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스태프노조가 27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왜그래 풍상씨>를 비롯한 5개 KBS 드라마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요청했다.

방송스태프노조가 27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왜그래 풍상씨>를 비롯한 5개 KBS 드라마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요청했다. ⓒ 김윤정


지난 26일 오전, 언론노조 중재로 희망연대 방송스태프지부(아래 방송스태프노조) 집행부와 지상파 3사 드라마 관계자가 만났다. 그동안 방송스태프 노조가 개별 드라마 방송사 관계자와 만난 적은 있었지만, 지상파 3사 드라마 실무자가 정식 테이블에서 만나 스태프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다. 방송 3사 드라마 관계자들은 지난해 6월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부처와 드라마제작사협회, 방송스태프노조, 언론노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이 참여한 '드라마 산업발전을 위한 TF'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드라마제작사협회까지 한데 모인 3자 테이블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머지않아 3자 테이블, 정부 관련 부처까지 참여하는 4자 협상 테이블도 열릴 가능성이 있다. 현재 방송스태프노조와 비슷한 여건이었던 초창기 영화산업노조의 단체 협약 요구가 투자사, 배급사 등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데 성공하면서 변곡점을 맞이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의미 있는 변화도 머지않아 보인다.

여전히 많은 드라마 스태프들은 하루 20시간을 넘나드는 초 장시간 노동을 견디고 있지만, 분명 희망이 보이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비정규직 드라마 스태프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은 방송스태프노조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다. 이들은 일선 스태프들로부터 근로기준법을 위반 사례를 제보받아 고발하고, 특별관리감독을 요청하고 있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드라마 스태프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고 대중의 관심을 촉구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27일에는 <왜그래 풍상씨> 등 KBS 드라마 5편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촉구하기도 했다.   

대다수 스태프들은 계약서 한 장 쓰지 않는 비정규직, 프리랜서인 탓에, 내놓고 불만을 이야기했다가 '찍히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과거에도 비정규직 방송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불합리한 일을 겪고도 항의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부당 노동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항의하는 것도 방송스태프노조의 일. 하지만 이들 역시 방송 스태프들이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가 공개한 tvN <아는 와이프> 촬영 일정. 개정 노동법이 실시 이후에도, '주 최대 68시간'은커녕 20시간 이상 촬영이 이어진 날도 많았다. 이에 대해 <아는 와이프> 제작사 측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일지를 공개하라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함께 tvN <아는 와이프> 촬영 일정을 공개하고 있는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김두영 위원장의 모습. ⓒ 추혜선 의원 페이스북


27일 서울 중구의 한 커피숍에서 김두영 희망연대 방송스태프지부장을 만났다. 16년 차 조명 발전차 기사인 그는,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의 초대 지부장을 맡은 이후 일거리를 잃었다. 김 지부장 외에도 여러 노조 집행부의 피해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메인 감독급으로 일하던 분은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아 다른 팀의 조수 일을 하고 계세요. 수입은 반 토막 났죠. 노조 초창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던 한 분은, 일하던 제작 현장의 근로자 대표로 나섰다가 지금도 피해를 보고 계세요. 저도 노조위원장 맡으면서 기존에 거래하던 조명 감독들이 싹 등을 돌렸어요. 일 특성상 한 번 연이 닿으면 큰 사고를 치거나 하지 않는 이상 계속 같이 가는데, 이렇게 갑자기 등을 돌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에요."

김 지부장은 지인을 통해, 일부 방송사 PD들이 조명감독들에게 '왜 저 사람이랑 일하냐', '껄끄럽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왜 일거리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알게 됐다. 서운한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그들도 연출자 눈치를 봐야 하는 '을'의 입장이라는 점을 이해하기에 자신을 배제한 이유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현장에서 배제됐다. PD들에게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입이 아예 없는 상태예요. 생계가 막막하니 인테리어업 하는 지인 통해 잡부 알바를 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노조 일이 많아서 며칠 하지도 못해요. 지난달에는 4일 일했어요. 노조에서 진행비를 조금 주긴 하는데, 차비 정도예요. 그나마도 부족해서 제 돈을 들이면서 일하고 있죠. 노조 일은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즐겁고 보람차요. 하지만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죠. 가장이니까요."
 
