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PMP(Portable Media Player), 풀어쓰자면 '휴대용 영상 재생기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지금은 아마 스마트폰에 자리를 물려주었겠지만 이 기계의 등장은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웠다. 그 전까지는 좋은 화질의 영상을 데스크톱 컴퓨터나 노트북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본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PMP는 휴대도 매우 간편했다. 많은 경우 인터넷 입시 강의 업체에서 PMP와 강의수강권을 묶어서 판매했고, 내 또래 대부분은 들인 돈 만큼 성적을 꼭 올리겠다는 조건으로 이 기계를 손에 넣곤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내 주변의 그 누구도 PMP를 '학습용도'로만 쓰진 않았다. 누구는 이 기계에 드라마를, 아니면 음악방송을, 혹은 영화를 넣어와 쉬는 시간에 틈틈이 시청하곤 했다.

물론 여기까지만 적으면 특별할 것도 없는 기억이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정준영 사건이 보도되자 '불법촬영 영상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 '공유해달라'는 댓글이 기사마다 넘쳐났다. 또 한동안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1위에는 무려 '정준영 동영상'이라는 단어가 오르기도 했다.

정준영 사건이 보도되자 '불법촬영 영상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 '공유해달라'는 댓글이 기사마다 넘쳐났다. 또 한동안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1위에는 무려 '정준영 동영상'이라는 단어가 오르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어느 순간 같은 반의 또래 아이들은 PMP에 포르노를 담아 학교에 오기 시작했다. 아마 그들이 은밀히 혼자서 포르노를 보았다면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포르노를 모여서 보고, 자신이 가진 포르노의 목록을 자랑하고 때로는 교환을 하기도 했다.

하루는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고 불러 따라갔더니 갑자기 포르노를 틀어준 아이 때문에 깜짝 놀란 일도 있었다(그는 내 반응을 보며 즐거움과 의기양양함을 보였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누군가 백과사전 크기 만한 외장하드를 학교에 가지고 온 일이 있었는데, 예상했듯 그 속에는 다수의 포르노 영상이 담겨 있었다.

왜 남자들은 포르노를 교환하고 공유할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듣자 하니 내 나이대의 남성들에겐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경험은 다들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미디어 기기가 발달하기 전에도 남성 집단 내에서는 성인 잡지든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든 포르노가 공유되는 일은 늘 있었다.

사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포르노를 시청하는 이유에 관해 '성욕 해소'를 위해서라고 설명하곤 한다. 그렇다면 그냥 자기 집에서 혼자서 보면 될 일이 아닌가. 왜 그 시절 남자 아이들은 포르노를 모여서 보고, 서로 공유하고, 얼마나 많은 포르노를 가지고 있는지를 과시했을까.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이런 행동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대를 깊게 다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정준영, 경찰 출석 불법동영상 촬영 및 유포 혐의와 관련 가수 정준영이 14일 오전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출석하고 있다.

▲ 정준영, 경찰 출석 불법동영상 촬영 및 유포 혐의와 관련 가수 정준영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출석하고 있다. ⓒ 이정민

 
이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 가수 정준영을 포함한 다수의 남성 연예인들이 성관계 영상을 불법적으로 촬영하고 이를 단체 메신저방에 유포했던 사건을 마주한 후였다. 아니, '성관계 영상'이라는 말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 '관계'가 사실은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적 폭력이었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충격적인 보도가 이어진 후 더욱 끔찍한 상황이 펼쳐졌다. 많은 수의 남성들이 정준영이 찍었던 불법촬영물의 정체를 궁금해 했고 심지어 보고 싶어 했으며 이를 구하려는 시도까지 했기 때문이다. '불법촬영 영상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 '공유해달라'는 댓글이 기사마다 넘쳐났다. 또 한동안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1위에는 무려 '정준영 동영상'이라는 단어가 오르기도 했다.

'정준영 동영상' 포털 검색어 1순위 등장

결국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답은 '이 남성들에게 여성이란 무엇이었나'를 질문하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잠깐 '정준영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에 수록된 김주희의 글 '성매매 여성 '되기'의 문화경제'를 인용하고자 한다.

글에 따르면 성매매 시장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은 모두 구매자 남성의 '초이스'(선택)에 달려 있다고 한다. 구매자 남성의 '초이스'를 받아야만 여성들은 돈을 벌고 빚을 갚으며 나아가 성매매 시장을 벗어날 자본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 과정은 극히 어렵다). 이는 성매매 여성들이 구매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외모를 꾸미는 '자기 투자'를 해야 함을 뜻한다.

그 결과 최근에는 성매매 여성을 대상으로 '성형 대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예 성형외과 병원이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사건이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김주희의 글을 읽고 나면 성매매 시장의 경제란 결국 성매매 여성들이 업소와 남성 구매자 그리고 성형외과를 비롯한 미용 산업을 오가며 형성함을 알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매매 산업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자기 투자의 회로에서 실제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오직 성매매 여성뿐이다."
 
말하자면 성매매 시장에서 남성들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들은 여성을 판매하고 구매하고 돈을 쓰게 만들면서 각자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리고 남성 구매자, 성매매 업주, 성형외과 의사는 단단한 공모관계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 중 한 쪽이라도 이탈한다면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소비를 할 수 없고, 누군가는 돈을 벌 수 없으며, 누군가는 '상품'으로서 여성들을 빚으로 안전하게 묶어둘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성매매 시장은 여성이 '재화'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으면,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재화'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 유지되는 남성들의 공모관계가 성매매 시장에만 존재하는 걸까?

