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계의 이단아라고 부르기까지는 어렵겠지만, 문제아라고 하기엔 충분한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 그의 문제적 행태나 성향은 조금만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기에 이 자리에서 거론하지는 않는다. 현재 국내에는 그의 두 작품이 상영 중이다. <살인마 잭의 집>은 따끈따끈한 최근 연출작이고, <어둠 속의 댄서>는 재개봉작이다.

두 작품 가운데 <어둠 속의 댄서>는 트리에 감독에게 2000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것으로,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호감과 비호감으로 갈려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맞서는 편인데 <어둠 속의 댄서>는 아마 예외에 속할 것이다.

물론 <어둠 속의 댄서>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지만, 통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는 않지 싶다. 다음으로는 무엇보다 이 작품이 뮤지컬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뮤지컬이란 형식이 영화의 내용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결정했다. 대중의 호의적 반응 또한 뮤지컬이라는 형식과 관련된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한 장면.

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한 장면.ⓒ 조이애시네마

 
'어둠 속의 댄서'는 잔 다르크?

"나는 뮤지컬을 좋아한다. 이번 작품 속의 뮤지컬은 〈사운드 오브 뮤직〉과 〈마이 페어 레이디〉 등을 차용했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있다. 여주인공 비요크의 존재가 너무 강해 그의 뮤지컬이 아니라 극중 주인공인 셀마의 뮤지컬이 되도록 연출했다. 이 영화는 '잔 다르크'라는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

그의 말마따나 이 영화는 전형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의 수입 배급사는 "<어둠 속의 댄서>는 정통 멜로의 형식과 디테일에 있어선 현실성을 기반으로 해 만들었다"며 "예쁘게 보이려고 하거나 가식적인 표현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앞 못 보는 여인이 자식을 위해 스스로 희생됨을 자처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플롯을 짜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불가불 신파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이 '신파'는 우화로 읽혀야 한다. 무고한 자의 자발적 희생됨은 그것이 흔한 모성의 형식을 취한다 하여도 다소 초월적이고 종교적이다.

트리에 감독이 잔 다르크를 언급했을 때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 셀마를 통해 그려지는 종교성을 자신도 모르게 지적한 것이다. '희생됨'은 폭력을 근간으로 한 '사회'의 문법이다.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포함한 자신의 몫을 내어놓는, 모성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희생됨은 폭력의 현상이며 사회의 차원에서 일어난다.

반면 '자발적인 희생됨'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수식어 없는 '희생'이나 '희생됨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높은 수준의 희생됨이겠지만 '희생함'에는 못 미친다. 그렇지만 분류하자면 '자발적인 희생됨'은 '희생함'과 같은 범주에 묶어야 한다. 신적인 영역에 닿아 있기에 인간사에서 희생함은 드물고 귀하다. 하여 '자발적 희생됨'이나 '희생함'은 종교의 문법에 속한다.

성경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삭을 애지중지 키우다가 어느 날 그를 죽여서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한다. 이 순종을 아브라함의 희생이라고 등치시킬 수 있다. 반면 이 사건에서 이삭은 희생당하는 자다. 잘 알다시피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기 직전에 천사가 개입함으로써 이삭이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희생은, 이삭의 희생됨과는 무관하게 실현되었다. 반면 이삭의 희생됨은 실현되지 않았다.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희생됨의 캐릭터로 그려질 수 있었지만 희생함의 캐릭터로 승격된다. 셀마와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차이가 목격되는데, 그로 인하여 셀마는 '희생함'이 아니라 '자발적 희생됨'이 된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사건에서는 이삭이 희생물이 되지만, 영화에서는 셀마 자신이 희생물이 된다. '자발적 희생됨'은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희생함'의 성격을 갖는다.

트리에 감독은 무고하고 아름다운 주인공이 곤경에 처했다가 천사의 개입에 비견될 모종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해피엔딩에 이른다는 전형적 스토리를 원천 차단한 것에서 머물지 않고, 희생의 플롯을 도입하고 거기서 자발적 희생됨의 구조를 만들어내었다. 마지막의 충격적 교수형 장면은, 해피엔딩의 유혹을 끝내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반(反)할리우드적일 뿐 아니라, 희생됨의 육화를 영상화하였다는 측면에서 종교적이다. 잔 다르크의 본질 또한 종교이다.

얼핏 신파로 보이지만 전형적이지 않고 종교적 기상을 물씬 풍기는 서사야말로 이 뮤지컬 영화가 다른 뮤지컬 영화와 차별되는 점이다. 관객의 영화 감수성이 높아진 2000년대에 선보인 뮤지컬 영화라면 당연히 전래의 뮤지컬 영화와 달라야 하는데, <어둠 속의 댄서>가 그러했다. 칸 영화제 또한 인정했고.

 
 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한 장면.

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한 장면.ⓒ 조이애시네마

 
분열된 세계

기존 뮤지컬과 다르다고 할 때 <어둠 속의 댄서>의 서사 방식을 우선적으로 거론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요소로는 뮤지컬을 서사와 접목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앞을 못 보는 여인이 직면한 현실에서 뮤지컬은 일종의 여인의 환상을 상징한다. 기존 뮤지컬 영화가 영화라는 환상을 뮤지컬로 표현하는 평면 구조를 갖췄다면 <어둠 속의 댄서>는 영화라는 환상 속에 또 다른 환상을 뮤지컬로 투입하는 입체 구조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 영화는 현실을 음악과 춤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재미를 주지만 그로 인한 현실성의 저하가 불가피했다. 반면 <어둠 속의 댄서>에서는 뮤지컬을 사용하는 부분을 셀마의 환상 영역으로 구분함으로써 뮤지컬 영화임에도 현실성이 높아지게 된다. 영화 밖 우리가 꿈꾸는 환상에서도 다양한 장르가 혼재한다고 할 때 셀마의 환상을 뮤지컬로 처리한 감각은 적절했다.

이 영화는 비교적 단순한 플롯을 가동하면서도 주민과 이민자, 눈 뜬 자와 눈 먼 자,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등 여러 이분법과 분열을 중층적으로 엮어내어 선악의 문제, 삶의 문제를 간단하지 않게 형상화한다.

'자발적 희생됨'의 캐릭터 셀마는 현실과 환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일반 극영화의 장면과 뮤지컬의 장면 등 영화 속에 존재하는 여러 이분법을 넘나드는 사람이다. 자신의  죽음과 아들의 삶, 자신의 영원한 실명과 아들의 개안 등 '자발적 희생됨'의 통로를 의연하게 통과하여, 충격적이지만 카타르시스에 근접한 무엇인가를 부여잡은 결말을 보여준다.

셀마 역은 아이슬란드 출신 가수 비요크가 맡았다. 비요크는 배우 데뷔작 <더 주니퍼 트리> 이후 뮤지션으로 활동하던 중, 트리에 감독의 제안으로 10년 만에 <어둠 속의 댄서>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으로 자신처럼 눈이 멀어 가는 아들을 위해 그의 개안 수술비를 벌기 위해 악착같이 공장에서 일하는 미국 사회의 이민자이다. 극 중 현실은 암울하지만 환상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와 춤을 보여준, 새로운 유형의 뮤지컬 주인공으로서 많은 영화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이번 영화는 오래전 기억을 즐겁게 되살려준다.

영화는 지난 2월 21일 재개봉했다.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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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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