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암이었다. 드라마 속 해결의 만능키 말이다. 최고 시청률 45.1%(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으로 '암' 설정은 정점을 찍었다.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암이었다가 '상상암'이었다가 또 아니라고 했다가 다시 암이라며 결국 목숨을 거뒀다. 드라마는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그렸지만, 당시 너무 황당한 설정이라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쏟아지기도 했다. 

'암'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간 이식'의 시대가 왔나보다. 이번에도 KBS 드라마들의 이야기다.
 
 KBS 2TV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 포스터

KBS 2TV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 포스터 ⓒ KBS


간 이식이 이렇게 흔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현재 방송 중인 KBS 드라마 중 무려 3개의 드라마에서 동시에 '간 이식'으로 갈등을 점화시키고 있다. <황금빛 내 인생>의 시청률을 넘어섰다는 <하나뿐인 내편>과 KBS 주중 미니시리즈를 늪에서 구원해 준 <왜 그래 풍상씨>, 지지부진한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간 이식'을 통해 화제성을 획득한 주중 일일 드라마 <비켜라 운명아>가 그 주인공들이다. 

간마저 주는 극진한 부정 

태생이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하늘은 그의 착함을 돌봐주지 않았다. 부모를 모르는 고아였으며 동생같은 동철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소년원에 다녀온다. 이후로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겨우 결혼을 하고 딸을 얻어, 이제야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아픈 아내의 수술비를 구하려다 살인범이 되어 오랜 감옥 생활을 했다. 종영을 10회 남겨둔 <하나뿐인 내편>은 세상에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착한 사람 강수일(최수종 분)의 시련기다. 

애초에 감옥에 가게 된 계기도 이제 와 보니 살인 누명을 쓴 거였고, 그로 인해 드라마 내내 피해자 가족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은 이혼을 당했다. 그런데 이제,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피해자의 아들이 간 경화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와 딱 들어맞는 간이 하필 강수일의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의 한 장면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의 한 장면 ⓒ KBS


<황금빛 내 인생>이 '암 서사'를 통해 곡진한 부성애의 개연성을 보여주려 했다면, <하나뿐인 내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버지가 딸의 이혼한 남편을 위해 간을 떼 주고 생사의 기로에 서기 때문이다. 두 드라마가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설득하고자 하는 건 애틋한 '부정'(父情)이다. 그러나 극중 아버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이러니 하게 느껴진다.

<황금빛 내 인생>의 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는 한때 사업으로 잘 나갔지만 보증 때문에 모든 것을 날리고 가족들을 경제적 어려움에 빠뜨린다. 결국 생계가 막막해진 아내가 재벌가에 보낼 딸을 '바꿔치기' 했으니, 서태수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두 딸이 고생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하나뿐인 내편>의 강수일은 심지어 아버지였던 적이 없다. 딸이 아버지를 인지하기도 전에 감옥에 들어간 그는 이제 성인이 된 딸 앞에 나타난다. 아버지들은 뒤늦게 '아버지'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병에 걸리거나 자신의 간을 떼어주고 의식 불명에 빠진다.

이 드라마들은 죽음 또는 죽음에 버금가는 자기 희생을 통해야만 진짜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주말 드라마, 미니 시리즈 등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시키고 있지만 결국은 이제 현실에서 거의 실종된 것과 다름 없는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를 부활시키겠다는 주제의식으로 보인다.
 
 KBS 2TV 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의 한 장면

KBS 2TV 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의 한 장면 ⓒ KBS


변주된 가부장의 부활 

가부장제의 아버지는 드라마에서 형의 모습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바로 <왜 그래 풍상씨>가 그렇다. <왜 그래 풍상씨>의 맏형 풍상씨(유준상 분) 역시 <하나뿐인 내편> 속 강수일에 버금가는 질곡 어린 인생을 사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간 이식이 필요했지만 차마 자식들에게 말할 염치가 없어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 노양심(이보희 분)은 자식들을 학대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남에게 팔아넘기기까지 한 '파렴치한'이었다. 풍상씨는 이런 노양심도 어머니란 이유로 보듬고, 나머지 가족들을 돌보려 애쓴다.