 20일 서울 상암동 MBC 본사 앞에 모인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아래 스태프 노조)가 최승호 사장과의 면담과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을 위한 협의체' 참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일 서울 상암동 MBC 본사 앞에 모인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아래 스태프 노조)가 최승호 사장과의 면담과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을 위한 협의체' 참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김윤정


하지만 그는 막막한 생계보다, 비정규직 스태프 노동자들이 가입된 유일한 노동조합을 협상 당사자로 여기지 않는 방송사들의 태도에 더 큰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기자 주: MBC는 드라마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면서 방송스태프노조가 아닌, 언론노조와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스태프노조는 '드라마 스태프의 절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이들이 소속된 스태프노조를 배제하고 정규직 노동자(PD)들이 소속된 언론노조와만 협의하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언론노조는 스태프노조와 연대하고 있고, 다방면으로 저희 활동을 지지해주고 있어요. 어제(26일) 지상파 3사 드라마 관계자와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했고요. 하지만 언론노조에 소속된 개별 PD들, 저희가 일터에서 만나는 PD들은 참담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드라마 PD가 스태프노조와 관련된 사람은 쓰지 말라는 말을 했대요. 골치 아파진다고요. 참담한 심정이었죠. 그 PD도 언론노조에 소속돼 있을 텐데, 본인들의 요구 사항을 위해서는 열심히 투쟁하면서 왜 우리 노조원들은 탄압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스태프 노동 환경 개선에 공감하던 젊은 PD들이, 연차가 쌓이면서 그들의 선배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도 그래요. 결국은 다 배운 대로 하는 겁니다. 시스템을 바꾸고 인식을 바꿔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아요."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 이정민


여전히 많은 방송 스태프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낯선 단체다. '노조 가입한다고 뭐가 달라져?'라는 회의론부터, '왜 돈까지 내야 하느냐'는 이들, '괜한 분탕질 때문에 현장 분위기만 더 안 좋아진다'는 반대파까지. 이들에게 노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방송 스태프들을 모두 모은 최초의 노조잖아요. 다들 노조에 가입돼 본 적도, 노조 활동을 해본 적도 없는 분들이에요. 노조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스태프들에게 노조에 가입해달라고 신청서를 내밀면 첫 반응이 '뭐 해줄 건데요?'예요. 그럼 농담 삼아 '가입하면 알려줄 테니 일단 가입하라'고 하죠. (웃음)"  

방송스태프노조가 조합원들에게 가장 먼저 제공하는 건, 노동법 교육이다. 자신들이 처한 노동 환경이 불법인지 아닌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개정된 노동법에 따라 300인 이상 언론사에 허용된 한 주 최대 노동 시간은 68시간. 하지만 이는 한 주 노동 시간이 최대 68시간만 넘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루 8시간이 넘는 초과 노동을 한 주에 12시간 이상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만약 한 주에 14시간 촬영이 이틀 발생했다면, 그 주는 8시간 이상 촬영할 수 없다. 

"대부분 스태프들이 이 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작사가 16시간까지 일 시키겠다는 계약서를 내미는 거예요. 그마저도 으레 1~2시간씩 넘기고요. 현장 스태프들 대부분이 시간 개념 없이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날그날 주어진 분량을 마쳐야 촬영이 끝나는 거지, 몇 시까지 시간을 정해두고 일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지금 노조가 줄기차게 외치고 싸워서 하루 16시간 선이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시간, 22시간 이렇게 촬영하는 날이 허다했거든요. 그러니 '16시간'이 쉽게 느껴지는 거죠."

현실에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김두영 지부장은 "머지않아 전세가 역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어떤 날은 2명, 어떤 날은 5명... 매일매일 노조원의 수가 늘고 있고, 머지않아 방송사들이 무시할 수 없는 규모가 될 거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지부장은 쌓이는 가입신청서를 볼 때마다 "적금 쌓이는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라고 했다.  

"수입이 없으니 개인적으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초반엔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라서...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여러 분과장과 사무국장이 함께하고 있어요. 도움이 없다면 혼자서는 절대 못 해요. 

자기 일 하다가도 노조 회의가 있으면 일당 알바를 쓰고 참석하는 분도 있고, 이전에 비해 현장에서 노조원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분들, 부당한 상황에 항의하는 분들도 늘었어요.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느껴질 때마다 기쁘고 보람을 느껴요. 

조합원 숫자도 이대로 가면 연말까지 천 명은 넘을 거라 예상합니다. 그때가 되면 방송국도 제작사도, 방송 스태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때를 생각하면서 즐겁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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