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SBS

 
SBS 월화 드라마 <해치>에서 영조 이금(정일우 분)은 의리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유랑 중에 만난 '주류 판매업자' 초홍(박지연 분)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왕세제(동생 겸 후계자)가 된 후에는 궁에까지 데리고 간다. 물론 이 의리는 조강지처에 대한 의리와는 충돌한다.
 
또 왕자 시절 어려움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의리도 잊지 않는다. 만년 수험생 박문수(권율 분), 사헌부 다모인 여지(고아라 분), 시종인 자동(하성광 분), 왈패 대장 달문(박훈 분) 등에 대한 의리도 끝까지 지키려 한다.
 
영조는 조선왕조 최초로 탕평정치를 실현시켰다. 특정 당파의 독주를 규제하고 각 당파를 고루 중용했다. 요즘으로 치면 의회 비례대표제나 연립내각을 실현시킨 셈이다. 물론 다수파 노론당을 완벽히 제어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시대와 손자인 정조 시대에는 공식적인 당파 활동이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로 탕평정치 이념이 어느 정도 구현됐다.
 
영조에 대한 양면 평가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니 인격도 훌륭했겠지'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해치> 속에서 묘사되는 영조의 모습은 이런 느낌에 기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수당의 횡포를 견제하고 정치개혁을 추진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정치적 의리라는 면에서는 꼭 그렇지 않았다. 영조는 정치적 의리에 크게 얽매이는 군주가 아니었다.
 
흔히 'E.H. 카아'로 불리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아(Edward Hallett Ted Carr, 1892~1982년)는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 앤 블린과 재혼할 목적으로 로마교황 및 신성로마제국에 맞서며 '1534년판 브렉시트'를 단행한 헨리 8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역사가는 자기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사생활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오늘날에 거의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런 도덕적 판단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뒤 그는 "역사가와 도덕가의 입장은 똑같지 않다"고 단언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했다.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면서도 훌륭한 왕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가는 남편으로서의 자격이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칠 때만 남편으로서의 헨리 8세에게 관심을 가진다."
 
 드라마 <해치> 인물 관계도

드라마 <해치> 인물 관계도ⓒ SBS

 
역사 속 인물의 인격이 객관적 행위에 영향을 미쳤을 때만 인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게 카아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인격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역사를 가급적 공정하게 해석하려면 인격에 대한 판단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에드워드 카아가 영조를 관찰했다면, 영조에 대해서도 인격과 행위를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지 모른다. 영조 역시 의리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공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혈통의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았다. <해치>를 포함한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숙빈 최씨)이 무수리 출신이었다고 말하지만, 사료 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궁녀 출신이라는 점뿐이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의 소령원(최숙빈 무덤)에 있는 '숙빈 최씨 신도비'에는 "병진년(1676년)에 뽑혀 궁궐에 들어갔으니 겨우 일곱 살이었다"고 적혀 있다.
 
<경국대전>을 비롯한 역대 법률에서는 궁녀의 선발 조건을 공노비(관노비)로 제한했다. 또 10대 이전에 입궁하는 소녀들은 거의 100% 공노비였다. 무수리는 물을 긷거나 불을 때는 힘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힘센 유부녀들로 충원됐다.
 
또 무수리는 궁녀의 보조 역할이었지만, 신분상으로는 궁녀보다 나은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주로 자유인인 양인들이었다. 공노비가 아니기 때문에 궁녀가 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최숙빈이 궁녀 출신이었다는 것은 그가 무수리 출신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혈통을 근거로 왕이 배출되던 시대에, 공노비 출신 후궁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왕이 되는 데 지장을 주는 요인이었다. 그런데도 영조는 다수파이자 보수파인 노론당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노론당한테 큰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

사라진 당파 활동
 
영조의 아버지 숙종을 이어 보위에 오른 인물은 숙종의 장남이자 영조의 이복형인 경종이다. 경종은 32세에 왕이 됐다. 얼마든지 후계자를 낳을 수 있는 나이에 왕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영조는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노론당은 소론당의 지지를 받는 경종을 압박해서 영조를 후계자로 만들었다. 경종에게 왕자가 없으니 영조를 후계자로 세우라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이렇게 노론당한테 은혜를 입어 왕이 됐으면서도, 영조는 소론당뿐 아니라 노론당까지 억누르고 탕평정책을 실시했다. 의리가 없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영조와 정조가 통치한 기간은 1724년부터 1800년까지 도합 76년간이다. 이 76년간의 대부분 동안, 그러니까 탕평이 시행되는 동안에는 당파 활동이 공식 금지됐다. 어느 당파도 공개적으로 조직적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정조가 죽은 뒤로는 노론당 일부인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가 외척(왕실 사돈)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장악했지만, 이들이 노론당 차원에서 국정을 운영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한 세도정치는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종식됐다. 고종 시대에도 노론당 계열이 두각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노론당의 이름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론당의 공식 활동은 영조의 탕평정치와 함께 사실상 종료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조직적 활동까지 실질적으로도 종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노론당의 신세를 진 영조가 탕평을 명분으로 노론당의 양지 활동을 억제했으니, 영조는 배신자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영조가 노론당의 차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당쟁의 비극을 누구보다도 절절히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SBS

 
당쟁의 비극

이복형이기는 하지만, 그는 경종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영조의 어머니가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이 사형을 당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영조와 경종은 친형제 이상의 우애를 유지했다.
 
영조는 그런 이복형과의 관계가 당파들의 개입으로 인해 정적 관계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이 죽었기 때문에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이 경험은 영조가 당쟁을 억제하고 탕평을 추진하게 된 결정적 동기 중 하나가 됐다.
 
마음먹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먹었다고 해서, 또 왕이 됐다고 해서 노론당 같은 거대 세력을 무조건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조가 자기 생각을 행동을 옮길 수 있었던 데는 정치 상황이 큰 도움이 됐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당파들을 상호 견제시키고 이간하는 방법으로 당쟁에 불을 붙였다. 그런 방법으로 왕권의 위상을 제고했다. 이것이 훗날 영조한테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숙종 시대의 치열한 당쟁은 당파들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상황은 영조가 비교적 수월하게 탕평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됐다.
 
또 다른 정치 상황도 도움이 됐다. 영조가 노론당에 대한 심리적 채무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역학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소론당이 경종의 집권으로 강해져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들이 영조 정권을 위협하는 상황은, 영조가 자기편인 노론당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됐다. 정치 안정을 위해 소론당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로 자기편을 달랠 수 있는 방편이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활용해 영조는 '은인들'을 배신했다. 노·소 두 당파 내부의 탕평 지지세력을 결집해 국정운영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런 발판 위에서 백성과 나라를 위한 더 큰 정치를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더 큰 의리'를 위해 '작은 의리'를 배신했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한다는 말이 잘 적용될 만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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