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16만 명의 관객. 130억 대작 <자전차왕 엄복동>(아래 <엄복동>)의 초라한 성적표다. 3월 3주차 여러 대작들이 개봉하면서 <엄복동>의 상영은 이대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엄복동이라는 실존하는 인물을 최초로 다룬 영화, 3·1 운동 100주년이라는 개봉 시기, 화려한 출연진 등 유입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엄복동>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을까.

반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항거>는 저예산 영화인데도 100만 관객 기록을 달성했다. <항거>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을 흑백 처리하는 도전을 했지만 큰 호응을 얻었다. 왜 예산이 <항거>보다 10배 이상 많이 투입된 <엄복동>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고아성을 제외하고는 잘 알려진 배우가 많지 않은 <항거>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100만 관객을 기록했을까.

사실 <엄복동>의 흥행 참패 결과는 일견 <엄복동>의 제작 과정의 잡음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김유성 감독이 다시 복귀하긴 했지만 제작사 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의 이범수 대표와의 마찰이 생겨 촬영 중간에 현장에서 하차한 사태가 발생한 바 있다. 당시 스태프 근로계약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터져나왔다. (관련 기사: 영화 <엄복동> 감독 돌연 하차, 스태프 계약서도 불공정 논란)
 
 <자전차왕 엄복동>의 한 장면

<자전차왕 엄복동>의 한 장면 ⓒ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제작 과정에서부터 마찰이 불거지니 영화적 완성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4일, 상영관을 찾아서 관람한 결과 <엄복동>에서는 단순히 제작 과정만의 잡음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는 문제가 여럿 눈에 띄었다.

130억 대작 <엄복동>의 실패

<엄복동>에는 영화 중간 중간 관객들의 유입 요소가 상당히 많았다. 우선 130억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으로 공을 들인 만큼, 극 중 자전차 대회를 다루는 경기장의 스케일이 대단했다. 영화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대회 장면도 매번 새롭게 느껴질 정도로 박진감 있는 편이었다. 엄복동(정지훈 분)이 처음 자전거를 접하면서 자전거의 매력에 빠져드는 장면에서도 영화의 중요 소재인 자전거의 매력을 잘 살렸다.

무엇보다 <엄복동>의 출연진도 화려하다. 정지훈, 강소라, 이범수 같은 주연만이 아니라 고창석, 김희원, 민효린, 이시언, 박진주, 박근형, 송재호 등의 조연들도 섭외됐다. 이원종, 이한위 같은 특별출연까지 합치면 그리 길지 않은 116분의 러닝타임 내내 반가운 얼굴들을 스크린에서 계속 볼 수 있다.
 
 <자전차왕 엄복동> 스틸컷

<자전차왕 엄복동> 스틸컷 ⓒ (주)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이들은 영화가 조선 대 일본으로 서사를 제한하는 선택을 하면서 입체성이 없는 평면적인 인물이 되고 만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조선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선하거나 정의로운 사람들뿐이다. 헌신적으로 독립 운동을 하거나(강소라, 이범수, 고창석) 옆에서 독립 운동을 돕거나(민효린) 지나치게 순진무구(정지훈, 박진주)하다. 또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일본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모두 깊은 고민 없이 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시선은 116분에 걸친 러닝타임 내내 한 번도 변하는 일 없이 계속 엿보인다.

캐릭터의 평면성은 남녀 캐릭터를 불문하고 적용되나 특히 여성 캐릭터의 경우 캐릭터의 서사가 더욱 제한적이다. 주인공인 엄복동을 중심으로 여성 캐릭터는 엄복동이 좋아하는 여성(강소라), 엄복동을 좋아하는 여성(민효린), 엄복동의 동생(박진주) 정도로 쓰이고 만다.

이번 영화에서 강소라가 맡은 캐릭터는 무장 투쟁을 하는 운동가다. 다른 캐릭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상 깊게 묘사되지만, 그의 죽음이 엄복동의 마지막 자전차 경주를 위해 쓰였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찜찜함을 남긴다.

주인공 엄복동의 평면성 역시 영화 내내 두드러진다. 순박하고 순수한 시골 청년 엄복동은 자전거가 순수하게 좋고 자전거를 타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런 순박함은 그가 조선 대표로 자전거 대회에 나가서도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날 엄복동은 자신이 좋아하는 형신(강소라 분)의 죽음을 마주하고 "이겨달라"고 부탁한 형신의 말에 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영웅으로서 갑자기 우뚝 서게 된다.
 
 <자전차왕 엄복동> 스틸컷

<자전차왕 엄복동> 스틸컷 ⓒ (주)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일제 강점기,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한일전이 있었다'는 <엄복동>의 메인 카피는 영화를 끌고 가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영화는 전조선자전차대회라는 실재했던 자전거대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대결 구도로 경쟁을 붙인다.

