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작품의 배경쯤으로 평가 절하되었던 영상이 무대 위에서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생명력을 얻게 된 데는 정재진 미디어아티스트의 공이 컸다.

텍스트에 대한 부단한 연구를 거쳐 무대라는 캔버스에 시적 영상미와 환상적인 상상력을 수놓으며 공연의 세계는 한층 더 충만해졌다. 공연부터 전시와 행사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활동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그녀를 스스로가 영감의 발원지라 일컫는 은존당에서 만났다.
  
 공연영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미디어아티스트 정재진

공연영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미디어아티스트 정재진 ⓒ ⓒ EPITAPH.Corp

  
폭넓은 경험의 스펙트럼, 공연과의 접점을 찾다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다양한 경험에 대한 갈증이 그녀를 화실 밖의 세상으로 이끌었다. 사진에서 촉발된 흥미가 촉매제가 되어 영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당시만 해도 영상 교육기관이 많지 않았던 탓에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직접 발품을 팔아 찾아다녔다.

"회화를 전공했다고 해도 그 텍스처를 반드시 물감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행위자가 될 수도 있는 거고요. 표현하고자 하는 철학만 분명하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소재로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하게 알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넓혀줄 것이라 확신한 그녀는 < 20대에 해보아야 할 100가지 >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실행하며 세상과의 소통을 이어나갔다.

"제가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대가로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을 찾아가 가르침과 조언을 청하기도 하고, 사회운동을 해보기도 했어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받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큰 자산이 됐죠. 그리고 사회 약자들에 대해서도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며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오로지 20대 때에만 할 수 있는 그 일들이 현재의 저를 만든 밑천이 된 셈이에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예술세계를 확장해온 정재진 미디어아티스트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예술세계를 확장해온 정재진 미디어아티스트 ⓒ ⓒ EPITAPH.Corp

  
여러 장르를 오가며 활동하지만, 유독 공연과의 연이 깊었던 것도 폭넓은 경험 치에 힘입은 바가 컸다.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양한 장르에 접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공연과 미디어의 결합에 관심을 갖게 된 것.

"늘 영상으로 무대를 페인팅 한다는 생각으로 작업해왔어요. 배우가 몸으로 표현하듯이, 저는 영상이라는 장르를 통해 무대에서 하나의 배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는 기록으로 남지만, 공연은 오로지 그 순간만 존재하잖아요.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는 관객들과 폭발적인 에너지, 그 순간의 타이밍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장르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바로 '그 순간'에 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죠."

2006년 <바람의 나라>로 뮤지컬계에 입문한 이래, 그녀의 존재감을 확고히 하게 된 것은 2012년 <서편제>를 통해서였다.

"대작이었고, 저를 알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생각했기에 보름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했어요. 한국적인 채색이 돋보이는 작품인 만큼 한국화를 하나하나 그려 영상화하기로 결정했죠. 그동안 우리가 흔히 보아온 한국화의 느낌에서 탈피해 현대적인 시각을 가미해야 승산이 있겠다 싶었어요.

추운 겨울에 손톱까지 부러져 손가락을 동여매고 작업하면서 '한의 정서'를 제대로 체감했다고나 할까요. 작품할 때마다 그 주인공의 캐릭터에 몰입하는 편인데 '송화가 눈이 멀었을 때 이런 심정일 테고, 이걸 예술로 승화시켰을 때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밤을 새기 일쑤였죠."

 
 영상의 미학이 돋보였던 뮤지컬 <서편제>

영상의 미학이 돋보였던 뮤지컬 <서편제> ⓒ ⓒ EPITAPH.Corp

 
공연 전 관계자들만 모인 영상 테스트 시간에 쏟아져 나온 함성과 카메라 세례에 그녀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고, 첫 공연이 끝난 뒤 뜨거운 관객의 반응에 '해냈구나!' 하는 환희를 느낌과 동시에 지난 고생의 시간들이 겹쳐지면서 마음의 눈물을 흘렸다 말한다.
 
상상력을 품은 무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다

<서편제>의 호평에 힘입어 많은 프로젝트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팀을 꾸리게 된다. '묘비명'을 뜻하는 '에피타프(Epitaph)'라는 팀명 속에 그녀는 '한 사람의 삶이 한 문장의 묘비명으로 기억되듯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철학을 꾹꾹 눌러 담았다. 범상치 않은 팀명이 말해주듯 그녀는 가족처럼 애지중지 하던 반려묘의 죽음을 목도한 뒤, 20대부터 죽음이라는 화두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반려묘의 죽음 이후에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낸 사람들의 상실감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고, 명동성당 연령회에서 장례절차를 돕는 봉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거기서 많은 주검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다 드러나더라고요. 그걸 접하면서 제가 죽었을 때 얼굴을 떠올려보니 자신이 없는 거예요.

