄이 짓밟힌 사건을 '공작'의 눈으로 의심하며, 남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개인의 태도를 넘어 한 사회의 태도가 될 때 그것은 카르텔이 되기에 충분하다. 강간 문화는 우리가 그러한 카르텔에 눈감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수잔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는 '특정한 개인의 성폭력을 분리하여 생각할 때 강간 문화가 강화되고 승인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연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이유를 대가며 왜 그것이 평범한 이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닌지 변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만들 수 있다. 승리-정준영 사건은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남긴 것이다. 장자연, 김학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강간문화, 남성카르텔 끝장내자' '버닝썬' 관련 공권력 유착 진상규명과 엄중처벌 촉구 기자회견이 21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강간문화, 남성카르텔 끝장' '공권력 유착 철저 수사 및 관련자 처벌' 등을 촉구했다.

▲ '강간문화, 남성카르텔 끝장내자' '버닝썬' 관련 공권력 유착 진상규명과 엄중처벌 촉구 기자회견이 21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강간문화, 남성카르텔 끝장' '공권력 유착 철저 수사 및 관련자 처벌' 등을 촉구했다. ⓒ 권우성

  
버닝썬게이트 강간문화 승리정준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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