심지어 그는 간 이식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지만 동생들 몸에 생길 흉터부터, 치료 비용 등 혼자 걱정을 껴안고 차마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하지만 형의 걱정과는 달리, 동생들은 '친형제가 아니니까' 혹은 '그동안 받아왔던 가족 내 차별 대우에 대한 설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간 이식 수술을 거부한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의 대가인 문영남 작가는 특유의 내공으로 '간 이식'을 둘러싼 집안의 갈등을 절정으로 이끌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 '간 이식'를 통해 가족 화합이라는 해피엔딩의 극적인 계기가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의 한 장면

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의 한 장면 ⓒ KBS

   
누군가에게 자신의 간 일부를 떼어준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에게도 말이다. 하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심지어 그간 자신에게 온갖 수모를 준 가족의 일원에게 주겠다고 어떻게 나설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비켜라 운명아>에서는 '간 이식'이 가족 간의 거래로 등장한다. 역시 재벌가의 이야기다. 현강 그룹 회장의 승계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양남진(박윤재 분)과 최시우(강태성 분). 적자(본처의 아들)와 서출(첩의 아들)이라는 왜곡된 가족 구도 속에서 이복 형제가 된 그들은 회사의 일을 두고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물론 그 갈등은 언제나 KBS 드라마가 그래왔듯, 정통성이 약한 첩의 자식 최시우와 그 어머니에 의해 조장된 해프닝이다. 그러던 중 최시우가 급성 간경변으로 쓰러져 간 이식이 필요해진다. 이에 최시우의 엄마 최수희(김혜리 분)는 양남진의 전 연인인 한승주(서효림 분)과 아들을 정략 결혼 시키고, 양남진에게 회사 일을 빌미로 간 이식을 종용하려 한다.
 
 KBS 2TV <비켜라 운명아>의 한 장면.

KBS 2TV <비켜라 운명아>의 한 장면. ⓒ KBS


가정을 지키려는 남자들,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들 

간 이식을 해야 하는 병명은 다양하다. 그러나 해결책은 오로지 남자 주인공이 혹은 남자 주인공에게 간 이식을 하는 방법뿐이다. <하나뿐인 내편>, <왜 그래 풍상씨>, <비켜라 운명아> 모두의 이야기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간 이식' 기로에 놓인 당사자들은 모두 남자이며, 그들이 대부분 '가부장적 관계'의 복원 혹은 승계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실한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온갖 어려움을 뚫고 회복하려 했던 <하나뿐인 내편>의 강수일, 형이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이끌어 가려 했던 <왜 그래 풍상씨>의 맏형 풍상,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현강 그룹의 유일한 적통 손자 양남진까지. 

반면에 극중에서 여성들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하나뿐인 내편> 속 소양자(임예진 분), 나홍실(이혜숙 분), 오은영(차화연 분) 등 중년 여성의 캐릭터부터 젊은 장다야(윤진이 분), 김미란(나혜미 분)까지 그 누구도 '긍정'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없다. 그들은 모두 극중에서 강수일의 고난에 등장한 지뢰들이다. 

<왜 그래 풍상씨>라고 다를까, 무엇보다 가족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든 근원이 어머니 노양심이다. 그는 둘째의 대학 등록금을 낚아채고 딸을 술집에 팔아넘기는가 하면, 아들의 합의금을 가로채 재활의 기회를 놓치도록 만든다. <비켜라 운명아>에서 역시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지만 '첩'이라는 열등감으로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고 아들을 회장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최수희가 가장 주된 악역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들,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남자들. 심지어 그를 위해 동원된 극단적 설정 '간 이식'. 물론 살다보면 병을 피할 수 없고,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드라마에 병이나 죽음이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방송 중인 세 드라마는 개연성 없는 극중 관계들을 '간 이식'이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억지로 봉합시키려 하고 있다. '간 이식'이라는 깜짝쇼를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을 만큼, 결국 2019년 대한민국에서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귀환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파편으로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 어떻게든 '해피엔딩'의 팡파레를 울릴 것이다. 자극적인 설정은 결국 많은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유혹하기에 이런 '막장'이 반복될 수 있었으리라. 세 드라마들이 열심히 홍보하는 '높은 시청률'이 씁쓸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하나 뿐인 내편 비켜라 운명아 왜 그래 풍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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