어려서부터 예술을 해왔지만 온전히 내 만족을 위한 거였고, 타인을 위해 베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저는 삶을 아예 다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제가 가진 재능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거나 혹은 위안을 줄 수 있는 '테라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 거죠."

 
 웰엔딩퍼포먼스를 시연하는 정재진 미디어아티스트

웰엔딩퍼포먼스를 시연하는 정재진 미디어아티스트 ⓒ ⓒ EPITAPH.Corp

 
바쁜 가운데 유언 영상이나, 고인이 살아온 히스토리를 보여주는 영상 작업을 해온 것도 이와 같은 연유 때문이었다.

"보통 죽음은 '단절'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생일은 성대하게 챙기면서 정작 딱 한 번뿐인 죽음에 대해서는 의미 부여가 소홀하다 생각했죠. '웰리빙(Well-living)을 위한 웰엔딩(Well-ending)을 준비하자'라는 모토를 늘 잘 견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웰엔딩퍼포먼스의 한 장면

웰엔딩퍼포먼스의 한 장면 ⓒ ⓒ EPITAPH.Corp

 
줄곧 그녀가 지녀온 죽음에 대한 관심은 뮤지컬 <신과 함께-저승편>을 만나 더없이 좋은 결실로 이어질 수 있었다. 최초로 LED를 무대 바닥에 설치해 지옥의 풍경과 그 안에 있는 배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진일보한 영상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또한 <그날들>의 오프닝 영상은 영화 못지않은 긴박감을 선사하면서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된 바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걸 제가 똑같이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전 늘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노력해왔어요. 장소적 배경이 청와대라고 해서 청와대만 나오고, 숲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숲이 나온다면 그건 그냥 재연이죠. 그런 영상은 오히려 관객들의 상상력을 제한할 수밖에요. 시청각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잖아요. 특히나 영상은 조명과 달리 이미지고, 정보가 담겨 있는 콘텐츠이기 때문에 항상 작업할 때에는 대표되는 상징 이미지를 텍스트에서 찾아내는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영상 활용이 돋보였던 뮤지컬 <그날들>

영상 활용이 돋보였던 뮤지컬 <그날들> ⓒ ⓒ EPITAPH.Corp

 
국내를 대표하는 미디어아티스트로 활약해온 그녀는 2018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공연 <싱잉 인 더 레인>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올해는 <팬텀> 공연에도 참여하면서 한국을 넘어 활동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팬텀> 일본 스태프와  영상 메모리 수정 중인 정재진 미디어아티스트

<팬텀> 일본 스태프와 영상 메모리 수정 중인 정재진 미디어아티스트 ⓒ ⓒ 다카라즈카 가극단

   
그녀가 영상 작가로 참여하면서 팬텀의 오프닝 영상은 더없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다 배우들이 채워 줄 테니 오프닝이 관건이라고 생각했죠. 사람들이 대부분 줄거리는 알고 있을 테고, 팬텀의 시각에서 그 공간을 좀 더 보여준다면 몰입이 쉽겠다 싶었죠.

팬텀이 노를 저어서 자기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낮에 파리의 아름다운 배경에서 밤이 되면서 달이 뜨고 이 세상이 거꾸로 다시 뒤집혀요. 누구나 화려하고 아름다움 속에 이면을 간직하고 있듯이 팬텀의 공간을 통해서 그의 내면에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효과를 주고 싶었거든요."

  
 <팬텀> 공연전 타이틀 영상장면

<팬텀> 공연전 타이틀 영상장면 ⓒ ⓒ 다카라즈카가극단

     
그녀의 남다른 분석력과 프로의식은 까다롭고 보수적 이기로 정평이 난 다카라즈카 스태프의 마음을 움직였고, 신뢰관계는 여기서 싹텄다.

"제가 낸 의견을 더없이 쿨하게 받아들여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지킬 것은 잘 지키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전혀 거부감이 없으시더라고요. 개개인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팀의 하모니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면도 감동적으로 다가왔어요. 저도 앞으로는 그렇게 일을 하려고요. 제가 느낀 만큼 여기서 그렇게 일한다면, 제 주변도 변할 테고,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다음 기사 보기] 예술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 예술로 보답하다 http://omn.kr/1ht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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