공모관계

이 질문에 답하자면,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많은 남성들은 어떤 형태로든 여성을 교환하고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친밀함을 형성하는 관계를 일상에서 만들어 오곤 했다. 흔히 말하는 '야동'을 공유하든, 아니면 접대의 명목으로 상대방에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성을 보내건 말이다.

이를 통해 유대건 이익이건 무언가는 얻는다는 점에서, 나는 이 또한 '공모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들은 어떤 남성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가. 나는 이에 관해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후에서야 깨달은 것은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는 점이다. 여성을 상품처럼 소비하고 '품번'을 교환하고 공유한 후에야 이들은 비로소 집단적인 남성성을 '형성'하는 모양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야 여성을 '인간성이 말소된 존재'로 보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이는 또한 여성을 '상품'처럼 취급하는 것이 '정상적인 남성성'의 일부라는 점을 승인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두가 여성을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면,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남성이 비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드물지 않은 수의 남자들은 그것이 폭력적이라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채 '남성'으로 사회화 되어간다.
 
 JTBC <아는 형님>에서 야동에 대해 애기하는 승리의 모습.

JTBC <아는 형님>, 승리가 출연한 당시 방송 중 한 장면. ⓒ JTBC

 
이번 사건 이후 많은 이들이 남자들의 소위 '야동 문화'가 문제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와 같은 '야동 문화'는 사실 그리 은밀한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룹 아이콘이 JTBC의 <아는 형님>에 출연한 순간이었다.

방송에서 이들은 가수 승리가 숙소에 남긴 다량의 포르노가 든 외장하드를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에 표현에 따르면 그 외장하드에는 '(포르노가 담긴) 100개의 폴더가 배우별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했다. 나라면 이를 발견한 순간 '이 사람은 여성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를 떠올렸을 텐데, 방송에서 이 외장하드는 곧바로 '호혜의 수단'처럼 포장되고 말았다.

남성들에게 여성들이란 무엇인가

아마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이상 남자들은 끝까지 제2의 정준영 사건이 발생해도 'OOO 동영상'을 열심히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동영상 속 여성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새로운 '상품'이자 신선한 '소비의 대상'으로 여겨질 테니 말이다.

나는 세간의 편견처럼 불법촬영을 비롯한 성범죄 피해 여성이 '수동적'이라면 거꾸로 가해자 남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가 하는 질문을 하곤 했다. 나는 그것이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선입견이 지닌 폐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주체적인 인간은 성찰을 한다. 자기 경험의 의미를 해석하고 질문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했다면 남성들이 불법촬영 영상을 찍고 소비하고 나누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여성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방송된 SBS < 8뉴스 > 중 한 장면.

지난 12일 방송된 SBS < 8뉴스 > 중 한 장면. ⓒ SBS

 
하지만 다수의 남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포털 검색어 1위에 '정준영 동영상'이 오른 것을 보자면, 이들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갖추는 일에 철저히 무력했다. 그리고 '야동 문화'로 회자되는 남성들의 공모관계가 만들어낸 타성에 젖어 생각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가장 수동적인 것은 그들이었다.

캐슬린 배리는 자신의 책 <섹슈얼리티의 매춘화>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몸에 있지 않은 것들과 관계를 맺기 위한 교섭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자아와 타자의 상호 작용과 이것이 만드는 긴장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런데 폭력은 자아와 자아 외부에 있는 것 사이의 긴장을 빼앗아감으로써 발생한다.

예를 들어 성폭력이 그저 '성욕'의 문제라면 왜 남자들은 성적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대화하고 협상하지 않는가. 성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은 '여성들의 응답'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동의'가 필요 없는 여성들을 찾는다. 구매의 대상이건 혹은 영상 속에 있건 말이다. 이런 남성들에게 여성들이란 결국 무엇일까. 그리고 그러한 여성상을 공유한 남자들의 관계는 어떤 문화를 만들어낼까. '정준영 사건'과 이어진 끔찍한 해프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의 매춘화>에서 배리는 타인과의 긴장이 빼앗긴 관계는 왜곡된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왜곡은 인간의 경험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뜻에서 저자는 책에 아래와 같이 인용했다. 

"만약 우리의 경험이 파괴된다면 우리의 행위는 파괴적인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경험이 파괴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많은 남성들의 변화가 '설득'을 통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승리-정준영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걸 보고 있자면 설득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설득'은 온전한 인간을 상대로나 가능한 일이다. 많은 수의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가져왔으며 이는 그들이 여성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파괴되고 또한 파괴적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런 사람과 말이 통할 리가 있겠는가.

나는 승리-정준영 사건을 보고서도 피해자 영상이나 찾는 남자들이 각성을 통해 자발적인 인간성의 재건에 나서거나 아니면 스스로 '셀프 유배'라도 떠나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2의 정준영 사건' 또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지난 12일 방송된 SBS < 8뉴스 > 중 한 장면.

지난 12일 방송된 SBS < 8뉴스 > 중 한 장면. ⓒ SBS

 
정준영 승리 남성성 성폭력 불법촬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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