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상>에서 천우희가 맡은 배역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인물 소개도 '사고의 진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여자' 정도로밖에 등장하지 않았다. 예고편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알겠지만 전반부 1시간 여까지는 천우희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수진 감독은 그만큼 천우희가 맡은 최련화라는 역할을 꽁꽁 숨겨놓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록 <한공주>를 통해 천우희와 깊은 인연을 맺긴 했지만 이수진 감독이 원래 최련화 역할로 원했던 건 신인 배우였다.
  
 영화 '우상'의 배우 천우희

영화 '우상'의 배우 천우희 ⓒ CGV아트하우스

 
"처음에 감독님께서 날 꼬드겨 보려고 그랬다. '야, 이 역할 다른 배우가 하면 배 아프지 않겠냐?'고. (웃음) 그래서 감독님께 '시나리오 편하게 돌려보시라'고 말씀드렸다. 누구나 탐낼 만한 역할이지만 이 역할을 하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다른 배우도 생각하셨겠지만 (설)경구 선배님이 '이거 천우희인데?'라고 힘을 실어줘서 내게 다시 시나리오가 왔다." (천우희)

결국 천우희의 예상대로 <우상>의 최련화 역할은 천우희에게 떨어진다. 이 일화는 현재 천우희가 한국 영화계에서 갖고 있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사실 <한공주> 때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이번에는 두려움도 들고 설렘도 있었다. 그럼에도 감독님과 작업을 한 번 같이 해봤기 때문에 기대감이 있었다. 감독님께서 어떻게 나를 만들어줄지가 궁금했다.

지금까지는 (감독들이) 유명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시나리오만 봤다면 이번에는 어쨌든 작업을 한 번 했던 감독님이기 때문에 다시 한다는 게 큰 의미가 있었다. <한공주> 때 작업의 합이 정말 좋았다. 기대를 갖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하나하나 꼼꼼하게 봤다. 실제로 현장에서 감독님이 한 번도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걸 보지 못했다. 크랭크인 때부터 후반 작업까지 자기 뚝심으로 쭉 밀고 나가는 게 <한공주> 때랑 같아서 그 점이 훌륭하고 존경스럽다."


그렇게 들어간 촬영은 역시 천우희의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눈썹을 밀고 앞머리를 짧게 자르는 변신 아닌 변신은 별 것 아닌 정도였다.

"현장에서 다들 빵빵 터졌다. 눈썹 밀면 다시 자란다고 하지만 안 나는 사람도 있고 예전처럼 똑같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도 막상 현장에서 밀어보니 나름대로 느낌이 있더라. (웃음) 재밌게 하하하 웃으면서 촬영했다. 물론 촬영이 없는 동안 칩거의 시간들이 있었다. 야외 활동도 못했고 무엇보다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 지인들에게도 영화적인 재미를 안겨주고 싶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 눈썹 미는 걸 어느 영화에서 할 수 있겠나 싶다.

다 자라는 데까지는 한 달 반 정도 걸렸다. 수염처럼 자라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리고 (일동 웃음) 더 풍성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두 번 밀고 싶진 않다."


"너무 어렵게 보지 않았으면"
 
- 베를린 가셨을 때 어떠셨나?
"베를린영화제에서 첫 시사를 통해 봤는데 정말 재밌었다. 단순하게 '재밌다 또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나온 영화가 첫 시사 때 재밌기가 쉽지 않다. (일동 웃음) 그때는 영화를 전체적인 흐름에 쭉 따라가면서 몰입이 잘 되더라. 두 번째로 언론 시사회를 통해 봤을 때는 그제서야 내가 했던 것들이 많이 보이고 어렵더라.

오히려 이 영화는 끝나고 나서부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중간 중간 무슨 의미지, 저 사건은 뭐지, 고민하다 보면 영화는 흘러간다. 이야기가 처절하게 느껴지더라. 어렵다, 쉽다를 떠나서 세 사람에게 연민이 갔다. 내 역할은 더더욱 그랬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우상> 스틸 컷

영화 <우상> 스틸 컷 ⓒ CGV아트하우스

 
- 련화를 어떻게 연기했나?
"일단 쉽지 않았던 게 내가 연기한 캐릭터임에도 영화 상에서 단서들이 많지 않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으로 인물을 상상해내야 했다. 이 친구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는 출생 신고도 돼 있지 않고 학교도 못 가고 아파도 병원도 못 가고 인간으로서 갖고 있을 법한 권리가 아예 없는 거니까 아주 일반적인 삶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구명회(한석규 분)와 유중식(설경구 분)보다 련화를 더 의지가 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본능에 따라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을면서도 무섭게만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내가 느낀 련화는 마음이 짠해질 정도로 연민이 느껴져서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할 때 순수함이 묻어나길 바랐다. 련화가 짧지만 관객들의 마음에 여운으로 남을 수 있는 캐릭터였으면 싶었다."

- 사투리가 워낙 강해서 고생했을 것 같다.
"초반부터 (사투리) 선생님과 감독님과 잡아가면서 했다. 전달을 정말 리얼하게 할지, 영화적으로 풀어서 뉘앙스만 얹을지 고민했다. 정말 칭찬 많이 받았다. 안심되면서 만족해했는데 (언론시사 당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처받았다. 너무 리얼하게 했던 걸까 싶기도 하고."

