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포스터

▲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포스터ⓒ (주)디오시네마

  

할 일 없는 일요일, 어느 영화를 보았다. 제목도 참 길고 겉멋이 잔뜩 든 일본영화 같았다. '도쿄 밤하늘' 어쩌고로 시작해 '블루'로 끝나는 긴 제목을 가진 영화였는데 한국의 오늘을 보는 듯 찌릿하고 섬뜩했다.

되는대로 찍은 것 같은 카메라 움직임과 시를 너무 닮아선지 오그라드는 대사에도, 마냥 욕할 수 없는 진심이 있었다. 실패하고 우울하여 사랑조차 겁내는 이들에게 주는 응원 같은 것 말이다.

영화는 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여느 멋지고 잘난 남녀의 연애가 아니라, 흔해빠지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한 남녀의 이야기가 영화의 주된 관심이다. 공사장 막노동꾼 남자와, 낮에는 간호사 밤에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가 바로 그들이다.

극 중 신지(이케마츠 소스케 분)는 공사장 노동자다. 서른 전후쯤 되는 그는 공사판에서 일을 하고 동료들과 술판을 벌이며 매일을 산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하루 종일 아무 말이나 떠벌이지만, 맥락도 요지도 없어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런 그 앞에 미카(이시바시 시즈카 분)가 나타난다. 미카는 큰마음을 먹고 찾은 비싼 바에서 만난 종업원이었고, 길을 걷다 돌아본 곳에 있던 행인이었으며, 친구가 마음에 품은 여자이기도 했다. 처음엔 '스치는 인연이겠지' 했는데 우연과 필연이 겹치며, 신지에게 미카는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간다.

두드리는 사랑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미카(이시바시 시즈카 분)가 일하는 술집에 찾아온 공사장 인부들.

▲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미카(이시바시 시즈카 분)가 일하는 술집에 찾아온 공사장 인부들.ⓒ (주)디오시네마

  
모든 게 흔한 21세기 세상에선 사랑도 흔해빠진 것만 같다. TV에는 하루 종일 사랑하는 남녀가 등장하고, 거리에 나서면 손에 손을 맞잡은 커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사랑하는가' 싶은 날이면, 가슴 한 켠에 외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사람 말이다. 사랑을 느끼더라도 애써 무시하고, 무시하려 하고, 급기야는 사랑하지 않았다고 믿는 그런 사람을 나는 지난 삶 동안 아주 많이 만나왔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삶 가운데서 다른 누구를 들일 여유가 없는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마음을 닫고서 앞으로 앞으로만 걷는다.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이 '가난한 사랑 노래'를 발표한 건 1988년이다. 역대 최대수준으로 중산층이 확대됐고 사회 전체가 풍요를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다. 민주화가 성큼 다가왔고, 국제적 행사인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했다. 그런데 이 때에도 가난해서 사랑을 포기한 연인들이 있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서울뿐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 다만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2018년 도쿄의 밤하늘과 1988년 서울의 밤하늘이 통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도쿄와 서울 모두 아주 외로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도시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낯선 곳에 터 잡아 매일 홀로 빈 집에 들어가는 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완전히 검어지지 않는 아주 짙은 푸른빛이 감도는 도시의 밤하늘 아래, 어떤 이들은 완전한 안식을 얻지 못할 테니까.

한쪽 눈이 안 보이는 남자, 사랑을 저주하는 여자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고 살던 신지(이케마츠 소스케 분)의 모습.

▲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고 살던 신지(이케마츠 소스케 분)의 모습.ⓒ (주)디오시네마

  
신지와 미카는 매일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영화는 신지를 찾아온 한 동창을 통해 그가 가진 결점을 관객 앞에 그대로 드러낸다. 학창 시절부터 신지를 좋아했다는 동창은, 신지가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감추기 위해 애써 밝은 척했던 모습이 귀여웠다고 털어놓는다. 다시 말해 신지는 평생 연기를 하며 살아온 것이다. 한족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 없는 말들로 덮으며 말이다.
 
특별한 꿈이 없는 신지는 매일 하루하루를 죽인다. 그를 찾은 동창은 제법 똑똑했던 그가 왜 공사장에서 일하는지 궁금해하지만, 신지는 '적당해서'란 말 외엔 그럴싸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미카를 마음에 품은 신지가 제대로 말 한마디 걸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제게 적당한 것과 적당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은 미리 포기하는 습관 같은 것 말이다. 요컨대 패배를 피하려는 패배주의다.

미카 역시 마찬가지다. 낮에는 간호사, 밤에는 술집에 나가는 그녀는 알고 보면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동생을 뒷바라지하는 가장이다. 사랑을 저주하는 염세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누구보다 뜨거운 사랑을 했던 여자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오스-!'하고 가라테 식 기합을 넣는 모습에선 무너져가는 삶을 지탱하려는 절실함마저 엿보인다.

오래전 염세주의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이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대체 왜 세상을 그토록 부정적으로 바라보는지가 궁금하였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어나갈수록 나는 그가 삶을 긍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다는 반증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언제나 행복을 향하고 있었고, 그 행복이 너무나 쉽게 위협받기 때문에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전 생애 동안 명랑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명랑함을 잃으면 삶이 위기에 빠진다고 설파했다.
 
사랑을 저주하는 미카에게선 세상을 비난했던 쇼펜하우어가 보인다. 누구보다 삶과 행복을 간절히 희구해서, 도리어 세계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던 철학자가 읽힌다. '도시를 사랑하는 건 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되뇌던 미카가 어느덧 신지와의 관계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들과 같은 상황에 놓인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영화로부터 위로를 느꼈을지 생각해본다.

실패가 거듭되면 사랑조차 두려워진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미카는 고향에 사는 아버지의 생활비와 동생의 학비를 혼자 감당하는 중이다.

▲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미카는 고향에 사는 아버지의 생활비와 동생의 학비를 혼자 감당하는 중이다.ⓒ (주)디오시네마

  
영화를 함께 본 누군가가 내게, 이 영화는 '연달아 실패해본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실패가 거듭되면 사랑조차 실패할까 두려워지는 법'이라며, '살아갈 힘이 아무것도 없는데 사랑마저 떠나면 어찌 될지 두려운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왜 아니겠나.

영화 속 신지와 함께 공사장에서 일하던 이와시타(테츠시 타나카 분)는 허리를 다쳐 더는 일할 수 없게 되자 일터를 떠난다. 허리가 아파 지퍼도 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이가 들고 주변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그의 상황은 위태하기 짝이 없다. 신지와 다른 동료들은 떠나는 이와시타에게 걱정의 눈길을 보낸다. 그러자 이와시타가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 그래도 죽는 날까진 살 거야."

어쩌면 이것이 이 어수룩한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마음을 닫지 말라고, 죽는 날까진 어떻게든 살아내 보자고. 매일 아침 '오스-!'하고 기합을 넣으면 하루쯤은 그럭저럭 살아지리라고. 그러다 보면 운 좋게 마음 가는 무엇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글을 다 쓰고 보니, 이제야 생각이 난다. 이 영화의 제목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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