일본에 갖는 관객들의 반감을 노려 관객을 끌어모으려고 한 안일한 마켓팅 전략에 결국 <엄복동>은 '국뽕'이라는 뼈아픈 비판을 들어야 했다.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대결을 통해 공분을 사는 방식의 '항일 서사'로는 2019년의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건 <엄복동>의 흥행 실패를 통해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항거>가 간 어려운 길
 
 영화 <항거> 스틸 사진

영화 <항거> 스틸 사진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엄복동>이 간 길과 <항거>가 택한 길은 명확히 달랐다. <항거>에는 김향화(김새벽 분)가 '일본이 지배할 때나 그 전이나 살기는 여전히 어려웠다'고 말하면서 그저 양반에서 일본인으로 권력이 넘어갔을 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조선의 핍박받던 민중들에게는 일본뿐만 아니라 양반 지배층의 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었을 테니, 이러한 묘사 또한 받아들임직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항거>에서 3·1 만세운동이 일본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인 운동이라는 시선과 함께 지배-피지배의 구도를 민중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짚어준 점은 놀라웠다. "이런 차별 없애자고 만세 부른 거 아니냐"는 김향화의 대사는 직관적으로 <항거>의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또 유관순(고아성 분)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만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도 싸운다. 8호실의 수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유관순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영웅적인 면모를 느끼지만 동시에 영화는 유관순만을 부각해서 비추지는 않는다. 혼자서 우뚝 선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가려는 영웅의 모습으로 유관순을 묘사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엄복동>은 <항거>와 이 지점에서 달랐다.

<항거>가 개봉한 이후 그저 유관순만이 아니라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 8호 감방 수인들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분위기는 이를 증명한다. <항거>를 통해 관객들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라는 기존에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유관순만이 아니라 3·1운동 당시에는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으며 이들도 유관순처럼 독립에 헌신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 <항거>에서 이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감옥 안에서 투철한 정신력이 있는 인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때로는 아이 때문에 유관순을 밀고하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김지성) 유관순을 원망하기도 하며(김남진) 어쩌면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면서 두려움에 떨기도(고아성)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인간적인' 두려움을 떨치고 결국 만세를 부른다. 감옥 안에서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건 이들이 인간적이고 약한 면을 뒤로 하고 직접 위험을 마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스틸컷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항거> 장면

영화 <항거> 장면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만일 <항거>가 유관순이 8호 감방에 들어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의 3·1 만세 운동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분명 연출로나 장면으로나 이쪽이 더 선명하고 매력적이었을 수도 있다. 흑백으로 영화를 연출하는 방식, 상업적으로 불리한 모험을 감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여러 관객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는 어쩌면 저예산 영화로서 제한적인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항거>의 한계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부족한 예산을 잘 활용한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엄복동>의 경우 영화가 개봉하자 실존 인물 엄복동이 말년에 자전거를 훔쳤다는 사실을 영화에서 누락해 사실상 은폐했음이 드러났다. 이 또한 상업 영화로서의 <엄복동>의 선택이지만, 역사의 '선택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조선과 일본의 대결을 통해 엄복동이라는 영웅적 면모를 선명하게 강조하려면, 결국 그가 자전거 도둑이라는 사실은 영화에 넣어서는 안 될 불필요한 요소로 판단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나아가 영화는 엄복동의 부정적인 부분을 다 지웠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생과 큰 연관점이 없었던 독립 운동을 끼워넣었다. 실제 엄복동이 서대문 형무소에 잠시 수감됐던 일이 있었는데, 이는 독립운동 때문이 아니라 자전거를 훔친 것 때문이었다. (관련 기사: "훔친 자전거를..." 과거 신문기사 속 '엄복동'이 놀랍다)

영화 속 인물이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드러낸 <항거>와 자전거 도둑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독립운동가'로 엄복동을 다시 그린 <엄복동>. 두 영화에서 보이는 역사 재현의 선택적 차이는 제작진의 역량을 너무나 잘 비교해서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드라마라면 고문 장면은 피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저항의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 고문 장면이 없다면 그것 역시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고문 장면이 '어떻게' 들어가느냐일 것이다. 엄복동의 근육과 흠뻑 젖은 피·상처를 강조한 <엄복동>과 감옥신과 고문 장면을 모두 흑백으로 처리한 <항거>에는 애초에 다른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역사 재현 과정에서 엿보인 이런 크고 작은 선택들이 <엄복동>과 <항거>의 성패를 가른 건 아니었을까.
자전차왕 엄복동 항거 정지훈 고아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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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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