- 조선족 출신이라는 설정인데 조선족 캐릭터가 비하로 인해 논란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 것이 걱정스럽지 않았나?
"조심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인물이 처한 상황을 세밀하게 표현했으면 하는 부분도 있었다. 나나 감독님이나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표현하면 오히려 논란거리가 아니라 조금 더 동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리얼리티를 살린 부분들을 좋아해주셨다고 들었다. 최대한 가짜는 만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했던 것 같다."

- 한석규와 설경구와 연기하는 현장은 어땠나?
"사실 내 연기를 하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런 연기를 하셨네' '잘하셨네' 이렇게 판단할 새가 없고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연기를 할 때보다 현장에서 함께할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인간적으로 겪어본 두 분이 너무 존경스럽고 자세가 멋있어서 원래도 좋아했지만 더 팬이 됐다. 선배님들 두 분이 인간적으로 따뜻하시고 배려심이 많으시다.

내가 까마득한 후배임에도 선후배로 나누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나누시고 편하게 대하시니 나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마인드 콘트롤이 잘 안 되는 순간에 선배님들을 봤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연기를) 해내는 것이다. 정말 내공이 어마어마하신 분들이고 이 일을 해오면서 동요되는 부분들도 많고 외부적인 평가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많은 일들을 겪으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쭉 훌륭한 연기를 보이시고 앞으로도 해나가려는 부분들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주혁 배우 사망 겪고 작품 선택 못하기도
 
 영화 '우상'의 배우 천우희

영화 '우상'의 배우 천우희 ⓒ CGV아트하우스

 
- 배우 천우희에게 '우상'이 있나?
"영화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내 우상은 결국 연기구나 싶었다. 연기가 누군가의 평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걸수도 있는데 자기만족이 가장 크지 않나. 완벽한 연기란 사실 없는데도 그것에 도달하려고 계속 노력한다. 솔직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노력하고 맹목적으로 한다. 연기라는 게 정말 연기일 뿐이지만 연기하는 순간은 진심이 된다. 이것들이 허상이고 가짜인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하지 싶다. 연기에 몰입이 안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부족함 때문에 한계를 맛볼 때는 정말 (영화와) 똑같은 상황이 내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그렇게 변해가는 것 같다."

- 워낙 힘들었던 캐릭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걸까?
"한계를 맛보긴 했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한계를 맛봤을 때는 오히려 뛰어넘고 성장하고 노력하려고 했지 좌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건 외적인 부분이지만 캐릭터적인 어려움보다 개인적으로 (김)주혁 선배 일을 겪고 많이 무너졌다. 연기를 위해 맹목적으로 흘러오다가 그 일이 일어나고 나서 연기가 부질없게 느껴진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줄까, 이 일이 내게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촬영을 하면서 마음을 유지해야 했고 쉽지가 않았다. 내가 생각한 한계가 부질없게 느껴졌고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게 사람이구나 싶으니 너무 자신감이 없어지더라."

- 고민하는 부분은 돌파구를 찾았나?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해결이 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더라. 너무 힘든 시간을 겪었고 연기를 할 여력이 안 났다. 내가 하는 연기를 볼 자신도 없었다. 물론 좋은 작품들을 거절한다는 것이 안타깝고 죄송했지만 못하겠더라. 작년에 받은 시나리오를 다 거절했다. 영화 끝나고 연기라는 것에 대해 아주 멀리 있었다. 그러다가 <버티고>라는 작품을 만나면서 의욕을 찾았다. 내가 연기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지언정 연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시도하는 방식의 연기라서 그 작품이 어떻게 나올진 모르겠다. 련화 역시 2년 동안 안고 있었던 애라 떠나보낼 때가 됐다. 빨리 보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으면서 아쉽기도 하다."

- 강렬한 캐릭터 연기를 하고 나서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후유증이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신다. 너무 어렵거나 힘든 역할을 맡으면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일상생활로 연기를 끌고 오게 되면 나도 너무 힘들고 그걸 좋은 연기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연기라는 게 카메라가 돌 때의 현장에서 진심이고 호흡이고 감정이지 막 휩쓸려서 한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배우의 삶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삶도 중요하기 때문에 더 경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감정적으로 연기를 하지 말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 나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니까 당황했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생각이 드니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 그런 면에서 인생을 <우상> 전후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모든 작품마다 전후가 있고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우상>은 그 중에서도 아주 크다. 정말 시기적으로 바다 끝까지 떨어져본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 무너지고 하나씩 새로 쌓아올린 느낌이다. 그간 칼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배우는 어떻게든 해내야 하고, 냉정하고 가혹할 정도였다면 이 작품을 겪고 나서 나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영화 '우상'의 배우 천우희

영화 '우상'의 배우 천우희 ⓒ CGV아트하우스

 
-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로 돌아온다. 대중이 원하는 천우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대중이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웃음) 한 기자님이 그동안 했던 것 중에 센 캐릭터였던 작품만 잘 됐다고 그러시더라. 결국 대중이 원하는 건 센 캐릭터가 아닌가? 이 작품 역시 내가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감사하게도 다시 기회를 주셔서 하게 됐다.

예전이었으면 어떻게든 세밀하게 표현하려고 분석을 했을 텐데 이번에는 한석규 선배님이 있는 그대로 해도 된다고 편안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셔서 나를 너무 옥죄지 말아야겠다 싶다.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스스로 답답하고 별로겠지만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으니까, 라면서 점차 점차 나아지고 앞으로도 연기를 할 거니까 너무 채찍질하지 말고 자연스럽고 편하게 하고 싶다."
천우희 우상 한석규 설경구 멜로가 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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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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